소창 박물관 :::::::::::::::
소창 박물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소개 | 소창 칼럼 | 역사의 강물에 서서 | 옛길 따라서 | 박물관 이야기 | 문화유산 답사기 | 역사문화 보고서 | 열린 사진관 | Travel | 문화풍경 | 열린 마당
소창 아사달 박물관
소창칼럼
역사의 강물에 서서
역사 문화 보고서
문화 유산 답사기
핫 이슈
문화풍경
사랑방
인사를 나눠요
자료실
음악 감상실
묻고 답하기
함께가요
여행게시판
옛길을 따라서
 
 
 
 


  (2004-02-01 11:53:06, Hit : 6752, Vote : 858
 http://www.sochang.net
 공주박물관 국보 도난 사건을 통해 본 불상의 의미

  ■공주박물관 국보 도난 사건을 통해 본 불상의 의미■                                                                                                                                                               

    小窓아사달  차문성  (cha@sochang.net  sochang@chol.com)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나 국보급 도난사건이 영화에서나 외국의 사례로만 여기다가 이번 공주박물관에서 국보1점을 포함 4점의 유물이 도난당한 것은 희대의 도난사건으로 꼽힐 것 같다. 국보급 문화재가 사찰이나 서원등 에서의 도난사건은 여러차례 발생한 바 있지만 이번처럼 국립박물관에서의 도난사건은 초유의 사건이다.
[그림1: 공주국립박물관-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
당시 사건의 발생은 청원경찰 몰래 박물관에 잠입해 당직실에 있는 학예사를 묶고 국보를 비롯 4점의 문화재를 강탈했다는 것인데 순찰중이라 사건 당일 적외선감지기도 꺼져 있었고 1l층 전시실에는 CCTV는 물론 기타 안전장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시관이 강당을 개조해 만든 사실이나 신관의 개관을 앞두고 보안장치에 소홀했다는 것은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박물관의 셔터를 열어두고 순시를 했다는 것도 SOP(표준운영절차) 하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학예사 및 관리인의 책임소재 뿐 아니라 관리시스템상의 오류를 인정하고 보완장치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피해 문화재는 공주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되어 89년 4월 10일 국보 247호로 지정된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公州儀堂金銅菩薩立像), 86년 보령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상감포류문대접, 청자상감국화문고배형기, 계룡면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인화문 접시다.
도난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마자 서재에서 도록을 찾아 봤더니 85년도 판이라 국보 236호밖에 수록이 되지 않아 정확한 모습을 도록상 확인은 못했지만 인터넷상 올려진 몇 개의 그림파일에서 그 대략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小窓時事 에서는 삼국시대의 사상이 불상의 형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혹 이 불상이 어떠한 가치로 국보의 반열에 올랐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얼 초창기에 “불상 보는 법” 시리즈로 등단했던 기억을 더듬어 함께 금동보살상의 가치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리하여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국보나 보물로 판단하는 영역을 뛰어 넘어 조성한 사람과 시대적 상황, 문화유산 자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주변 國家들의 영향을 서로 주고 받으며 발생, 양식적 변화, 異形 , 소멸등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문화의 전달은 소위 실크로드라는 古代路를 통해 전달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구법승들과 전도승들의 기록중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통해 장안에서 서역을 거쳐 천축까지의 여행지가 밝혀지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그 종교적 신심을 확인할 수 있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실크로드는 스텝로와 천산산맥을 지나는 오아시스로, 그리고 해양로로 흔히 구분되어 진다. 유럽행 비행기를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바로 스텝로를 지나가는데 현 항공로는 서울-북경-고비사막-우루무치-울란바트로-바이칼호수-모스코바(페테르부르크)-프랑크푸르트의 루트를 이용하므로 실크로드의 광대한 여정을 항공기에서 나마 경험할 수 있다.
[그림2: 하와이박물관-간다라불상]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의 초기 불교 역시 저항과 수용, 보수와 개혁의 과정을 겪어면서 발전하게 된다.
불상의 탄생은 과거 인도의 서북지방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 불상과 동인도불교의 거점인 인도 북 중부지방의 마투라 불상으로 대별된다. 초기 불자들은 감히 석존을 불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아쇼카왕 시대를 지나면서STUPA(탑)로 표현되어졌고 1세기를 전후해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다른 형식의 불상이 창안되었다. 물론 자연발생적으로 釋尊像을 표현한 것은 아니고 시대적 변화와 사상의 발전이 불상의 제작을 용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표현인 불상은 불상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바로 미술의 표현이 되었고 비로소 예술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흔히들 간다라미술, 마투라미술이라 하는데 간다라와 마투라는 그 지방을 일컬음이다. 간다라는 대당서역기에 건타라국(健馱邏國)라 표현되었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과 스왓일대를 말한다.
마투라는 인도 중북부 지방이며 대당서역기에는 마투라국(摩偸羅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몇 해 전인가 예술의 전당에서 간다라미술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비록 장사 속이었지만 찬란한 초기종교미술의 관람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모처럼 만의 기회가 되었다. 소위 불상이 없던 무불상시대에서 양대 지방에서의 불상의 출현은 불교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바 있지만 오히려 불상이 만들어짐으로 사상의 발전을 입은 바도 크다. 불상의 출현은 흔히들 알렉산더의 인도원정이 원인제공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시기가 BC 326~325인 것을 생각한다면 소위 간다라 불교미술이 인도와 그리스의 만남이란 표현은 300여년의 세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림3: 하와이 박물관-마투라불상]
그러나 탑파의 신앙에 머물러 있던 것이 알렉산더의 원정과 그 후손이 세운 박트리아 왕국,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興起등이 복합적으로 변화의 기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물러간 후 인도는 혼란 속에서 마우리야 왕조가 탄생하고 박트리아제국 외에 페르샤 軍隊을 따라간 그리스 용병들이 스왓트 계곡 등에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 페르샤 군은 생각보다 이 인근에 많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을 지배자로 그리스인과 이란인으로 이뤄진 헬레니즘 문화의 국가였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대하 혹은 대진으로 불렀다. 이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왕국은 기원전 2세기에 인도를 침입하는 데 오히려 불교의 영향으로 받아 박트리아인중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러한 예는 오스만터키의 이슬람化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마투라에서는 토착신앙인 약시와 약사의 조각기풍이 불상에 영향을 미쳐 불상관이 32相80種好라는 특상관이 결정되어 진다. 양대지역은 쿠샨의 통일왕조에서 영향을 서로 미쳐 수염이 2세기에는 수염이 점차 없어지고 귓불이 늘어지는 등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의 특상관이 나타난다. 서서히 대승불교적 요소가 인도불교에 들어가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의 형식도 정해져 양식적 특성이 형성되어 진다. 이러한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가 일대 부흥을 맞게 되는데 소위 대승불교의 완성이다.
인도불교가 회청색편암(간다라)와 적색사암(마투라)인 石像을 중심으로 불상을 조상했다면 중국은 사암과 대리석의 석상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고 또한 주물기술의 발달이 금동불,보살을 양산하게 되었다. 초기 중국의 불교는 인도에서의 직접 전파라기 보다는 미란, 호탄쿠차, 투르판등의 서역불교가 중국에 전해 졌다고 하는 주장이 강하다. 아무튼 중국의 불교는 인도와 서역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이들 나라의 僧尼에 의해 역경사업에 주력한다.


이후 중국의 불교는 남북조시대에 남조보다는 북조에 의해 발전하고 전파되었는데 특히 북조는 5호 16국이라 하여 다섯 오랑캐족 (흉노, 선비, 갈, 저, 강)이 16국을 세웠다하여 오호십육국이라 부르고 있다. 이들 북조의 나라들은 국왕의 보호와 고승의 배출로 찬란한 발전을 하지만 주된 관심은 고승들의 종교적 영험에 의존한다.
이로서 역경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데 그 대표적 인물이 “구마라집”이다. 중국불교사에 있어 당나라의 현장과 더불어 二大譯聖이라고도 불리우는 구마라집은 그 후손이 끊길까봐 후진국의 왕은 자손까지 보게 했다니 그 명성을 익히 알만 하다.  구마라집은 413년 70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그림4: 하바드대학내 포그미술관, 하북성 선정인 좌상으로 간다라의 영향을 직접 받은 초기 불상, 높이 32.9cm]

그의 번역경전은 74부 384권에 이르는데 중요한 것만 추리자면 <반야경> <묘법연화경> <유마경> <<법화경> <아미타경> <수능엄경> <유교경> <중론> <성실론>등이다. 이로 인해 삼론종, 성실종이 대승불교로서 중국에 흥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의 문하생은 무려 삼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남북조 초기의 불교는 구마라집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편 남조인 동진의 불교도 북조처럼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왕과 귀족에 의해 성황을 이뤘는데 사원만 하더라도 1700여개가 넘었다고 하니 과히 상상이 된다.
특히 양나라 무제는 불교에 귀의를 하고 독실한 신자가 됨은 물론이고 교리연구에도 정통하였다. 3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기 까지 입축구법승은 중국사서에 남긴 기록에만 169명에 이른다. 그들의 기행문은 당시 기록을 아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법현전>, <낙양가람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이들이 오간 길은 지금도 <실크로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아시스 로 라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서역북로와 남로로 대별된다.
한서 서역전에는, 『 옥문관 , 양관으로부터 서역으로 가는 길은 두군데 있다. 하나는 선선에서 남산의 북변을 지나고 ,남도는 총령을 넘어면 대월지국에 이른다.』

그럼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인도에 구법을 가는 목적을 알아보면 ①대덕을 만나 불교의 의문을 질의하고 ②불경을 구하고 ③성지를 직접 순례하기 위함이다. 실상은 그가 오가며 만난 사람과 길, 각국의 법,풍속등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고 空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며 정법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17년 동안 답파한 나라가 110개국이었고 그의 번역 경전이 1340권에 달하는 것을 보면 그의 깨달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림5: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수대 보살 입상]
당시 불교가 어느 정도 절실한 것이었는지는 중국, 한국, 일본의 구법승의 유학을 보면 알 수 있다. 구법승은 주로 사절단(견당선)의 배를 이용했는데 신라 진평왕 22년(600)에 원광법사는 조빙사를 따라 신라로 귀국했고 지명과 자장율사 역시 입조사를 따라 귀국한 바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官人, 유학생, 구법승이 견당선에 편승해 羅唐간을 왕래했고 이들이 올 때는 불경, 예서집, 사서, 의학서와 曆書, 문집과 문장을 수집해 가져 왔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도 유학을 하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텐데 당시는 말할 것도 없이 고행의 연속이다. 다른 법률, 민족, 가치관, 언어등을 넘어서 종교적 가치로서 인도로부터 불상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전도승에 의한 교리의 전파 , 구법승과 역경사업은 한 시대의 역사를 보여준다. 불교의 교리의 발달에 따라 불상의 형식과 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데 앞서 도난 사건이 일어 난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도 교리의 발전에 따라 구체화된 불보살일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림6: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수대 관음보살]
한갖 작은 금동 불보살 하나가 삼국시대의 사회생활과 종교적 활동을 나타낼 수 있는 사실은 타임갭슐속에 들어 있는 퀴즈게임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부단히 퀴즈같은 문화에서 역사적 진실과 문화의 속성을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중국사서중 진서에는 3세기경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소수림 왕 때 전진 왕 부견이 사신과 僧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냈고, 백제에는 침류왕때 동진의 마라난타를 통해 불상과 불경이 전해졌다 한다.
北史 , <백제전>에는 “寺塔甚多”(절과 탑이 심히 많다)라는 말이 있는데 현재 십여 사찰이 백마강변을 따라 주초만이 덩그러니 옛 역사를 말하고 있고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에 미륵사지석탑만이 옛 불교의 번성함을 대변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백제 성왕 때 겸익은 인도에 구법승으로 가서 율부72권을 번역하였고 금동불상등을 일본에 보낸 바 있다. 백제 위덕왕때도 율사와 불공, 사장을 일본에 파견할 정도로 백제의 불교는 성했다.   일찍이 인도의 용수는 중관과 십이문론을 ,백론은 제파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유(有)도 무(無)도 아닌 것이 동시에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한 것 , 이것이 空이며 中道다』 이러한 중관론 삼론이 구마라집에 의해 재차 번역되자 삼론과 성실종이 백제에 수용되어  전파되게 된다. 양무제 천감연간(502~519)에 중국에 건너가 30여 년간 불교를 수학한 백제 승 발정이란 사람이 있다. 그가 백제에 귀국한 때가 537년으로 추정되는 데 그가 귀국도중에 관음의 영험설화가 있다. 백제에는 화엄학보다는 법화경과 열반경이 더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이는 불교수용의 과정이 백제는 다른 곳과 다르기 때문일 것 이다.
백제에는 법왕 1년 살생을 금하는 법령을 내리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거둬 방생시킨 예에서 백제불교의 계율주의적 성격을 살필 수 있다. 백제는 성왕때 아미타불상을 일본에 보냈다고 하니 백제에는 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이 함께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침류왕 원년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란 僧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마라난타를 진나라(동진)에서 온 인도 승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의 불교 중 유일하게 백제는 인도 승으로부터 직접 인도적 불교의 수입을 했다는 것이다.
민희식 한양대 교수는 이 마라난타가 실존인물인지를 찾는 작업을 해 왔는데 현대불교 신문에 난 내용을 보면 “간다라에서 영광까지”란 그의 논문에 마라난타는 파리 국립도서관과 대영박물관의 자료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백제의 영광 법성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
법성포의 원래 이름은 아무포라 했다는 것이다. (아미타신앙이 전해 졌다는 방증이라 함) 이 고문헌에는 마라난타가 30세에 초타라흐르를 떠나 실크로드를 따라 탁실라와 폐샤와르를 거쳐 14년 간 우전국, 돈황, 동진, 장안, 낙양 등지에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빈약한 백제의 불교자료에 인도 승으로 부터의 불교 직수입은 향후 백제불교의 방향을 짐작케 한다. 백제에서의 미륵신앙은 무왕대의 미륵사지의 청건연기설화에서 익히 알고 있다.

[그림7: 국립중앙박물관 국보83호 미륵반가사유상>
용화산 사자사로 가다가 연못 속에서 출현하는 미륵삼존을 보고는 그곳에다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설화가 사실인 듯 익산  미륵사지에는 세 개의 탑(현재는 서탑만 남음)이 놓여 있었고 삼원식 가람을 형성하였다. 백제에는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용화세계를 이 땅에 현현케 하고자 했다는 것을 본다면 미륵불국토사상이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전에 있는 내용을 현실화하였더라도 당시의 주도적인 사상의 흐름이 없이는 이같이 엄청난 役事는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미륵불국토사상이 백제의 상층부에 존재했을 것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한편 백제의 관음신앙은 성왕이 관음상을 왜국에 보냈다는 기록이나 호류지(법륭사)의 백제관음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청관음경을 통해 나타난 백제의 관음신앙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앞서의 발정스님의 예 와 선광사연기 에서 알 수 있다. 일본에 전한 경전 중에는 법화경이 유일하게 명시되어 있는데 법화경에는 보문품 즉 관음경이 포함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大火도 태우지 못하고 大水에도 표류하지 않으며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민중신앙을 유도하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에는 미륵신앙과 법화경에 所衣경전을 둔 관음신앙이 유행했을 것은 당연한 일 일 것이다.


그럼 다시 돌아가 <공주의당금동관음보살입상>을 살펴보자, 삼면보관에 그 가운데 면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게 해준다.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정병을 가지고 있고 우측 손에는 꽃을 가지고 있다. 정병은 미륵불(보살)이나 관음보살인 경우에 있을 수 있으나 우측 손의 연꽃으로 관음보살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림8: 일본 법륭사-백제관음> 
앞가슴의 영락은  세련되면서도 선명하게 표현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연스런 느낌이 훼손되지 않았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백제불상의 특징은 이 불상에 있어 입을 다물고 있다. 웃는 모습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백제인의 얼굴이 불에 투영되었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한정된 자료로 북조와 남조를 구별하는 것은 무리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불상을 보면서 불상의 양식적 해석뿐 아니라 불교적 교리를 이해하고 시대적 상황을 보아야 한다.
이는 불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당시의 사회, 경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공주의당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백제에서 만들어 지기까지는 양식사의 측면에서도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미륵불국토를 건설하려는 백제 무왕과 실크로드를 따라 신앙의 힘을 보여준 수많은 전도승들, 구법을 위해 생을 바친 사람들에 의해 미륵신앙과 관음신앙이 유행하고 관음의 명호가 일천사백여 년 전에 세인들에 의해 불려진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많지 않은 삼국시대 불상 속에 백제인의 관음신앙을 이 불상을 통해 볼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람을 찾는 문화>가 될 수 있기에 <공주의당금동관음보살입상>은 도난된 국보라는 가치 외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신라인 혜초를 통해 구법의 길이 얼마나 힘든 고행의 길임을 알게하는 시가 있다. 혜초는 함께 있던 중국 僧이 천축땅에서 생을 마치자 그의 애도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고향에선 외로운 등불 주인없이 번득일 제
타국에선 옥기둥이 속절없이 꺽였구나
신령은 어디로 가다말고 옥모는 이미 재가 되었어라
하염없는 추억으로 나는 애를 끓노니
그대의 소원이 성취 못된 한이여라
뉘라서 알것인가 고국으로 가는 길에
돌아가는 흰구름만 멍하니 보는 나를






23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해체보수작업에 대한 소회 [1]   2010/11/15 4779 818
22   2편: 대자동 ‘왕자의 계곡’(Prince's Valley)에 위치한 경안군   2010/02/15 4177 689
21   1편:[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366년만의 해후   2010/02/15 3883 739
20   大慈庵(寺)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 연구 [1]   2008/10/22 8420 812
19   북관대첩비를 통해 본 해외문화재의 현주소   2005/05/24 6694 936
18   광화문은 정녕 문화재가 아닌 것 인가!   2005/03/23 6393 854
17   을유년 새해, 冬天에 비는 소망   2005/01/01 5425 920
16   세계속에 우리 문화가 차지하는 위치! (청탁원고)   2004/10/22 5996 853
15   고구려여, 그 너른 만주벌판보다도 너의 기상을 잃어 버렸구나!   2004/08/11 6363 853
14   일제하 박물관 성립과 그 배경   2004/06/30 8508 850
13   네가 정녕 독도를 아느냐 [4]   2004/02/25 6291 840
12   [지난글]KBS 일요스페셜 "황남대총의 비밀을 보고   2004/02/06 6512 932
11   Dear U.S.A Authorities   2004/02/01 12378 923
10   피안의 땅 , 도피안사를 가다   2004/02/01 5687 873
9   병자호란을 통해 본 남한산성의 재평가   2004/02/01 7148 875
8   서울의 성곽, 그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1]   2004/02/01 6163 816
7   "朝鮮國王城之圖"발견과 그 진위에 대한 小考   2004/02/01 7575 905
6   새해 아침(元旦)에 거는 믿음   2004/02/01 5274 899
5   신미양요 때의 전리품   2004/02/01 5162 850
  공주박물관 국보 도난 사건을 통해 본 불상의 의미   2004/02/01 6752 858

1 [2]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zero
 
 
 
Copyright(c) 2004 cha@sochang.net All Rights Reserved./ 010-7234-9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