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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8-11 19:38:43, Hit : 6362, Vote :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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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여, 그 너른 만주벌판보다도 너의 기상을 잃어 버렸구나!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서에 고구려사연구니 간도니 하는 것이 한가로운 일일지 모르나 거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실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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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여,   그 너른 만주벌판보다도 너의 기상을 잃어 버렸구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따른 고구려사 왜곡 비판-
                                                                                                                          
         小窓아사달 차문성 cha@sochang.net sochang@chol.com   

Ⅰ  동북공정과 역사왜곡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서에 고구려사연구니 간도니 하는 것이 한가로운 일일지 모르나 거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실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사회에는 원로가 없고 집안에는 가장이 없은 지 오래다.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은 가정과 국가관이 사회에  투영되어 전통적 사회관으로 변화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중국의 동북공정... 동북공정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인문과학을 먼저 논해야   한다.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서 써먹을 데가 없다. 전공을 살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지만 기회라 해봤자 해외유학파에 형편없이 밀리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결국 인문학과 과학을 죽이고 부동산, 증권에 의해 젊은이를 현혹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인가. 역사 왜곡을 논하기 전에 대한민국의 젊은이여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림1  광개토대왕 호태왕비]
그리하여   “통일된 조국아래 강성대국을 만들자”(북한 김용순 비서의 한라산 등정 인터뷰 내용은 감명적이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이 교과서가 개편될 때마다  끊이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중국과의 공조 하에서도 멈춰지지 않는다. 이번 동북공정은 그 허를 찔렀다. 사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중국을 역사적 동반자로 의심치 않았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고대사와 한국의 강제병탄에 한정된 부분적 왜곡이며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나 일본에서도  비판적인 것인 반면 이번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은 대한민국의 실체인 고구려를 통째로 먹으려 한다는데 있다. 물론 여기에는 통일한국의  국경선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의 유적이 만주벌판에 수도 없이 펼쳐져 있고 심양에 까지 고구려성이 있으니 大中華를 염두에   둔 중국정부로서는 암초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이런 점에서 高句麗史를 중국화 시켜 미래에 발생할 문제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행간에는 간도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간도는 고구려사보다도 조선과 관계가 있는 실제 영유권 분쟁의 소지가 크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만주철도부설권을 받는 대신 조선의 간도영유권을 넘겨준 만큼 원인무효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간도는 머나먼 고구려사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疆土임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은 선공을 시작했다. 그것이 동북공정의 실체다. 아무튼 이번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공동체 탄생은 이제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가 하나의 공동체로 탄생하는데 힘을 쏟는 동안 한국, 일본,
  중국의 동아시아는 고립주의적이고 극우적 사고로 회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일부로 왜곡한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며 상황이 악화되면 중국대사까지도 소환할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초강수를 뚠 것이다. 더욱이 국회에서는 일본이 불법으로 넘겨준 “간도  이양권”에 대해 원인무효화를 선언할 조짐이다.
갑작스런 한국의 초강수로 중국은 한발 물러서고 있다. 동북공정은 순수하게 학문적 입장에서  연구된 것이고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사실을 밝혀 나갈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순수한 학문적 입장과는 다르며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사실이 근래에 밝혀져 왔다. 여기에는  2004년 중국 소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열린 북한소재 “고구려 고분군”과 중국소재 “고구려 무덤, 귀족과 왕족의 무덤”이 근원적인 시발점이라 여겨진다. 당초 중국은 북한소재 고구려고분군의 세계유산등재에 거부감을 나타내었으며 고구려는 자국의 소수민족의 역사라고  치부하였다. 세계유산위원회의 판단은 두개를 모두 인정하는 것으로 판정이 났지만 무엇보다 중국의 12억 인구가 高句麗史를 자국의 소수 민족역사  라고 믿는데 문제가 있다. 왜곡을 사실로 믿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까. 소수민족이 아니라 고구려 , 백제, 신라는 이민족의 역사다.
  지금 중국에 있는 조선족은 고구려 이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조선말 때 간도개발로 함경도와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고 일제의 강제병함으로  각자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건너간 독립군의 후손들이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조선이 갈라진 현실이 현재의 조선족의 실상이다.   그들이 현재는 소수민족이라 불리지만 역사적으로는 이들은 이민족인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당당히 건재하고 있다. 소수민족이라 치부하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내세워 고구려사와 간도영유권을 입막음하여 현재의 국경선을 고착화하려는 장기적 포석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때 우리는 실리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즉 국가와 민족을 구분한 현실적 국가주의를 인정하여 고구려가 중국에 부분적 흡수를
  인정하고 현재의 두만강, 압록강 경계를 수용하는 것이다. 중국에 막대한 투자와 교역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은 이미 이점을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본격적인 역사전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구려역사 라는 명분뿐 아니라 間島라는 영토권이 걸려 있다.
  통일 한국은 분명히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자칫 영토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국의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북한의 핵문제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절대적인 우방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모두와 친하기 위해 친한 친구와의 절교를 선언한  것과 같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제 조상 잃은 위대한 대한의 사람아... 조선 500년간 과거에 집착하고 죽은 자를 위한 정치의  결과가 망국이었다.
이제 노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깨어 있을지어다.
과거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역사,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를
  위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지어다.

Ⅱ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 연구중심의 국가 중점 프로젝트가  동북공정이다. “현재 중국영내의 있는 민족과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관점”이 동북삼성에도 적용되는 사례다. 동북 3성은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일컽는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40만정도인 반면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 200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림 2  '중국지‘에 소개된 레지의 지도(1735) 붉은 선 안이 조선의 영토로 기재되고 아래 초록색 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나타냄]



연변민족문제연구소 유병호씨에 따르면 길림성에 118만1964명(조선족인구의 61.54%), 흑룡강성에 45만 2.398명(조선족인구의   23.56%), 요녕성에 23만 378명(조선족인구의 12%), 내몽고자치구에 2만 2.641명(조선족의 1.8%), 관내지역에 3만 3.216명(조선족인구의   1.7%)이 각각 있다. 동북 3성의 조선족인구가 186만 4.740명으로, 조선족인구의 97.1%를 차지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82만   1.479명으로 가장 많다. 이 연변이 있는 길림성의 동남쪽이 바로 간도이다. 인구가 이쯤에 해당하고 고구려의 유적이 산재한 이곳에 대한  중국정부의 불안감이 적잖이 작용이 되어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현대판 중화주의의 재건이다.
사실 이러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한 연구논문은 오래전부터 나와 90년대 중반에 고구려유적을 중국지방정권의 유적으로 명명하기 시작했다. 관광안내원의 설명으로   기분 상하는 일도 발생하곤 했다. 여태껏 국제적 화해무드 속에서 우리는 중국을 우리의 우방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의 공유”에   있어서는 말이다. 아마 실수로 그렇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북공정”이란 오랜 준비에 따른 결과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현실적으로 간도와 백두산을 비롯한 북방의 영토가 통일 후 한국에서 새로운 분쟁지역이 될 소지를 많이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대한민국의 통일 후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을 취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만 다루는 과거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보다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 주장하는 고구려사의 지방정권화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 단계는 백제와 신라의 지방정권을 주장할 것이고 언젠가는 통일중국의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도 접수해야 그들의  동북공정은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동북공정에 따른 중국이 고구려를 보는 입장은 “중국 동북 역사상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에는 경철화, 마대정, 양보륭, 이대화란 중국의 국수주의적 학자들이 주도적인 기여를 한다. 중국이 다민족국가라는 대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 중 일부라고 생각되며 중국이 오래전 티베트를 강제로 점령 후에 티베트도 중국의 일부라는 역사를 주장했듯이 고구려의   역사도 현실적 지배지역이므로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로 분류하는 것이다.
백산자료원에서 출판된 “고구려는 중국사인가”에서 번역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실체를 소개하고 의견을 제시해본다

1) 고구려는 중국 동북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이다.
고구려 건국이전의 시기의 발굴내용이  주, 진시대의 것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위에 성립된 국가라는 것이다. 1975 ~ 76년 사이 국내성에서   발굴한 시굴조사에 의하면 한대철기, 토기둥 문물들이 출토되었다 한다. 이는 서한의 관리들이 다스린 지역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심양에 있는  고구려성은 고구려가 실제 다스린 땅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는 중국과의 전쟁으로 성장한 한민족  국가인 것을 명시하지 않았다.
현도군과의 전쟁에서 성장을 했으며 낙랑과 현도군은 한의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유물이 고구려가   점령한 시대에도 존재해 왔다. 평양에서도 낙랑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어 있고 그중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구려 고토에는 수많은 고구려 성곽이 있고 적석총이 수만기 존재하는 명백한 고구려의 고토임이 분명하다. 문화란 것은 이동을 하기 마련이다.
  중국 한대의 거울과 돈이 한강이남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사군의 설치후 고조선 멸망 후 빼앗긴 땅을 찾아 온 것 이다.
물론  중국은 고구려사만을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의 관리며 따라서 이들이 세운 조선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기자 東來說은 이견이 많고 위만 역시 중국인이라는 것은 자료가 빈약한 만큼 고대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위만이 중국의
  外臣이라 기록된 것은 책봉-조공시대가 시작된 삼국시대와는 개념이 다른 것이다. 古민족이 현재의 국가기준에 맞춰 자기의 영내에 있다고 중국의  역사라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중국의 이민족으로 중국과 대결한 흉노, 숙신, 선비, 말갈, 조선을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이라 주장하는
  것은 직필에 의한 사고가 아니다.
첫째 이들은 중국과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한 민족이며 강토를 영유하고 있었다. 중국과 예맥계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음은 학계의 통설이다. 국가의 고대신화 역시 중국과는 판이한 곰과 호랑이를 신화화한 토템적이다.
둘째 문화유물에서 판이한  차이를 보인다. 한반도에 4만기 이상의 고인돌과 만주에도 산재한 고인돌 유적군이 선사시대에 펼쳐져 있다. 중국에는 이 같은 고인돌이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점은 중국과 만주, 한반도에는 전혀 다른 성격과 언어를 가진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더구나 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기 유물이 이 지역에 사용되고 있은 것도 다른 문화의 지역이란 것이 명백하다.

2)조공-책봉관계
 한마디로 조공과 책봉은 부끄러운 사실이다. 아무리 아시아의 외교관례라 하더라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인정받는 다는 것은 자립적이지 못하다. 중국의 연호를 근세 외교문서에 써 넣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국가의 통치, 외교의 자율성과는 관계가 없음은 분명하다. 조공제도는 아시아 제국의 일반적인 외교관례로서 그 내용이 광법위 하다. 즉 중화사상, 유교적 기반으로 상하관계 및 대등한 관계의 교류를 말한다. 중국과 이민족 간에는 상하관계가 존재하고 이민족 끼리는 대등한 교린관계를 맺는 것이다. 실제 조선에서는 일본이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이를 탓했다. 중화의 문화를 배우지 못하는 오랑캐라 여기기도 한 사실이 이 내용을 방증한다. 이는 당시의 세계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에 기인하며 밖으로는 외침을 막고 안 으로는 체제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천하와 사방으로 구분하여 천하는 한족이 거주하고 그 주변인 사방에는 이민족이 거주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의 논문에만 자주성과 독립성을 논했지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연구가 없었던 것 같다. 즉 책봉-봉작-조공 등의 용어는 스스로 천자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심화되었는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떳떳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 사방으로 분류하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속방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원해서 였지 누구의 강권에 의해서가 아니다. 다만 정묘년과 병자년 호란의 치욕을 빼면 그다지 부끄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삼학사의 죽음에서 우리는 속방의 체제를 강하게 부정했음을 알수 있다. 삼학사의 죽음은 이런 점에서 헛되지 않았다.

 고대의 중국은 지금의 중국과는 판이하다. 그들의 나라는 개개의 이민족보다는 크고 강하지만 오히려 이민족 전체와 중국은 대등한 크기다. 그들의   중화권내에도 이민족이 상당수 거주했지만 유교가 뿌리를 내리는 한대에 이르러 중화권내에는 이민족이 서서히 동화되고 천하와 사방으로 양분하는  세계의 형상이 된다. 조공은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자와 제후간의 교역을 말한다. 그러나 이민족 간에는 이러한 예에 기초를 한 조공은
  준용될 뿐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의 예론에 기초하면서 이러한 사대에 따른 조공에 충실했을 뿐이다. 고구려를 예를 들면 실제적으로   북위와 조공관계를 지속했지만 모든 예에서 대등한 관계였다. 다만 형식적으로 조공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북위는 선비족으로
  중국민족에 의한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생각하는 사대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낙양의 불교 석굴문화도 북위의  왕족들에 의해 건설된 국가적 사업이다.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원나라가 중국의 정권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실상은 몽골이 있고 징키스칸의   무덤이 있는데도 말이다. 중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한 적이 많은 나라다. 한대에 흉노에 수모를 당한 이래 북위와 쿠빌라이의 원   그리고 누루하치의 청나라에 의해 지배를 오랫동안 당하지 않았나. 조공과 책봉이 한 개의 국가를 구분 짓는 바로미터라면 지금의 베트남, 버마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 . 더불어 백제와 신라, 조선마저도 중국사의 일부인가 반문하고 싶다.

3) 수와 당과의 전쟁은 내분인가.
중국의 학자들은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 같다. 수와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아무리 중국정사를 훓어봐도 내분이란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북위와의 대등한 조공관계가 강압적인 상하관계를 요구하는 수와의 대립에서 사사건건 중국과 대립하는 大고구려제국은 이를 결단코 거부한다. 당나라의  사신을 토굴에 가두기도 하는 강한 전쟁불사의 의지를 보이게 된다. 당태종은 “요동은 옛 중국 땅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곳은 중국의  점령지에 불과했고 고구려는 실지를 회복한 것이다. 더구나 요동은 중국 땅이다라는 말은 고구려가 자신들과 대등한 국가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수나라의 문제와 양제는 중국 통일에 소요된 인원의 두 배가 넘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대고구려국과 전쟁을 불사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수나라는 고구려 공략에 실패해 망하고 당 태종은 고구려 공격에 실패해 죽음을 맞고 고종에 이르러야 신라와 야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친다.
  고구려는 당에 의해 망한 것도 신라에 의해 망한 것도 아닌 스스로 망한 것이다. 한대에서부터 당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왕조의 교체가 있지만
  고구려는 건재했다. 삼국사기와 동국병감등에도 고구려의 최후는 잘 묘사되어 있다. “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삼국사지 권22 고구려 본기 10)

4)고구려의 멸망후의 유민 처리
상명대 신형식 교수는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 당시 인구는 69만 7000호였는 데 중국에서 계산하는 고구려인 70만명은 호당 1인으로 계산을 한 오류에서   나온 수치라 본다.
호당 4인 이하로 계산해도 280만명이 된다. 이중 당과의 전쟁에서 12만명의 희생과 당나라로 잡혀간 고구려인이 42만명,   포로가 된 8만5천명, 신라귀순자 8만명 정도를 빼면 200만명이 남게 된다. 고구려 멸망 후 북방민족이 상당수 이탈했는데 이들의 수는   70만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130 만명은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신라와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본다. 이렇다면 고구려   유민의 대부분이 중국에 흡수되었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결과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림3   토문강과 송화강 정계비의 위치]



5)두개의 고려는 별개의 왕조이다.
  토문강과 송화강 정계비의 위치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의 왕조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고구려는 고려로 불리었다) 즉 고구려는
  고씨의 고려고 고려는 왕씨의 고려며 그 시대적 차이도 200년이 지난 후에 고려가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의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도   고려왕 왕씨의 조상은 고구려의 대족이었다는 글이 있고 송악에는 고구려 후손이 많았다는 설로 볼 때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고구려의 유민의 상당수가 고려에 지속적으로 흡수 되었고 고려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Ⅲ 만주와 간도의 벌판은 영영 사라진 것일까.

고구려의 고토를 우리 땅이라 주장하기에는 염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세계지도를
  다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와 중국의 마지막 국경협상에서 간도가 우리 땅이었다면 어떠할까. 다만 일본의 불법적인 조약으로 인해
  그 땅이 상실되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그 조약은 파기되었는데 이제 간도는 누구의 영토인가. 일단 간도의 크기는 적게 잡아도
  4만 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반정도의 크기며 네덜란드와 비슷한 넒이라니 그냥 넘어갈 성질의 것은 아닌란게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만주와   간도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토였고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 역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두려워해 고구려는 칭신하는   제후국이었고 패망 후 중국의 역사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구려는 중국과 일부 조공관계에 있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등함을 기본으로 하는 고구려와의 인식에 대한 차이점이다 중국과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패권싸움에서 고구려국이 진 전쟁이다. 고구려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안하였고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과의 패권싸움에 임했다는 것이 앞 절의 내용이었다. 원명교체기에 고려의   고토 회복노력이 있었고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 다시 느슨해진 국경지역을 김종서등이 육진을 설치해 여진을 다스린다.
  이후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이 중국을 통일해 청이라 했는데 조선은 청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소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신하의 예를
  칭하게 되어 책봉- 조공의 관계는 계속된다. 청은 그들의 발상지라하여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정한다. 애초에 중국과 조선 간에는 명확한
  국경이란게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서로가 침범하지 않는 완충지대가 있었을 뿐이다. 청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에는   17세기 말에는 한인, 여진인, 조선인이 진출하게 된다. 이러한 때 국경획정에 대한 양측 답사가 이뤄지게 된다. 청과 조선의 국경이 모호하여
  청태조는 “새로운 경계는구 경계에 비해 각각 50리씩 넓혀 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조선과 청의 국경이다. 강희제는 1712년   (숙종 38년) 청국대표 목극등 등과 조선대표 박권, 이의복이 백두산 지역을 조사하여 백두산에 지역에 비문을 세우는 데 이것이 “백두산정계비”다.
  탁본을 보면 “東爲土門 西爲鴨綠”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청국은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불러 왔는데 토문강이 도문강임을 주장하고 조선은 토문강은  실제로 존재하는 강으로서 송화강의 지류며 목극등 등과 국경이 정해졌을 때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목책과 석축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렇고
  보면 청에서는 통상적인 관념적인 주장을 하는 반면 조선은 실제 명칭과 석축과 목책등 유구로 주장하여 조선측에 일리가 있다.

1)백두산 정계비
  건립배경 숙종 38년 2월 “청(淸)나라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이 나왔으니, 그 자문에 말하기를, 지난해 8월에 태학사(太學士) 온달(溫達)  등이 아뢰어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금년에 목극등(穆克登) 등이 봉성(鳳城)에서 장백(長白)에 이르러 우리의 변경(邊境)을 답사(踏査)하려   하였으나, 길이 멀고 물이 큼으로 인하여 곧장 그곳에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 명년 봄 얼음이 풀리는 때를 기다려 따로 사관(司官)을 차견(差遣)하여   목극등과 함께 의주(義州)에서 작은 배를 만들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되, 만약 능히 전진(前進)하지 못한다면 곧장 육로(陸路)로 토문강(土門江)으로  가서 우리의 지방을 답사키로 한다. 다만 우리의 변지(邊地)가 도로(道路)가 요원(遼遠)하고 지방이 매우 험준(險峻)하여서, 만일 중로(中路)에   막힘이 있다면, 조선국(朝鮮國)으로 하여금 차츰 조관(照管)케 하여야 하니, 이 정유(情由)를 해부(該部)에서 조선국에 효유(曉諭)하라.”   는 것이 청이 조선에 보낸 첫 문서의 내용이다.
김경문은 조선강토의 영역을 목극등에게 설명하지만 “네가 하는 말이 너의 나라 사적에 실려   있느냐‘라고 반문한다. 너는 너의 나라 경계선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황제께 고할 수 없다” 라 한다. 숙종 때 목극등 과 동행해   백두산을 답사한 김경문의 통문관지와 1901년 함흥의 한학자 김노규가 지은 북여요람 을 비롯 여러 곳에 정계를 위한 답사내용이 나와 있다.
  전부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정계비의 답사와 감계회담은 피를 말리는 어려운 회담이었던 것이다.
『목극등은 사람을 시켜 비석을   만드니 너비2척이고 길이가 3척이라 했다. 그 내용은
大淸 2자는 크게 적고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들고 변방을 시찰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西는 압록강이 경계가 되고 東은 토문강 이 된다. 그러므로 2水 의 분수령에 비석을 세워 기록한다.
康熙 五十二(1712년)   五月 十五日
筆貼式 ...
朝鮮軍官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노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등이 만들고 새겨서 세우다』

라는 82자의   한문이 정면과 측면에 새겨져 있다. 그림 백두산정계비 탁본과 刻字

2)정계비 건립이후
아래 글을 보면 목극등 은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위치는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토문강은 수원의 단류처가 많아 표시 없이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형편에 따라 흙과  돌을 세우고 목책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하여 조선 측 부담으로 8월부터 공사를 시행하게 했다”는 내용을 보면 서로의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 당시 차원이었던 허량, 박도상은 비 아래 25리는 목책과 흙을 쌓았고 물이 나는 곳 5리와 20여리 마른 곳은 산이 높고   경계가 분명하여 쌓지 않았다. [그림4  백두산정계비 탁본과 刻字]

  그 아래는 목책을 쌓았고 정계비 아래 골짜기 즉 토문강원 32~36KM는 목책, 돌각담을 쌓았다.” 이상의 점에서 동으로는 압록, 서로는
  토문이 경계임이 분명하다.

3)감계회담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이 이뤄졌고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진지 6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조약 1조 “독립국”인 권한을 행세하지 못했다. 1882년은 대원군이 청에 잡혀갈 정도로 청의 위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1867년 청국이 만주의 봉금지역을 해제하므로 많은 청국인이 이주를 했는데 조선인들은 간도지역으로 많은 이주가 있었다. 1883년 조선은
  간도땅의 영유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간도지역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받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청은 두만강 이북의 조선인을 1년 이내에 추방한다는  고시가 있게 된다.
이때 간도지역 주민은 조선정부에 탄원을 하게 된다. 종성부사 이정래 에게 두만강과 토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청국인의   무고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임명해 사실여부를 조사하고 조선은 토문강   이남이 조선땅 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것이 1885년 을유년의 감계회담이다. 청은 두만강, 도문강, 토문강이 동일한   강이라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하자고 했고 백두산정계비의 답사는 거절했다. 서두수, 홍단수, 홍토수의 삼강구를 조사한 후 지도초고를 작성해   정본을 완성했다. 계속적인 청의 강압에도 조선 측 토문감계회담 대표 이중하는 그들의 강압에 굴하지 않았다. 조선 역시 국경에 있어서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어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1887년 4월 7일에서 5월 29일까지 정해년에 감계회담이 재개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여기에서 청국은 백두산정계비는 청국의 국경을 시찰한 비이지 국경의 분계를 의미하는 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국 청의 압력에 의해 이중하는   조선에서 발원하는 서두수 홍단수, 홍토수 중 제일 북쪽에 있는 홍토수로 일견 양보하게 된다. 이는 협상의 연기를 위함이었으나 토문강경계설에   대한 주장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실책이었다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볼 때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무산년 홍토수마저 거부당해 서두수,   홍단수로 결말을 지으려하자 이중하는 “내 목은 자를지언정 강토는 한 치도 내 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피력하였다. 이후 양국은 간도에   대해 독자적인 정책을 펴 서로의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4)청일간도협약
청일간도 협약은 1909년 일본의 “동삼성 육안”에 기초하여   협의되었다. 6안으로 다음과 같다. “소위 간도문제이다. 러일전쟁이후 조선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청국과 조선의 두만강을 넘어서려고 시도하여 청국 국경 내에서 교두보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간도문제를 만들어 청국에 교섭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결국 일본은 청국과 간도문제를 다음과 같이 협약한다.

“1조 청일양국은 도문강을 양국국경으로 하며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로써 양국의 경계를 정할 것을 약정한다. 3조 청국정부는 종래와 같이 도문 강북의 개간지에 대해서는 한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인준한다."  [그림5 토문감계사 이중하]
  강압에 의한 청일 간 협약은 근원적으로 무효이다. 이는 카이로선언의 “일본으로 하여금... 만주, 대만, 팽호제도등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도취한 모든 지역을 중국에 반환케 하는 것이 연합국의 목적이다” 즉 이는 청일전쟁 이후 중국과의 모든 강제협약은 무효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간도는 조선에 귀속되어야 한다.
혹자는 헌법을 내세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데 간도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라고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이론도 많이 있지만 실제로 한반도가 어디까지라고 획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우리의 헌법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므로 “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함”을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도는 조선의 영토로 간주할 것이며   이는 차후 중국과의 협의를 남겨두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한다고 그들과 물리적인 제재를 할 수는 없다. 대사를 철수하시키는   강공을 취하더라도 미봉책이 될 뿐이다.

Ⅳ 한국인이여, 조선인이여  담대하라!

그러나 역사는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언젠가는 다시 살아난다. 감계회담에서 굴하지 않은 토문감계사 이중하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강토는 압록과 두만강으로 고착이 되었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먼 훗날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역사를 믿어 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힘을 쏟아야 하고 역사교육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첫째 문학과 문화교육에 힘을 쏟자. 명성황후가 브로드웨이에서 히트를 친 적이 있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일만큼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과 수교후 우리가 잊어 온 안중근의사를 극화시켜 공연을 해 온 사례를 잊어서는 안된다.  

오페라극 “광개토대제”, 천하를 가르는 노도와 같은 고구려군의 모습과 우리 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학계에는 세미나와 심포지움을 통해 중국과 대만등 유력한 중립적 성향의 학자를 지원하고 이들의 연구와 국내의 연구가 장기적인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또한 번역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노력도 그 못지않다.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상황에서 중국은 고구려 알리기에 적극 나설 전망이다. 우리가 북한의 고구려 문화유산 알리기에 주저한다면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소산물이 될 것은 자명하지 않나. 중국과 아시아에 강한 한류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광개토대제, 장수왕 그리고 연개소문, 을지문덕, 이중하, 안중근,이봉창,윤봉길을 내세워 우리의 역사를 방어하자. 이 땅의 영웅을 알리자. 12억이 알고 있는 진실은 사실과도 마찬 가지 일 테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대국의 기상은 이제 중국에는 없는 것일까. 중국인이여 중화로 돌아가려면 고구려를 인정하라. 그것이 중화다움이다. 춘추필법은 중국인들이 역사서를 적을 때 임하는 법식이다. 노나라의 공자가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역사를 비평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한성 史庫의 이름이 춘추관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면 이제라도 중국인이여 춘추필법으로 복귀하라. 비록 춘추필법이 자국의 역사에는 충실하나 이민족에 대해서는 소략함을 가진다지만 직필의 정신만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중화의 영광을 찾는 길이다,

궁색한 변명으로 학문적인 입장만을 견지한다는 것이 공식 인터넷 창구에 고구려의 삭제를 하는 것이며 세계문화유산등재에 소수민족의 문화 운운하는 아집만을 내세울 것인가. 더구나 동북삼성의 고구려 유적에 중국의 문화라는 깃발을 휘날려야 하는 것인가.
중국이여, 춘추직필로 돌아가라. 곡필로 역사의 도적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은 중국의 歷流가 아닐 것이다.

이제 한국인이여 ! 강토의 역사를 존중하자. 숙종은 목극등이 강역의 경계를 정하려 하자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앉아서 잃으면서도 그 잃는 바를 알지 못하니 족히 나라 땅을 줄인 것 만으로 의논할 일이 아니다. 강개(慷慨)하고 한심하고 애석해서 자못 노한 머리털이 장차 관을 뚫을 것 이로다” 그러나 한편 감계회담 때 토문감계사 이중하의 강직한 한마디가 간도를 살려 내었다.
“吾頭可斷國彊不可縮”( 내 머리는 잘라내어도 강토는 줄일 수 없다 )

고구려와 간도는 통일한국의 국경선에 주요 의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처럼 강하고 웅혼한 기상을 가진 문화적인 민족이 되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북한의 김용순 비서가 한라산에 올라 감격에 찬 그 한마디가 뇌리에 스친다.

“통일된 조국아래, 강성대국에 살았으면 좋겠읍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세월 속에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 입니다.


참고문헌) 아방강역고   , 정약용
조선과 명과의 외교관계 연구 , 김성욱
동국병감
한국국경사연구 , 양태진
조선명승기, 1910
국제법상 간도영유권에 관한 연구,   김정호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백산자료원
[그림1-5 ]   han_178354_1[223464],han_178354_1[223468],ph_jian_01등을 빌려옴



*삽입곡)
그 장중한 북한아리랑을 잊을 수 없다...
북한아리랑 합창단 -[그리그솔베이크 에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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