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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조선통신사 옛길 답사의 意義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잡혀간 백성을 쇄환하는 쇄환사로부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막부(幕府)가 막을 내리는 명치(明治)까지 조선시대 260년간을 지속한 중요한 문화 행사였다. 아직까지 한국과 일본은 식민 통치 36년의 앙금이 풀리지 못한 상태이므로, 이 조선통신사는 선린 관계의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이웃나라와 260여 년에 가깝게 평화를 유지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이다. 바로 조선과 일본은 그러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조선통신사의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선인들의 이러한 지혜는 거센 세계화 추세에서도 본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통신사는 저절로 탄생된 것은 아니다. 조선은 전란의 복구를 위한 평화가 필요했고 일본은 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정치적 암투가 시작되어 조선의 통교가 정치적 안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필요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는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통교에 나서게 되었고 조선의 2대 전제조건인 "犯陵人 인도와 國書요청" 이 대마도에 의해 국서개작사건으로 발전되었지만 양국의 묵인하에 1607년 제 1회 조선통신사격인 "회답겸 쇄환사"가 파견되기 이르른다. 조선은 일본정세 파악과 전란시 잡혀간 被擄人(피로인)의 쇄환에 심혈을 기울여 약7500명의 백성을 쇄환하게된다. 1624년까지 3회를 파견하는동안 회답겸 쇄환사는 계속되며 1811년 12회 통신사행까지 200년의 세월을 조선통신사는 평화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11년 마지막이 된 통신사행은 표면적으로는 경비절감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주변정세로 인해 대마도에서 易地通信이 이뤄지게 된다. 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통신사파견에 관한 협상이 이뤄지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1867년 3월 막부의 정권반환(大政奉還)으로 인해 조선통신사의 사행은 더 이상 협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된다.
조선통신사 옛길을 찾는 답사는 이러한 의의를 상기하고 선린이라는 것은 만들어지고 이해하는데 있음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역사의 시작과 결말이라는 양자의 관계보다는 그 과정을 조선통신사라는 사절을 통해 새롭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조선통신사는 정치뿐 아니라 많은 문화의 족적을 남겼다. 바로 그길은 평화와 공존의 길이며, 문화의 실크로드임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朝鮮通信使踏査の意義
朝鮮通信使は壬辰倭亂(豊臣秀吉の朝鮮侵略戰爭「文祿慶長の役」)が終了した後に, 日本に捕えられていった人びとを連れもどす刷還使として始まった. それは德川幕府が幕を下ろす明治まで, 朝鮮時代の260年間にわたって續いた重要な文化行事だった. 現在まで韓國と日本は植民地統治36年間のしこりをほぐすことができずにいる中で, この朝鮮通信使は善隣關係の良い手本となっている. 隣國同士が300年近く平和を保つのはまれなことである. 他ならぬ朝鮮と日本はその平和を維持するために互いの努力を傾けたのだから, 朝鮮通信使の意義は實に大きいといえよう. 先人たちのこうした知慧は, 激しい世界化の趨勢においても見習うに値することといわ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
朝鮮通信使はなにもないところから獨りでに生まれたのではない. 朝鮮は戰亂の復舊のための平和が必要であったし, 日本は戰爭の終了とともに政治的暗鬪が始まり朝鮮との通交が政治的安定に絶對的に必要であっ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相互の必要によって德川幕府は積極的に朝鮮との通交に乘り出すようになり, 朝鮮の2大前提條件である 「犯陵人引き渡しと國書の要請」が對馬藩による國書改作事件に發展したが, 兩國の?認の下に1607年に第1回の朝鮮通信使にあたる「回答兼刷還使」が派遣されるに至る. 朝鮮は日本情勢の把握と戰亂時に捕らえられていった人びとの歸還に心血を注ぎ, 約7500人を歸還させる. 回答兼刷還使は1624年まで3回繼續され, 朝鮮通信使は1811年の第12回派遣まで200年の歲月を平和の使節として日本を訪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しかし最後となった1811年の通信使派遣は, 表面的には經費節減という理由があったが, 周邊情勢によって對馬島での易地聘禮となる. これ以後も引き續き通信使派遣に關する協議がなされるが實現に至らず, 1867年3月の幕府の大政奉還によって朝鮮通信使の派遣は協議の對象とならなくなる.
今回の朝鮮通信使踏査が, こうした意義を想起し, 善隣というものは生み出されもするし理解するところにある, ということを思い起こす時間になったならばと考える. 歷史の始まりと結末という兩者の關係よりも, その過程を朝鮮通信使という使節を通じて改めて理解する時間になることを望む. 朝鮮通信使は政治だけでなく, たくさんの文化の足跡を殘した. 他ならぬその道は平和と共存の道程であり, 文化のシルクロ-ドであることに氣づくきっかけになるであろうと確信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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