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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01 11:49:09, Hit : 7574, Vote :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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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國王城之圖"발견과 그 진위에 대한 小考

                  ■ "朝鮮國王城之圖"발견과 그 진위에 대한 小考 ■
                                                                                                          小窓 차문성

얼마전 주간동아에서《조선국왕성지도》라는 궁궐도를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 오사카 남쪽지방인 와카야마(和歌山) 시립박물관에서 찾아냈다는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임진란때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 "경복궁을 그린 궁궐도"가 흔치 않은 상태에서 이같은 보도를 접해 감탄과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림1: 우측의 그림은 얼마전 발견된 "조선국왕성지도"임>>

주간동아에 의하면 『왕성지도는 목판에 채색이 되어 있으며 그림의 크기는 35.50*70.20㎝며 "其壹"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련의 그림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다.
『더불어 어람용 혹은 외교용으로 추정하면서 몇가지 가정을 하는데 ㉮ 1400년경 倭使가 한성 방문시 가져갔을 경우 ㉯ 임진왜란때 탈취 가능성 ㉰ 조선통신사의 예물중 하나로 일본에 전해진 것 ㉱ 대마도에서 구해 일본막부에 전한 것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

(참고로 경복궁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을 완공한 태조는 그 해 10월에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이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해 [詩經]大雅篇에서 "君子萬年介景福" 에서 이름을 지었다 한다)<<좌측 그림2: 일제때 찍은 경복궁 전면 사진[경복궁여덟마당에서 빌림]>>

그러나 그림의 진위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첫째, 언제 어떻게 이같은 궁궐도가 일본에 전해졌는지 의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1400년경 왜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면 그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이며 어떻게 전해졌을까?

조선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임진란 직후까지 212년간 70여회의 사절이 일본을 다녀 왔지만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통신사의 파견은 7회에 불과하다. 물론 임진란 이후 에도막부와의 교린외교에는 그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 부연한다면 임진란전 아시카가(足利) 막부시절은 그 중앙의 통제력이 강하지 못해 조일(朝日)외교는 조선에서 일본까지의 사행로의 형성자체가 어려웠던 시기다. 즉 일본의 각 번주인 大名과의 별도의 관계가 필요했던 시기이다.

이중 교토까지 入京한 사행은 2, 3, 4회뿐이었고 나머지는 조선과 일본의 사정으로 도중에 중단이 되었다. 통신사 사행단이 교토까지 이르는 險路는 특히 오우치번과 시모노세키에서 효고까지는 해적의 출현으로 위험한 곳이어 西國 호족들에 많은 예물이 필요했기에 궁궐도와 같은 그림이 전달 될 수 있을 개연성은 있지만 당시에도 지도나 궁궐도는 엄히 반출되는 것을 꺼렸던 조선이 공식사행단에 궁궐도를 전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본다.<<우측 그림3: 고야산에 있는 토요토미히데요시 무덤-맨우측>>


한편 조선전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사행단은 "일본국왕사"의 파견만 무려 60회가 넘었으니 이로인한 조선정부의 부담감은 상당했으리라 본다. 세종 5년 (1423) 12월에 조선에 파견된 왜사(倭紗)는 고려 대장경 원판을 얻지 못해 4일간이나 단식투쟁을 한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이때 경판을 못얻은 앙심으로 다음 해인 세종 6년에 일본에 파견된 회례(回禮)사에 경판을 가져 오지 않은 책임을 물어 시모노세키에 사신을 억류한 적도 있다.

이처럼 조선전기는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다고는 하지만 임진란이후의 에도막부에로의 조선통신사처럼 형식과 내용이 체계가 잡히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왜사의 예물중 일부는 중국에서 노략질한 것으로 보인다는 기록과 살인, 폭행, 방화 사건등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양국관계가 교류의 회수에 비해 아슬아슬한 벼랑위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중때인 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세포구에 있는 왜인들이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과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을묘왜변(乙卯倭變)에서 그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다.


이러한 때 '조선왕성지도'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시 일본은 불교중흥을 위해 盡力하던 때였으므로 다른 구청품(求請品)을 마다하고 王城之圖에 매달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 않을까. 또한 이같은 중요한 물품이 전달된다면 당연히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논의가 있어야 하지만 그같은 物目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임진란때 탈취 가능성은 어떠한가.

1592년 4월 15일 부산진 전투 이후 5월 2일에 벌써 한성에 入京한다.
일본군은 한성에서 각군의 지역과 책임을 분담하는데 한성은 약관의 나이인 (19세) 우키타히데이에 (1573~1655: 83세沒) 가 맡게된다. 우키타는 오카야마(岡山)城의 성주(당시는 備前國이라 함)인데 일찍이 9세에 아비를 여의고 전국시대 통일의 공헌으로 풍신수길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해 임진왜란시 조선의 문물을 가장 많이 약탈해 일본의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전달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우키타는 임란후 일본의 패권전쟁인 세도나이카이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에 지게 되어 팔장도(島)라는 곳에 유배되어 83세로 생애를 마치는데 유배기간이 근 50년간 이다. 이로인해 우키타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다고 한다.><<좌측 그림4: 우키타히데이요 오카야마성주>>

만약 임진란때 "조선왕성지도"의 탈취를 했다면 다름아닌 "우키타"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무덤은 이 지도의 발견장소인 오사카 남단의 와카야마시에서 멀지 않은 고야산에 있고 우키타 역시 토요토미의 양자였으니 양자(兩者)의 연결관계를 남긴다.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우키다에게서 받은 서책을 正琳에게 주어 정링은 "養安阮 文庫"를 설치해 그 일부가 구마모토현과 천리대학에 전해지고 있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후 우키다를 유배시키고 그들 일당이 약탈한 조선의 전적(典籍)을 몰수해 교토 伏見학교와 足利학교에 기증한 것이 200종이 넘었다니 책수로는 몇천권은 되리라 추정된다.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직접 소장한 스루가(駿河)文庫本 일부는 장군가에 남기고 나머지는 미토, 기이, 오와리 세가문에 나눠지는데 현재 잔존하고 있는 것은 나고야에 있는 오와리가(家)의 "호사문고"다.

필자(筆者) 역시 나고야의 호사문고에 가서 국조오례의를 마이크로필림으로 본적이 있는데 이곳에는 상당수의 조선전적이 있었다. 특히나 이곳에는 활자본이 많은 데 1453년에 간행한 "고려사절요"는 현존하는 유일의 초간본이며 삼국유사도 가장 오랜 고(古)활자본으로 이곳 호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다.아믛든 임진왜란중에 궁궐도를 탈취했다면 우키다군이 한성주둔시 탈취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떻게 와카야마 시립박물관에 전해졌는지는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해야 겠다.

<<우측 그림 5: 오카야마성-1597년 우키타에 의해 완공되어 2차대전때 공습으로 불에 타 전후 복구한 모습,현재는 자료관으로 사용함>>

앞서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통신사의 예물중 하나로 일본에 전달되었을 가능성과 ㉱대마도에서 구입해 일본으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조선의 금서조치로 보아 희박할 걸로 본다. 더욱이 궁궐도는 몇本 소장되지 않았을 터 인데 이를 구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일본과의 표면적인 관계外 정치, 경제적으로 동반자 관계가 아닌 상황에서 그같은 추측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몇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 앞쪽 문(門)(주간동아에서는 광화문으로 추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중 가운데 있는 사람은 승려이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쓰고 몸에는 홍의가사를 걸치고 양쪽에 있는 사람보다 당당하게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내원당을 다녀오는 승려일 가능성이 있어 불교가 왕실에서 성행하고 있을때라고 추측이 가능하다.(세조, 명종대)

둘째 건물의 주요색인 목조건물은 朱漆이고 기와는 회색 그리고 나무는 녹색, 바닥은 연한황색이 채색의 대강이다. 이것은 주간동아에서 밝혔듯이 조선, 일본, 중국의 동양풍이라고 할만하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종군화가가 그린 경복궁을 방화한 그림과는 그림의 분위기가 달라 어느 국적의 사람이 그렸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특히 방화(放火)시의 그림은 나무의 윤곽을 살렸는데 이 그림에는 나무의 형태만 나타낸 수법이다.

셋째 건물을 약식(略式)으로 그렸으며 측면에서 그린 평행투시법이다.
궁궐도는 크게 정면부감도법"과 "평행투시법"으로 나눌 수 있는 데 정면부감법은 사각형의 경내에 들어 가는 형태이며 즉 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리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측면에서 그리는 그림인데 앞서의 것이 행사를 위주로 한 반차도에 많이 이용된 반면 측면평행투시법은 세밀한 궁궐도를 그리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조선왕성지도" 역시 측면평행투시법이다. 그림에는 제공과 쇠서등 건물의 공포부가 생략되었으며 문신과 무신의 구분도 모호하다.

넷째 궁궐내 건물의 상당수가 지붕의 사면이 모아지는 형태다. 즉 목조탑과 같은 형태로 지붕 중간부에는 절병통이 올라가 있다.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에도 절병형이 보이나 건물의 용도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중층건물과 휘장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고려때 그림이 아닌가 하고 "선화봉사 고려도경"으로검토를 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그러나 분명한것은 이 그림은 16세기 초 이전의 그림이나 그 모사본일 가능성은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성에서 흥천사와 원각사가 16세기초 화재로 사라진 시점이 바로 조선건축이 유교적 조형으로 바뀌는 시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명종대의 숭불도에도 이같은 절병형 구조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명종대 이전일 것이다. 초기 일본의 국왕사는 원각사와 흥천사를 보기를 원했는데 이 두절과 관계는 없을까.

다섯째 , "其壹 朝鮮王城之圖"라는 제목과 채색비단이다. 이는 모사본이 있다는 말일 것이고 왕성이라는 용어보다는 상대적으로 궁궐이나 도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궁궐도의 이름이 "북궐도"나 "동궐도" 혹은 "경복궁도"등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왕성지도"라는 말은 일본인이 그렸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한 예로 일본에 파견된 사행단인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조선의 사행단을 불렀던 말이다. 조선에서는 간지를 붙여 "계미통신사"등으로 이름하였다. 물론 고지도를 보면 조선방역도나 조선전도, 한양도, 도성도등의 이름이 있지만 이는 지도의 구분과 기능성에 기인해 이름지어졌다는 점이 상이하다.<<우측 그림6: 일본 지도며 와카야마시는 혼슈 최남단에 있음-주변에 오사카,나라등이 있음>>


이상의 내용으로 이 "조선왕성지도"는 분명히 조선에서 제작한 그림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과 도화서의 화원이 그리지 않은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앞서 밝혔듯이 그림의 채색이 絹本의 바탕에 왕실에서 그린 것으로는 경박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16c 불교문화가 왕실에 만연하던 명종대의 "명종조궁중숭불도"에서 처럼 중후하고 단아한 맛과 원색을 아껴 쓰던 수법이 이 그림처럼 지나친 원색 위주의 그림으로 전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의 기록화에는 간략화란 있을 수 없다.(삽화를 제외하고) 특히 반차도는 후대에 선례를 남기기 위함인데 생략이란 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왕성지도"에는 당시 조선에 많지 않았을 건물의 형태인 지붕의 위가 모이는 절병형 지붕구조가 지나치게 많다. 조선초기의 건물형태를 보여 주는 것일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것으로는 복원된 불국사의 관음전과 흔히 볼수 있는 팔각정이 그러한 형태다.
"숭불도"에조차 절병형 구조물은 나오지 않으며 고려시대 "관경변상서품도"에도 2층 누각은 나오나 절병형 구조물은 없으며 세조때관음현상기""에도 절병형 구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조선왕성지도"에 있어 정문과 두 번째 문 그리고 연못이 일직선상에 놓인다.
그것도 현재의 단(單)방형 연지과는 두 개 연결시킨 형이다. 조선의 궁궐은 내조 외조 연조라 하여 배치에 일관성을 가진다. 연지 역시 거의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형이며 두 개를 연결 시킬 경우는 아래 위로 연결 시키는 예가 많다.
따라서 일본의 와카야마 시립박물관에 붙어 있는 그림해설인 이씨조선의 수도 한성에 있는 왕궁인 경복궁을 부감한 비단 그림"은 위의 설명처럼 많은 의문을 제기케 한다.

경복궁은 화재로 소실된 후 대원군이 재건할 때까지 버려진 것이 아니라 기우제와 7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연회인 기로연을 경복궁 빈터에서 베풀어 왔고 경복궁 외곽은 군사들을 배치해 보호를 해왔다. (기란 70이상을 말함이고 로는 80이상을 말함인데 정2품 이상은 기로소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더구나 경복궁은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광화문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존속하고 있었고 파괴된 왕성의 외곽은 일부는 복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어람용이나 외교용으로 보기는 힘들며 "일본국왕사"가 조선의 궁궐에 들어와 본 경험을 토대로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나, 일본으로 돌아 간 후 화원을 시켜 그린 것으로 추정이 된다. 세월이 흘러 원본을 다시 모사한 그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도 정부에서 이러한 주문을 했고 일본 역시 조선파견 사행단에 원각사와 흥천사를 구경토록 하고 왕성과 신하들의 복식에 관련한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의 시기가 16c이전 임을 짐작케 한다.

아믛든 이 궁궐도는 수법으로 보아 조선인이 그리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며 그런 연유로 임진왜란때 탈취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와카야마의 인근에 있는 고야산(高野山) 에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의 무덤이 있는 것을 보면 와카야마市와의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궁금증이 더한다.

또한 조선의 불교는 전기에는 일부 왕실 인사가 내원당을 짓게 하고 숭불의식도 가졌지만 이 그림에서 처럼 승려가 궁궐내를 활보할 정도인지는 의문이 간다. 원각사와 흥천사가 화재로 인해 사라진 것이 조선의 건축이 불교에서 유교화 되는 계기임을 상정해  볼때 그림의 시기가 16C초 이전임을 알수 있으며 그림의 수법에 따라 조선화가보다는 일본의 화가가 그렸을 가능성과 그 간략화에 따른 모사본임을 제기해 보았다. 더구나 중층건물중 절병형 구조물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일본국왕사의 화가가 궁궐과 절집 특히 원각사와 흥천사의 건물과 혼동하여 그린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따라서 이 왕성지도에 대한 많은 연구가 뒤따라 역사적인 가치나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역사란 쉽게 그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감춰진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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