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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01 11:52:09, Hit : 7147, Vote : 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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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을 통해 본 남한산성의 재평가

   ■병자호란을 통해 본 남한산성의 재평가■                  

                          小窓 차문성 (아사달)
cha@sochang.net

이번回는 "佛敎의 전래과정"과 "고려 후기 최대의 불교사원인 회암사지"의 발굴을 통해 본 고려 불교의 발달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쓸려던 참인데 소모임 산성연구회인 "산마루"가 남한산성 첫 답사를 앞두고 있고, 美國의 對이라크 침공 관련하여 병자호란이 있었던 인조대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과거의 거울에 비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고자 함이다.
이라크전쟁이 일어난 후 한국정부의 공식적 立場이 미국을 지지했으며 비전투원인 건설공병과 의무부대의 파병을 앞두고 파병여부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렸다.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분없는 전쟁으로 명분론과 실리론으로 대립하던 병자호란과는 상황이 다르다.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선택의 여부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역사상 가장 큰 치욕인 "병자호란"의 전투양상에서 자랑스러운 것과 부끄러운 일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淸의 對조선 침략전쟁의 명분

[그림1:남한산성의 안내도]
이번 이라크 전쟁은 명분없는 침략전쟁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 역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청의 對조선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두 전쟁의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첫째, 명은 후금(후에 청으로 개칭)과 대항하기 위한 再造之恩의 은혜를 내세워 조선의 원병을 요청한다.
두 번째, 후금의 누루하치는 父祖를 죽인 것을 포함한 7大恨을 내세워 명에 선전포고를 한다.
셋째,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넷째, 청의 조선침략은 조선이 청을 업신여겼다는 명분론 이면에 경제적 이익을 위한 배경이 있다. 즉 후금(청)은 수렵과 어로를 주산업으로 생활하는 부족으로 조선과 명과의 교역에 의해 부족한 물품을 보충했지만 명의 원병 요청으로 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에 승리한 후 후금은 조선, 명과의 교역이 단절되어 버렸디. 또한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 있었다.
다섯째, 1차 조선침략전쟁인 정묘호란에 36,000의 기병으로 조선과의 유리한 강화조건(정묘화약)으로 조선의 경제를 고립화시킴은 물론 과다한 세폐로 인해 조선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급격히 저하되었다. 형제맹약을 구실로 조선에 일방적 무역을 강요함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게 하고 병마조련과 城堡 확충 및 성곽 수리등을 중지토록 해 조선은 서서히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었다.
여섯째, 2차 조선침략전쟁(병자호란)에서 청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작전처럼 "충격과 공포"작전으로 압록강 남쪽의 의주성→개성 方向 및 창성진→철원 方向의 2개 루트를 이용해 발빠른 기병으로 한성으로 단숨에 밀고 올라간다. 조선군의 게릴라 전술 및 삼남지역 군사의 이동으로 보급로가 차단될 우려와 배후의 명의 협공을 염려하여 最단기전에 염두에 두었다.
일곱, 한강 봉쇄작전으로 국가의 보장지지(保障之地) 남한산성으로 간 인조와 강화도에 간 세자 및 비빈 일행을 차단하여 군사력 통제를 상실케 한다. 더구나 강화대로, 의주로, 삼남대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다.

[그림2: 남한산성 고지도]
여덟, 전쟁 後期와는 달리 초기에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서도 인조는 전국에 교서를 내려 군사통제권을 잃지 않으며 소현세자와 分朝를 시행한다.(내용: 그대들은 서둘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산성의 위급함을 구하라"  )
아홉, 45일간의 남한산성 전투에서 청의 우익군이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자 장장 53일(시작 지점에 따라 상이)에 걸친 병자호란은 막을 내리고 삼전도 나루터에 수항단(受抗壇)을 마련하고 오랑캐 방식으로 君臣의 예로 삼배구고두의 禮를 취해 조선은 향후 30여년 후인 숙종때까지 무장해제 당한 채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력의 低下만이 아니라 올곧은 정신마저 사대주의에 팽배해져 버렸던 것이다.
열, 잡혀간 10여만의 조선인의 還鄕 비용이 엄청나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환향녀(속어로 되국에서 돌아 왔다고 "화냥년"이 됨)의 귀국으로 사대부의 이혼율이 급증하는 것이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망가진 경제 복구에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실학이라는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학문이 태동한 것은 조선의 또 다른 면이다.

물론 상황의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주화파니 척화파니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시국론의 차이지 그들의 애국심의 高低가 아님은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농성에서 잘 알 수 있다. 주화파 최명길과 삼학사의 애국론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든 기회주의자와 미련한 자는 있기 마련이다. 먼 옛날 백제의 개루왕을 배반한 걸루와 만년의 예에서도 그랬고 절의에 찬 신하를 알아 보지 못하는 미련한 임금에게도 그 책임은 있다. 痛烈한 남한산성은 그들 모두에게 죽음의 땅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정치요, 정치는 현재의 역사라고 했던가! 정녕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보와 퇴보의 갈림길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再評價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바로메타"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림3:평안북도 정방산성]

Ⅱ폭풍 전야
먼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살피기 前 당시 東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조선은 국경인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여진과 명나라애 경계하여 있었고 선조 25년인 임진왜란때 여진은 明의 요동도사를 통해 조선에 파병을 제의한 바도 있었다.
여진의 파병은 명과 조선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건주부의 노아합치(奴兒哈赤) 휘하에 있는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의 병을 언급함으로서  여진의 세력이 명과 조선에 두려운 세력으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여진의 세력은 부분적으로는 강해지고 있었으나 통일된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임진란이 발발한 상태에서도 조선은 북쪽 여진의 염탐을 위해 만포진의 신충일과 하세국을 파견한 사실이 실록과 그의 노정기인 "건주기노정기" 실려 있으며 특히 건주부의 강성함에 경계를 하고 있는 사실이 보인다. 
 [ 그림4: 정묘호란 침입루트]
광해군 10년인 1618년 누루하치는 명에 아버지가 죽은 것을 비롯 七大恨을 내걸고 명나라를 침공함에 따라 명은 급기야 援兵요청을 하여 광해군은 임진란때의 再造之恩이라는 명분론과 현실론을 간파하여 오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평안절도사 김경서를 비롯 휘하에 만명을 심하로 파병했다.

소위 사르후 전투(요령성 무순)에서 고립된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은 후금의 누루하치에 항복하고 "형세를 살펴 처세하라"는 광해군의 중립적 입장을 설명하였디. 이로서 강홍립은 오랑캐에 최초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장군이 된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강홍립을 비롯 일부 장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졸은 조선으로 귀국이 허락되었다.  

뒤이은 인조반정은 조선과 후금의 大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조선과 후금간의 결정적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명의 요동유격인 모문룡이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장기주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명을 치기에 여념이 없었던 후금의 배후에 조선과 명의 모문룡이 있다는 사실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친명배금을 노골화한 인조에게 논공행상에 앙심을 품은 이괄의 난은 급기야 인조를 공주로까지 몽진케 하는 한편 서북지방 군사력의 공동화를 가져왔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한윤등 잔당들이 후금에 투항하므로 인조의 모문룡군에 대한 지원과 배금정책에 대한 사실이 후금에 알려진다. 바로 이것을 도화선으로 시작된 것이 정묘호란이다.

[그림5: 청태조 누루하치]
후금은 1627년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과 이괄의 난때 투항한 한윤을 앞세워 조선정벌을 단행하였다. 6軍으로 나눠진 후금은 의주를 함락한후 오늘날의 1번국도(통일로)인 "의주로"를 이용하여 의주(의주성,백마산성)→용천(용천부,용골산성)→선천→곽산(능한산성)→정주(자성산)→박천→안주(안주성)을 함락 혹은 후방의 역습을 지연시키고 한성을 향해 남하하였다. 계속하여 평양→중화→황주→평산까지 진격한 후 1627년 3월 3일 강화에서 정묘화약을 통해 화의를 성립해 후금군의 철수가 이뤄졌지만 과도한 세폐와 후금 사신에게 명나라와 동등한 예우 갖추도록 요구하고 모문룡군의 잔병이 가도에 남아 있는 것이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었다. 앞서 후금군의 향도역할을 한 조선군은 한윤을 비롯한 이괄의 투항군이 있었지만 節義있는강홍립같은 장수도 있었다. 광해군의 지시로 전투의 向拜를 보고 후금에 항복을 하였지만 광해군이 폐위가 된 마당에 그의 투항으로 비친 항복은 죽음보다 더 깊은 좌절이었다.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은 대륙의 정세를 시시각각 광해군에 통보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지만 인조의 등극후 그는 고립무원이 되었고 후금 누루하치의 자손과 결혼하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정묘호란 강화성립에 기여하고 후금군이 철수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있다 그해 죽었다.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 강홍립(姜弘立)이 병사하였다.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수요되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였다. "적을 이끌었다는 설은 강홍립의 본의가 아닌 것 같다.”』 하여간 그는 왕명에 따라 갈등속에 백기를 들어 휘하의 군사를 보호하고 왕명을 따랐지만 그에게 돌아 온 것은 비난과 배신의 소리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辯을 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후금인 것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 時運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運命論만 늘어 놓을 뿐이다. 그의 묘는 관악구 신림동 난곡 강씨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림6: 임경업 장군]
한편 후금과의 관계 악화가 되어 1636년 4월 태종이 즉위한 후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여 조선의 사신에 황제의 예를 취하라고 했을 때 거부함으로써 淸國과의 大전쟁은 예고되었다. 이는 후금 사신의 明사신과 동등한 접대, 君臣之義, 세폐증액의 압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청의 군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은 있는 성첩(읍성)을 헐고 후미진 산성을 수축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산성이란 것은 장기전의 양상이 있을 때 보급로의 차단과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것이나(삼국시대처럼 고착화된 전선일대 유리) 읍성은 삶의 뿌리가 있는 근원으로 교통로의 중심에 있으므로 기습 공격에 유리한 면이 있다. 청의 주력부대가 대규모 기병이란 것을 판단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 졌을지도 모른다. 진흙탕에 빠진 역사의 짐은 점점 무거워져만 간다.  

Ⅲ 청군의 침입로와 조선의 항전
청은 1636년 청병 78,000 漢兵 20,000 몽고병 30,000의 연합군 約 13만명으로 선봉, 좌, 우익, 본진으로 나눠 조선침략을 나선다.이것이 뱡지호란
이다.

과거 임진란때 일본군이 주로 步兵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기동력을 가졌고 大부대의 이동이 가능한 義州路 선상으로 남진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最단기전에 될 수도 있음이다. 국방부 전사편집위의 팔기군 전력을 살펴보면 오늘날 유일강국이라는 미국의 전력을 보는 것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원래 4기병인 황, 홍, 남, 백의 조직에 양황(홍색테를 두른 황기),  양홍(백색테를 두른 홍기), 양람(홍색테를 두른 남기), 양백(홍색테를 두른 백기)를 추가하여 8旗로 재편성했다. 전투시는 8旗가 8路로 이동하여 중무장부대가 선봉으로 하고 궁시부대가 중간 기병부대는 후방에서 좌우측면을 지원하는 형태의 편제라 한다. 이는 조명연합군을 사르후전투에서 격파해 그 우수성이 입증되었다.
그러한 팔기병을 가지고 조선침략의 선봉은 앞서 조선에 差人(사신)으로 와 홀대를 받은 마부대가 기병 6천기을 이끌고 선봉으로 의주로 진격하였다. 뒤를 이어 청태종의 본군과 좌익군 128,000의 대군이 의주를 향해 이동했다. 청군의 이동경로는 벽동방향(압록강 중류방향)의 우익군과 의주방향(압록강 하류방향)의 선봉군, 본군, 좌익군의 2개의 경로가 있었다. 벽동방향은 압록강 중류를 건너  벽동→창성→삭주→귀성→태천→영변(철옹산성)→안주→평양→중화→황주→신계→토산→철원→연천→금천→개성→문산→통진→강화 로 향한다. (빨강색은 본진과 우익군이 겹치는 곳) 즉 산셩표에 의하면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을 따라 이동하게 된다. 본진에 앞서 선봉장 마부대가 의주(백마산성)→용천(용골산성)→곽산(능한산성)→선천→정주→안주→평양(자모산성)→황주(정방산성)→평산(장수산성)→개성→한성 근처까지 12월 8일에 출발해 12월 14인 6일만에 이르고 본진이 뒤따르자 인조는 장기항전을 결심하게 된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도원수 김자점은 읍성을 일부 헐어 산성을 수축하게 한다. 이는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主路를 비우고 몇십리 떨어진 산성으로 군민을 옯기게 되어 오랑캐에 길을 터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청병의 진격루트를 보면 당시 진관체제(주진 ,거진, 제진의 체계로 일종의 책임방어며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인 체찰사의 통제를 받는 제승방략의 반대 개념임)의 헛점도 노출되지만 가징 큰 단점은 산성중심의 방어가 主교통로와 거리가 멀어 보급로와 군사이동의 차단벽의 효과를 높일 수 없는 데서 기인하였다. 의주에서는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도원수의 지시에 따라 의주성을 비우고 백마산성으로 본진을 이동시킨 후였다.
장기농성을 하다가 적이 틈을 보이면 후방을 치려는 심사였는데 청군은 백마산성을 그냥 지나 안주로 바로 남하를 하였다.

당시의 정황은 조선군이 산성으로 이동함으로 主교통로(의주로)를 청병이 오히려 확보하여 가까스로 12월 12일 황주의 김자점이 평양을 통과했다는 장계를 전달하고 14일에는 『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라고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인조 역시 강화도로 향했지만 이미 淸兵 우익군들은 양화도를 점령하고 지금의 김포공항인근의 개화동을 따라 강화대로를 선점하여 강화도 진입이 어렵게 되어 부득히 청계천- 왕십리길- 광희문(수구문)을 지나  도성을 빠져 나와 송파나루를 거쳐 야간에 남한산성의 南門에 입성하게 된다.  

[그림:강화도 갑곶돈대]
Ⅳ 천하의 險이며 天作之城
남한산성에 삭풍은 몰아쳐,
이로부터 슬픈 역사의 序曲 남한산성에서의 45일간의 농성이 시작된다. 남한산성은 송파구에서 성남을 거쳐 남문으로 들어가는 길과 하남의 춘궁동을 지나 광지원으로 해서 동문으로 들어 가는 길이 있다. 소위 고골지역이며 청군의 주력군의 이동경로며 본진은 한강을 중심으로 진을 쳤던 곳이다. 산성내는 성남에서 산성터널을 지나면 그 숲이 울창해 수목과 나무가 어루러져 외부와 차단된 도심의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남문을 지나 수어장대까지는 적송과 벚나무등 갖은 수목이 어우러져 그 옛날의 치열한 전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입씨름을 하면서 병자호란때의 일을 엊그제 일인양 회자하는 곳도 바로 이 남한산성이다. 이곳에 오면 남한산성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 역사인식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역사가 이해만으로 해결될 문제던가. 바로 사실을 찾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문화유산답사란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현장 확인이란 의미에서 바른 방법일 것이다. 남한산성에서는 누구나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이것이 남한산성이 가지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차를 가져가는 사람은 남문을 지나 남한산성내에 주차장을 이용하면 편리하겠지만 여유롭다면 도보로 주차장을 나와 南門인 지화문(至和門: 정조때 명명) 앞의 비석거리를 지나 우측의 언덕길을 올라 산성의 성첩을 따라 한바퀴 도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지화문(至和門)! 무엇을 의미할까.
"和에 이른다." 이곳 남문이 原型을 유지해 온것도 "和"에서 기인할까. 그래 그것은 "답사일의 話頭"로 던져 놓자. 미군의 이라크 침략, 한반도의 비핵화, 세계의 평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고민을 품는 이들의 "화두"로 던져 두자. 봄이 오는 언덕길은 가파르지 않다. 겨우내 숨죽인 솔향내가 피톤치드를 내품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드문드문 벚꽃이 분홍 색조를 내민다. 눈길은 드문드문 녹아 질퍽거리지만 산성에서 만나는 눈은 도심의 무표정한 것과는 분명 다른 투명한 빛을 가진다. 남문에서 수어장대에 이르는 동안 암문을 지나 몇번의 고갯길을 돌면 30분내에 당당한 이층누각을 만난다.

이곳이 수어장대(守禦將臺)이다. 다섯 개 장대중 유일하게 서장대(서대) 一名 수어장대라고 하는 이곳만 원형이 남아 있다. 원래 오칸 단층누각에서 영조때 세칸 이층 누각을 증축하여 "수어장대"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이층 누마루안에는 영조가 직접 쓴 무망루(蕪忘樓)의 현판이 걸려 있다고 문화유산해설사는 말한다.
마당에 보니 무망루의 현판 글씨를 돌에 새겨 두었다.  "잊지 말자"라는 決意의 누각! 170년 후 水原화성 장대의 원형이 되었을 누각! 무망루(蕪忘樓) !   

[그림: 남한산성 수어장대]
중층인 무망루에 올라보면 북쪽이 훤히 보인다. 지금은 빽빽히 들어선 송림에 막혀 있지만 당시에는 송파나루가 훤히 보였을 것이고 삼전도에서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비를 구경하고 남한산성을 한번 올려다 봤을 정경이 상상된다. 무망루에서 나오면 수어장대 앞에 청량당이 있다.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524년에 축조되어 2년여 진행이 되었는데 그 총책임은 이서가 맡고 동남성은 이회가, 서북성은 벽암대사가 축조를 지휘했는데 동남성은 지세가 험해 기일내 끝내지 못했는데 주색에 탕진한 때문이라는 무고죄로 죽음에 이른다. 후에 山勢 때문에 공사기일이 지연되었음을 알고 이회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청량당을 세웠다 한다. 성벽은 인조에서 정조에 이르기 까지 10여차례 증축, 확장이 이뤄져 인조때 쌓은 성벽의 범위를 원성(原城)이라 부른다. 성벽을 돌면서 삶과 죽음에 이른 이회와 벽암대사의 운명, 10여차례 증축을 통해 축성기법을 공부하는 재미 또한 답사가 가지는 매력이다..

국청사를 지나 서문에 들어가면 연주봉옹성이 나온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모두 다섯 개다. 이곳에서 벽암대사와 이회의 축성수법을 비교할 수 있다니 참 이채롭다. 북장대터를 지나 북문에 이른다. 이름하여 全勝門이라 일컫는다. 300 결사대가 성밖으로 나가 청군의 유인전술로 인해 몰살당한 문이다.
인조가 몽진해 들어온 문인 남문은 和에 이르는 지화문이며, 삼전도로 항복하러 간 문은 서문인 右翼門이다. 이 우익문은 해방후 좌우익으로 갈라져 우익이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수 없었다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북문은 300결사대가 몰살당한 죽음의 문이니 그런 의미에서 전승문이라 일컬었던가.   

[그림 남한산성 북문]
Ⅴ남한산성 전투와 삼전도의 항복 병자호란을 설명한 기록은 여럿이 있다.

그중 官撰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남한지 등이고 私撰이 나만갑의 병자록(병자.남한일기)과 남평조씨의 병자일기 그리고 작자미상의 산성일기가 있다.
나만갑의 병자록은 70년대 서문당에서 국역본이 나온바 있고 남평조씨의 병자일기는 얼마전 국역본이 발행된 것을 신문지상에서 본적이 있다.
[참고 그림:삼전도비-松坡區 三田洞에 세워진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 왼쪽에 몽골문, 오른쪽에 만주문(滿洲文)으로, 그리고 비음(碑陰)에는 한문을 새김]]

私撰인 세 작품은 당시에 보고 들은 바를 적은 것이므로 생생한 기록이지만 일부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중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양향사(糧餉使)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인조대왕의 최측근에 있었으므로 그 신뢰성이 높다. 김자점의 급보를 받은 1636년 12월 12일에서 (병자년) 다음해 1637년 2월 8일(정축년) 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으로 가는 날까지 56일간의 기록이다. 병자록이란 작품은 인쇄가 간행되지 못하고 아쉽게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본과 장서각본이 전해진다. 그 상세한 내용에도 놀라지만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인터넷뿐 아니라 각종 장서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당시에 그러한 기록을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터인데 나만갑 어르신의 노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기는 12월 12일 김자점의 狀啓에서 시작한다.
마부대가 홍제원에 이르자 최명길은 선봉부대의 지연을 위해 친히 적진으로 화의를 위해 찾아 간다. 이 동안 인조는 강화도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이동한다. 강화도길은 이틀길인데 적의 추적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적은 양화도와 지금의 강서구 개화동의 강화대로를 차단한다. 인조의 남한산성으로의 파천으로 여주목사, 이천부사, 파주목사등이 뒤를 따랐지만 경군과 지방군은 1만 2천에 불과 했다.

12월 23일 인조임금은 북문에 올라 독전하여 사대문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조선군은 80명 전사, 청군은 200여급이 베어졌다. 12월 24일 추위에 비까지 내렸다. 12월 29일 도체찰사 김류의 오판으로 삼백명의 병사가 북문에서 순국한다.(실제 답사를 가면 서, 북문은 가파르다. 回軍이 용이치 않음을 알 수 있다) 12월 30일 그믐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햇살이 엷었다. 이날 적군은 광진, 마포, 헌릉(양재천을 지나 성남 방향)의 세길로 행군하기를, 해가 뜨면서 시작해 해가 지고서야 멈추었다. 風勢가 대단하더니 적군이 행군을 멈추니 바람도 잤다, 큰 눈이 내린 지 얼마 안되고 또 날이 차서 아직도 녹지 않고 있었다. 적의 군대가 山野를 뒤덮어서 한 點의 눈도 찾을 수 없으니 그 수가 얼마나 많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적군은 갈수록 많아지고 우리의 원병(援兵)은 이르지 않고 있으니 기세는 날로 위축되어 병사들은 싸울 뜻이 없다.』 전쟁의 형세를 가름하는 기록이다.

두보의 시(詩)처럼 『쑥대밭 된 옛 성엔 구름 걷히지 않고 흰 여우 누런 여우 이리저리 뛰노네. 궁벽한 이 산골에 왜 내가 살고 있나. 일어나 앉은 밤 밀려드는 온갖 시름. 아! 다섯 번째 곡조로 노래 부르니 죽어서라도 고향에만 갔으면』 외로움이 밀려오는 孤城의 삭풍에 한 인물이 병사했으니 "이서"였다. 그는 남한산성의 원성을 축성했고 성내의 군량미 수만석을 비축한 장본인이다.
인조는 그날 식음을 전폐했다 한다 『상이 그를 위해 통곡하였는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인조15조선왕조실록 1월 2일) 1월 15일부터 계속된 청의 공격으로 성내의 피해는 격심했고 남한산성 바깥은 목책으로 둘러 외부와의 연락도 두절되었다. 1월 25일 대공세 후 26일 강화도 함락으로 세자와 비빈이 잡혔다는 것을 인조에게 알렸다. 마침내 정축화약이 성립되었다.

정축화약은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청에 군신관계㈁차후 청국황제의 책봉을 받음㈂명과 단절하고 고명과 금인을 청에 바침㈃세자 및 왕자를 볼모로 보냄㈄가도 공격하여 모문룡군 처단하며 청에 지원 및 성곽수축의 금지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출성하여 삼전도 나루터에 마련된 수항단으로 나갔다.『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남빛군복을 입고 서문으로 출성했다. 청황제는 마전포(삼전도)에 포진하고 남쪽에 단을 세웠다. 임금은 청황제 앞에 【삼배 구고두】를 행했다, ( 3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숙이는 청나라의 禮) 임금은 인도되어 청나라 여러 왕들의 오른쪽에 앉았다. 임금이 출성할때는 온 성안의 사람들이 눈물로 전송했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삼전도 치욕의 생생한 일기장이다.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군량부족과 외부와의 단절이 가져온 결과였다. 三南의 조선 병사들이 속속 남한산성 주변에 모이고 있었고 피끓는 선비들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 각오였는데 망국의 날이 이렇게 빨리 도달함에 원통함은 견딜 수 없었다.


절의(節義)를 위해 죽은 사람들
병자록을 읽으면서 「남한산성의 재평가」란 글을 적으려니 억장이 무너진다. 임진란은 7년간 계속되면서 전력을 계속 보강을 했지만 병자란은 불과 50여일간의 단기전으로 끝나 절의에 찬 선비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림:삼학사를 배향한 현절사] 강화성에서 김상용과 권순장, 김익겸은 화약에 불을 질러 남문에서 순국하고 윤방은 그 란(亂) 속에서도 종묘의 위패를 보관했다.
이날 殉死한 이만도 수십이다. 강화도의 수비를 게을리 한 장수들은 삼전도의 치욕 뒤 모두 사사되었다. 윤집, 오달제, 홍익한 삼학사는 심양에서 죽어 서문에 버려져 쌓인 시체에서 시신을 찾지 못했다 한다.   인조와의 마지막 대화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신들은 떠나갑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세자와 함께 나가신다면 성 안이 무너져 흩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점이 실로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세자를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함께 나가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죽을 곳에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이 죄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는 마땅히 돌보아 주겠다.』

추담(秋(潭) 오달제 선생의 遺詩를 하나 소개 한다.
【난리속 남북으로 부평처럼 흩어졌네, 서로 나눠질 길 누가 알았으랴,   어머님 헤어질 때 두 아들 절했건만 올때는 한아들만 홀로 뜰에 나아가리   옷깃 끊고 나왔으니 삼천지교 저버렸고 옷을 보며 공연히 이 아들 슬퍼지네   관새의 길은 멀고 저녁해 저무는데 이승에서 어느 길로 다시 문안 올리리까   외로운 신하 반듯한 의리 부끄럼 없고 임금 은혜 깊어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승에서 한없이 슬픈 것은 동구에서 기다리실 어머니 정을 저버렸음이로다.】

Ⅶ 상처뿐인 영광
   [그림 좌: 인조 장릉-파주시 갈현리]
[그림 우:여주 효종녕릉-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이며 조선에 북벌을 계획한 왕이 있었음은 자랑스러운 일임]
한강물을 다 부어도 남한산성의 치욕은 씻을 길이 없다고 한다.
병자호란의 분수령이 남한산성이기에 그러하다. 이처럼 남한선성은 치욕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남한산성 행궁터 한켠에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을음을 입은 채 넓은 터를 지키고 있다. 그날의 비통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은 삼전도(원래 송파나루)에 있는 대청황제 공덕비와  이 남한산성 행궁터에 남아있는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다. 이 느티나무는 행궁의 역사와 함께 식재가 되었을 터인데 아직도 그 생명을 지속하다니 실로 생명력에 감탄힐 일이다. 인조의 파천도 백성들의 울부짖음도 , 삼학사의 諫言도 지켜 본 증거목(證據木)이다.  

이런 남한산성은 비극의 현장이다. 진지한 역사의 현장으로 되기 위해서는 관심과 애정이 앞서야 한다. 앞다퉈 세워지는 상가건물과 호텔이 철거되고 남한산성 본래의 제 모습을 찾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니 만들고자 해야한다.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 찾을 것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역시 마음 한켠에 주화파와 척화신의 갈등은 없을까. 파병동의안 문제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문제다. 광해군의 실리와 인조의 명분론으로 반추하자면 구시대적인 생각일까.
국가의 이익과 대의명분이라는  이분론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는 이 글을 적어면서 주화파와 척화신 모두 백성의 안위라는 살리와 국가존망의 대의를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병자란의 비극은 교훈의 순간이다.    나는 십오륙년전에 간 바그다드를 아련히 기억한다. 순박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활, 메소포타미아 문화와 위대한 바빌로니아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생활이 문화며 그들의 마음이 곧 종교인 것이다. 나는 사막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세우고 지는 태양에 절을 하는 한 부족을 보았다. 먼 후세에 이들의 말과 글로 쓰여질 피의 역사에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일본에서 오는 길, 南島에는 동백꽃이 한송이 두송이 떨어 지고 있었다. 꽃 모가지가 통째 떨어진다.
그래서 동백은 순결함과 항거의 상징으로 비치는 것일까. 붉은 피빛의 꽃송이가 떨어진 동백은 더 푸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름없는 돌멩이 하나에도 만백성의 피빛이 묻어 있는 곳, 天作之城 남한산성 45일간의 농성에도 굴하지 않은 남한산성,[그림:무망루-수어장대 중층의 편액] 이곳에 삼학사를 기리는 현절사가 1681년 건립되어 1693년 숙종에 의해 사액서원이 된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현장이 아니라 45일간의 항쟁에서도 견딘 조선인의 정신을 대변하는 곳이라 믿는다. 바로 그 한가운데에 삼학사의 정신이 있음이다. 함석헌 선생은 삼학사를 이렇게 평가하신다.

『이해는 一代의 문제지만 정신은 萬代의 문제다. 자유의 첫 부르짖음은 늘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직 시체 속에서 선언을 한 것이다.』  

수어장대에 올라 풀지 못한 至和의 話頭를 던져 두고 솔향에 취해 한강의 탁류를 바라본다.

창넘어 북한산과 마주앉아...小窓 차문성 씀   cha@sochang.net  socha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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