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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01 11:50:00, Hit : 6162, Vote :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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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성곽, 그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서울의 성곽, 그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                                                                            
                                                       小窓아사달  차문성 cha@sochang.net)

 
 지금 남아 있는 서울의 성문과 성곽을 보면 萬感에 사로 잡히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제에 의해 보존과 철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성의 성문은  동대문(興人之門:흥인지문), 서대문(敦義門:돈의문), 남대문(崇禮門:숭례문), 북대문(肅淸門:숙청문→肅靖門:숙정문)의 四大門과 혜화문, 창의문, 광희문, 소의문 인 四小門으로 되어 있다. [좌측그림 1(한양샘플에서 가져 옴: 한성도성-주변 산들에 나무가 없다]

예전에는 국보1호하면 "남대문(숭례문)"이라 하고  보물1호하면 "동대문(흥인문)"으로 기재된 반면 요즘 서적과 문화재청의 명칭은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문"으로 명칭이 일반명사에서 고유명사화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실록과 기록물을 찾아보니 숭례문이나 흥인문등 고유명사를 조선시대에는 널리 사용했고 또한 일반명사인 동,서,남,북의 방향을 사용한  大門의 명칭도 다수 사용되어 동대문, 남대문 등의 명칭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어 이를 방증한다. 1960년 이후 서울의 도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지만 근래에는 광화문의 재복원과 돈의문까지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 光化門이다.
숭례문처럼 두부를 비스듬이 썰은 것 처럼 옆으로 깍여 있는 모양에 성벽을 이어 體城의 형태를 유지하자는 것과 1915년 철거된 돈의문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현재 環狀形도로인 숭례문에 체성을 잇는 효과의 유무와 없어진 돈의문의 원 위치가 새문안길 한복판이며 변변한 실측도조차 없는 상태에서 복원한다 것이 오히려 문제점을 낳는다는 주장이다.[우측그림 2: 숭례문과 전차길]


이같은 한성 四大門이 철거될 운명은 일제시대때 결정이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거머쥐게 된 일본은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를 설립해 서울의 궁궐과 성문, 성벽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철거할 계획을 세운다. 물론 서울의 파급효과로 지방에서의 성벽 철거도 염두에 둔 것은 물론이다. 서울의 분위기에 편승해 대구읍성은 경북관찰사 서리(통감부 시절 관직명으로 생각됨) 일제때인 박중양에 의해 1906년에 철거되어 버린다.
조선통독부의 <朝鮮>이라는 기관지에 기고한 <조선인 同化와 기념물>이라는 글중,
『鮮人동화를 위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 두가지 예를 들면 山城이란 것이 조선도처에 있고 고명찰, 가람등은 거의 排日이란 역사적 재료를 가지고 있다. 몇 년에 왜적을 격퇴 했다던지 하는 등의 글귀가 便器에 조차 써여wu 있다. 점차적으로 제거하여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결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라는 것은 당시 총독부의 조선 문화관점을 말해 준다.
성곽철거에 관한 일정은 1905년 일본공사 하야시가 남대문주변 성곽철거를 제안했고 1907년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 城堞 훼철이 재가를 받는다.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내각령이 발표되고 남대문의 성첩은 1908년에 남대문만 남긴 채 철거 되기에 이른다. 돈의문(서대문)은 1915년에 완전 철거된다. 
[좌측그림 3:돈의문(서대문)내 전차 통과하는 모습: 다른 문루와는 달리 돈의문은 1층 누각임을 알 수 있다.]

옆의 사진은 서울시 소장 사진인데 돈의문이 철거되기 전 1914년에는 성문 한가운데로 전차가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일제의 전기부설과 시정계획에 따라 성벽 철거 요구에 반대한 당시 위정자(고종황제등)의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즉 성벽을 철거하지 않고 성문 사이로 전차를 통과케한 것은 그 예이다.  
서울대 太田秀春의 논문에 의하면 , 남대문과 동대문이 훼철되지 않고 남은 이유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일본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즉 남대문은 임진왜란시 일본의 제2군 장군 가등청정의 입성이 이뤄진 곳이고 동대문은 소서행장이 입성한 곳이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남대문과 동대문은 보존되고 그같은 사실이 없는 서대문은 철거되기에 이른다.


도시근대화 계획이란 이름으로 한성 파괴는 계속된다.

[우측그림4: 서대문 근처의 모화관,독립문,영은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이전 자리를 물색하던 중 조선의 궁궐 파괴와 상징성을 이유로 지금 복원된 경복궁의 흥례문 자리로 건립을 시도하여 1926년에 완공하자 "광화문" 철거 계획을 세운다.

당시 일본의 잡지 <改造> 에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조선문화에 대한 지고지순의 愛情을 표한 일본 지식인은 다름아닌 "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先生이었다.

일본에서 민예운동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야나기 선생은 언론에  <조선인을 생각한다><조선의 벗에게 보내는 글><사라지려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등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가령 지금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하여 급기야 일본이 조선에 병합됨으로서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저 양식의 일본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흰 벽의 에도성이 헐리는 광경을 상상해 주기를 바란다.(중략). 아아! 나는 지금 망해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행위에 대해 노여움을 느끼리라. 그리고 이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된 침묵속에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좌측그림5: 柳宗悅(야나기무네요시) 사진]
이 글을 통해 일본의 유력일간지와 조선의 동아일보등에 연이어 소개됨으로 조선의 지식인은 물론 일본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자극하여 광범위하게 조선의 예술에 대한 재평가를 하기에 이른다.  
물론 당시 조선인 역시 침묵한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의 설의식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 한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덕택으로 다시 지어지리라 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물건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 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백년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설의식 선생의 글에는 광화문은 五感이 없지만 그것을 만든 조선인은 五感으로 광화문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당시 문화에 대한 애정과 용기있는 행동을 통해 수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문화의식에 충동질을 가한 大事件이다. 이로서 광화문은 건춘문 옆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기에 이른다.


그 이후도 광화문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육이오때 광화문은 폭격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일제때도 생명을 잃지 않은 조선 정궁의 정문이 민족간의 분쟁으로 이같은 변을 당한 것이다.
1968년에 광화문은 복원되고 "광화문"이란 한글 현판이 광화문에 내걸린다. 엄밀히 이야기 한다면 복원이 아니라 복제이다.
복원이란 것은 원형대로 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 구조도 재료도 모두 철골구조에다 시멘트 재료로 모양만 낸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 시절 때는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회복"이란 미명아래 조선총독부(후에 중앙청) 건물이 철거된다. 물론 네거티브문화재에 대한 보존의 소리도 높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어 지금까지 경복궁 복원은 진행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민족정기는 회복되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좌측그림6:영욕의 건물: 조선총독부,중앙청,구국립중앙박물관]

사회의 도덕성과 역사성은 돈과 편법으로 물들어 사회적 가치는 퇴보하였다. 이후 대학입시에서의 국사가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어 상당한 논란거리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시 변화하는 사회분위기를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에서 처럼 positive 와 negative 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역사의식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좀더 신중히 검토해야할 할 사안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의 요구처럼 총독부건물이 철거가 아니라 이전으로 결정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일본인이 조선을 병합하는 당위성에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라는 날조된 역사와 임진왜란때의 침공이 조선정벌을 정당화 시키는 빌미가 된 것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뭏든 문민정부 시절 총독부 건물 철거이후 국민정부에 이르기까지 경복궁 복원공사는 계속 되고 있다.
요즘 신문지상에 서울의 성곽복원에 관한 기사가 종종 나오는데 복원된 경복궁 一廓을 보면서 경계해야 할 마음이 적잖이 일어난다. 경복궁 복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신응수 목수는 "천년이 지나도 견디는 튼튼한 경복궁을 복원하겠다"고 야심찬 결의를 보였지만 오히려 복원기술의 한계를 절감하곤 한다. 몇해 전 흥례문을 건립하면서 수입목 파동이 감사원으로부터 지적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는가.
흥례문의 列柱에 맞는 목재를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어 북미산 미송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목수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재청과 산림청에서는 문화재 복원을 위한 장기적인 목재 확보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식목에서 육림에 이르기 까지 세심한 목표의 부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정책을 보고 천년을 견디는 경복궁을 복원 云云하기에는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트린 것은 아닐까.
[우측 그림7:경복궁 원경]


조선말 대원군 섭정시절 경복궁의 복원은 고종 2년인 1865년에 착수되어 1868년에는 왕이 궁전에 들어 가게 된다.
이같은 것을 가능케했던 것은 조선시대의 금산제도에 있었다. 즉 오늘날의 그린벨트 제도였다.
첫째 장기적인 목재관리가 어렵다면 단기적으로 대체목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북미산이 아닌 접경지역인 압록강이나 두만강 인근 지역에서 비슷한 환경에서의 대체목재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단청과 석재에 있다.     단청의 색상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광물질의 원료인 안료의 확보의 어려움에서 기인할 것이다. 또한 석재의 마름질을 기계톱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효율성과 기술자 확보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경복궁 정전 뒤의 강령전의 넓은 월대는 요즘 대리석 건물과 마친가지로 반듯한 모양을 한다.
薄石을 기본으로 한 바닥처리와 손다듬기로 처리된 돌은 전혀 없다. 즉 전통은 허울뿐 현대적 기술로 경복궁을 복원한 것이다. 문화재청이나 관련단체에서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경복궁 복원이란 大力士를 하는 것은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지도 않으며 무모한 실행이라 밖에 볼수 없다.
셋째, 문화재청에서 수리기술자와 기능사제도를 만든 것이 몇 해를 지났는데 治石, 治木, 전통단청 기술자 확보와 재료의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왠말인가. 시멘트를 발라 놓은 것 같은 治石과 페인트를 칠한 것 같은 단청질 표준화된 열주에서 自然美, 無作爲의 조선 기술은 온데 간데 없고 편의성 위주인 인공적인 作爲적인 기법만이 남았다.
나는 앞서 서울의 사대문과 전주의 풍남문 ,平壤城의 운명이 문화적 측면이 아니라 일본과의 역사적 사건의 관련성으로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말을 언급하였다. 그때 살아남은 소중한 문이 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다.
이 문을 원형으로 하여 복원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날아갈 것 같으면서도 장중함을 잃지 않은 숭례문의 위상과 조선 근대기술의 집약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흥인지문에서 조선의 기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더불어 숭례문의 현판을 종서로 써 대문을 눌러 火氣를 막고 흥인之문의 之"를 첨서하여 횡액을 막고자함도 조선인의 예술에 부가된 "마음"일 것이다.
[좌측그림8: 柳宗悅(야나기무네요시)
요미우리신문 1회 기고글-조선인을 생각한다!]

올 해에는 한성 四대문과 성첩, 광화문의 재복원에 대한 말들이 오갈 것이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5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한다 하지 않았는가. 분명한 것은 원형 복원이 말뿐인 현대식 복제로 끝나지 말고 원형 그대로의 복원을 통해 자연미 가득한 조선의 기술을 예술로 승화하여 남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돈의문 사이로 전차를 달리게 하는 조선인의 思考를 닮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先生의 藝術觀은 예나 지금이나 그 解答을 던져준다.
『그 藝術이 있는 한 그 민족에게 사멸은 없다. 나는 조선의 예술이 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예술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小窓 아사달 차문성(sochang@lycos.co.kr)




credit (2007-01-30 22: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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