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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01 11:53:48, Hit : 5686, Vote :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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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안의 땅 , 도피안사를 가다

           

                         ■피안의 땅 , 도피안사를 가다■                        
            (밀교와 화엄의 결합, 그 원융을 보다)                                                           
                                         아사달 차문성(sochang@chol.com 小窓)


정전 50주년을 맞아 우리얼(uriul.or.kr :문화유산 답사회 우리얼)의 서울경기지역은 철원으로 답사를 갔다. 흐린 날씨만큼이나 한반도의 정세는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시기였다, 국도 1번인 통일로가 있는 파주를 지나 임진강을 끼고 돌면 높다란 언덕 위 율곡 이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간직한 화석정이 보이고 임꺽정의 전설이 담겨있는 한탄강의 구석기 유적지를 지나  철원으로 향하는 길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아름다운 강토와 문화유적을 가지고 있는 답사의 ROAD MAP(도로 지도)이다. 오래전 삼국통일의 길목이었던 이 길이 한탄강의 대륙적 기질과 분단의 상징인 철책, 방어터널에서의 위압감보다는 우리 민족의 浮沈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맨 몸뚱이를 보여 주는 歷史밭이리라.(그림1:: 도피안사)
7월 27일 전등불보다 달빛이 더 밝은 철원에서 도피안사로 향했다. 도피안사는 예전에 여러 차례 간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찾아가기는 처음인 듯싶다.

요즘같이 첨단의 시대라도 철원에서의 길은 첨단과는 거리가 멀다. 전문적인 답사인이라도 올 때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서둘러 내려가려는 곳이 철원답사에 앞서는 기억이다. 하룻밤을 잔다는 것은 이렇게 편안하고 특별한 기억을 선사한다.
칠흙같이 어두운 주차장에서 전등불 밝힌 도피안사는 높다란 회나무와 정겹게 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도선국사가 신도 1500여명과 함께 경문왕5년 (865)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명문에 기록된 것처럼 “피안에 이르는 길”이란 의미의 도피안이란 寺名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곳이다. 불가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한다.
바라밀은 “저 언덕에 이른 상태 ” 혹은 “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到彼岸”이란 이름은 바로 탐욕과 불신이 가득한 “이 언덕”에 대비되는 “저 언덕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는 것 일게다.


도피안사는 비로자나불과 異形의 삼층석탑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이 불상과 탑, 그리고 창건자인 도선국사를 통해 도피안사의 의미를 새로이 찾고자 한다.

나는 먼저 불상의 양식발달의 단계에서 몇 가지 의아함을 제기치 않을 수 없다. 불상의 양식은 인도의 불상의 양식에서 발전해 왔고 한역경전의 눈부신 결과로 중국에서 정착되어 왔다. 초기의 불상은 뚜렷한 인도적 특성을 가진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불교의 정착과 귀족층의 숭배에 따라 종파적 특성이 생기고 明匠이 탄생하여 주도적인 양식을 유도한 것이다.
불상의 형태는 교리중심적으로 변화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가에 의해 양식중심적으로만 파악하고 이를 해석하려는 경향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불상이 양식의 변화만이 아닌 신앙의 흐름, 사상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의미에서 불상의 변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이다. 이는 미술사적인 양식의 해석에서 종교, 교리사적인 해설도 필요하다는 것을 부가하고 싶은 게 이 글의 요점이다.

(그림2::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이곳 도피안사에서는 불상과 탑이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도피안사의 불상은 지권인 양식을 한 비로자나불(비로사나,바이로자나,노사나불이라고도 함) 이다.

지권인이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는 형태를 말한다. 이는 비로자나임을 알리는 수인의 역할을 한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과 법망경에 나오는 여래인데 부처가 정각에 이른 상태를 말함이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여래형 불상이 아닌 보살형 불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정각을 이루는 순간의 모습이 왕자의 상, 즉 보살의 형태에서 얻어진 형상인 듯 싶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보살에서 얻은 경지지만 깨달은 그 순간 이미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여래로 표현하고 있다. 아믛든 이러한 철조 비로자나불은 9세기에 이르러 일대 유행을 하는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보림사의 철조 비로자나불(858),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고려초),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등 철조의 다수와 석조의 비로자나불이 나말여초에 만들어 진다.


그러면 도피안사 불상은 화엄의 본존인 비로자나불일까. 아니면 밀교의 대일여래일까. (용어상 비로자나와  대일여래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선 듯 하기가 힘들다. 왠만한 책에도 이 비로자나불이 화엄본존인지 밀교의 것인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불교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의문을 도선국사와 밀교를 통해 알아보자.
도선국사(825~898)는 조선금석총람에 의하면 신라 구산선문(구산선문이란 것은 여러 가지 논란이 많은 것이나 본고에서 제외)중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선사의 제자라 한다. 혜철선사와 더불어 도의선사, 홍척선사는 중국의 서당지장(735~814)에게서 선법을 전해 받았다고 하는데 귀국년도가 821, 826, 839년인 것을 보면 지장의 직계 제자가 아닌 지장의 문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당나라는 무종이 즉위하여 소위 회창폐불사건을 일으킨다.
회창폐불 사건은 841~846년에 일어나는 데 중국 불교계에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는 엄청난 사건중 하나다. 이로인해 4600여개의 사찰이 폐찰되고 26만여명의 승도가 환속되었으며 수많은 불상과 경전이 불에 타 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로인해 오늘날 불상의 양식적 고찰이 맥을 끊기는 아쉬움도 있다.
따라서 당시 당나라의 귀족과 연계를 해 온 교종의 사찰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지만 이에 반해 선종은 피해를 덜 입게 된다. 무념,무상,무주에 사상을 둔 승도가 피해를 입을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회창폐불사건이 일어난 후 선종의 확산은 바로 이같은 불교계의 자성과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다.

한편 회창폐불사건은 중국 留學僧들의 귀국을 종용했는데 특히 사부첩이 없는 승려들은 귀국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승려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며 당시 신라인들의 당에서의 활약을 잘 소개하고 있다. 엔닌은 적산법화원의  장보고 선단을 통해 일본으로 귀국해 이후 밀교를 전하게 된다. 당시 신라에도 유학승들의 귀국에 따라 선사상의 전교가 활발해지고 밀교의 전법도 유행한다.(그림3:: 석굴암 삼층석탑) 도의선사는 지장의 선법을 신라 귀족층에 전하려 하지만 화엄교학에 심취한 신라 귀족층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속초에 있는 진전사에서 수행을 하게 된다. 미술사적으로 도의선사의 부도는 불탑과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결합된 중요한 시금석이 되지만 그의 불법은 당시에는 아웃사이더로 취급되었다. 육조 혜능 이후 중국의 선사상이 不立文字, 見性成佛을 근본으로 하기에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이 당시 신라 지배층에서 교학을 대신하는 것으로 받아 드리기는 다소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도의선사와는 달리 홍척과 혜철, 범일은 화엄교학과 민간의 諸神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융합을 하는데 이 근간에는 밀교사상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대안사 적인선사 탑비) 도선은 이러한 때 20세에 동리산을 찾아가 혜철의 제자가 되었다. 기존의 불교사상을 뚫기 위해 혜철의 융합사상을 이어 받은 도선은 소위 비보사상을 주창하게 되었다. 비보사상의 근간은 선사상이며 밀교와 제신사상을 포함하는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다. 裨補란 “도운다”는 의미인데 이는 비보사탑(찰)설로 통하다가 음양오행과 도참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예가 있지만 비보사상과 도참, 음양오행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비보사탑(찰)설이란 음택의 좋은 혈을 찾는 게 아니라 “지세가 약하고 쓸모없는 땅에 절이나 탑을 세워 땅을 사람들에게 이롭게 바꾼다”는 사상으로 중앙정부적인 불사에서 지방중심적인 불사로 개념을 바꾸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면 王則佛의 사상을 가진 화엄사상을 배척하고 선법만으로 전교한다는 것이 어려웠기에 이를 위해 諸神을 융합한 밀교사상의 도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밀교가 오늘날에 밀교의 의미와 동일한 것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밀교가 당시 신라에 얼마나 유포되었는지를 보도록 하자. 삼국유사에는 밀교에 관련하여 제 5권의 신주편에 밀본, 혜통, 명랑법사의 이야기를 실어 놓았다. 특히 문무왕때 당나라군을 물리친 명랑의 文豆婁法(mudra라는 수인의 표현)은 세인에 잘 알려져 있다. 혜통이 창시했다는 총지종(dharani의 의역)과 명랑의 신인종이 과연 종파로서 어느 정도의 역할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국사의 지위까지 오른 것을 보면 당시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받아 진 것 같다. 최초의 밀교는 오늘날 알고 있는 탄드라식 밀교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수많은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제불과 보살, 신중들이 만다라의 체계에 통합되어 표현되지만 이는 팔라시대 이후 후기 밀교로 총칭되어진다. 따라서 신라하대에는 화엄경에 나오는 비로자나불과 금강정경을 소의경전으로 해 표현되는 지권인 형태의 수인을 한 금강계 비로자나불이 동일 형태이기 때문에 眞言을 중심으로 한 기복불교로서의 밀교와 화엄종과의 만남은 사상의 혼동보다는 자연스런 융합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선국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혜철의 전법제자로서 선사상을 확고히 했지만 신라 귀족층의 시대적 사상인 화엄과 법상, 정토 등의 제 사상과 융합하기 위해 밀교를 도입한 禪師로 인식한다, 밀교의 진언이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밀교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화엄의 주존과 동일하다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밀교의 융합사상의 한 예로 선무외의 사상을 이은 일행법사는 약사만다라 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 석가불등 모든 제불, 보살이 들어 간다.  이러한 융합사상이시대적 요구였다면 왕권의 약화에 따른 지방분권과 더불어 비보사탑(찰)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산천비보란 이 땅을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변용이었다고 본다.


철원에서의 도피안사의 창건은 바로 도선국사의 새로운 사상의 실현이다. 철원의 철조비로자나불은 개금불사가 되어 금칠로 되어버려 옛 순박한 모습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휴머니즘적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는 이제 석굴암 본존의 위엄을 벗어 던지는 자각의 산물은 아닌가. 육계가 낮은 것 역시 소위 미술사가들이 말하는 불상의 형식화의 진행이 아니라 바로 신라불교의 민중적 진행형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7세기 이후에 유행한 목에 그리는 세 가닥의 삼도(번뇌도,苦道)는 유난히 긴 목인데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소위 통견의 형태라는 옷자락은 중국식 착의법으로 바뀌었다. 푹 파인 대의를 통견의로 분류하는 데 이 역시 올바른 분류법인지도 다시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우견편단”이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내려가는 형태로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낸다고 해서 우견편단이라 하고 “통견”이란 양쪽 어깨를 다 가린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러한 방식은 초기 마투라 불상과 간다라 불상에 있어 차이점이 극명하지만 이후 중국과 한국 일본에 있어서는 온대의 기후조건에 따라 착의법은 두 형태가 모두 유행하였다.
그렇다면 대의와 승각기 그리고 군의의 형식을 갖춘 중국식 착의법은 언제 정착을 했을까. 북위의 효문제때 왕즉불의 사상으로 인해 불상에 왕의 착의를 입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은 중국식과도 다른 (소위 고름이라는 신이 없다)아주 자연스런 착의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마치 당시에 유행한 옷가지같이 단정한 형태를 하고 있다. 따라서 통견의 형태지만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로자나불은 연화대좌에 앉아 계신다. 팔판의 복련과 앙련이 아래위로 있다. 마치 연꽃위에 떠서 설법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스님의 배려로 불단의 뒤에서 연꽃 대좌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화엄과 밀교의 교학이 결합된 비로자나불의 전신을 보게 된 것이다.
단아함이란 미술사적인 표현보다 그저 신앙인의 자세에서 볼 수 밖에 없는 법열의 순간이다. (그림5:: 도피안사 석탑 기단부) 불당의 바깥에는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사각의 하박석위에 팔각의 하층기단이 있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의 연화대좌와 동일한 팔각의 모양을 한 상층기단(이층기단)이 있다.
그 위의 받침돌이 있고 삼층의 탑이 시대적 양식을 갖춘 채 천년의 세월동안 하늘을 이고 있다. 도피안사 삼층석탑과 비슷한 형태의 것은 그 수가 많지 않은 데 흔히 비교하는 것이 석굴암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비록 연대는 석굴암 본존불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신라하대의 특이한 불탑양식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탑파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석굴암 삼층석탑은 하박석이 원형이고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어 도피안사탑처럼 상층기단이 대좌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하대갑석이 상층갑석보다 길어 조화란 측면에서는 다소언바란스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도피안사탑과 그 맥을 같이한다.
밀교에서는 오방불 신앙을 내세운다. 굳이 밀교적 신앙의 해석을 이 탑에 도입을 한다면 밀교의 초조인 선무외삼장의 삼부의궤법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북방에 석가모니불, 서방에 아미타불, 남방에 아?불, 동방에 보생불의 오방사상이다.
그렇다면 이 도피안사탑의 밀교적 성격을 어떻게 생각해 보면 좋을까.
대좌형태의 상층기단을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상의 대좌와 같은 형식 (석탑의 중앙을 비로자나불로 봄)으로 본다면 그 위에 있는 삼층석탑은 그 사면이 바로 사방사상의 표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방은 비로자나불로 표현된 법신사리인 경전일 것이고 무구정광다라니경이 황복사탑과 창림사탑,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도피안사에서도 그럴 개연성을 보여준다. 탑의 중심에 비로자나불을 둔 오방사상은 초기밀교(순밀)의 가능성을 유추케 해준다.


화엄십찰과 정토사상, 미타사상으로 대변되어 지는 신라의 교학에 밀교가 끊임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민중의 신앙과 결합되는 기저신앙의 역할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더욱이 신라하대에는 회창폐불사건(841~846)으로 인해 많은 유학승들의 귀국하여 육두품출신의 유학생들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도의선사의 실패에서 보았듯이 선사상은 신라의 왕실과 귀족에서 배척을 당했지만 혜철과 홍척의 예에서 선사상과 화엄이란 교학의 융합에는 분명히 밀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도선국사란 거장이 있었던 것이다. 도선국사는 비보사탑설이란 사상을 가지고 한시대의 변화를 주도한 분이다.

불과 삼십년 후 小邑에 지나지 않았던 철원이 태봉국의 수도가 되었다는 것은 도선국사의 비범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불상의 대좌와 불탑의 결합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열린공간의 새로운 개념인 불국토사상의 실현일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논고를 통해 양식적 고찰을 통한 불상의 고찰은 보완되어야 한다,)

오방불을 이고 천수백년을 버틴 삼층석탑이여! 도선국사의 신묘함을 궁예를 통해 증명한 삼층석탑이여! 또 한번 원융의 지혜를 보여다오. 그것은 너를 지켜보는 사람들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약속일 것이야. 젖과 꿀이 흐르는 바로 그런 땅 말이야.
처연히 쏟아지는 빗길에 마지막 답사지 회암사지로의 발길이 바빠진다. 그것은 경주에 한한 불국토사상을 한반도에 현현케 한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의 또 다른 기적을 보여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철원을 넘어 비보사탑의 기적을 볼 날 언제인가!

小窓 아사달 차문성(cha@socha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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