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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5 20:39:51, Hit : 3882, Vote :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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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366년만의 해후


-1탄: 드라마 추노, 재미있게 보는 법-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366년만의 해후
- [소경원/영회원]추노 드라마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인물 탐방 -
                                    글쓴이: 소창박물관 운영자 차문성

KBS 드라마 ‘추노’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백그라운드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 경안군에 맞춰져 있다. 바로 경안군은 극 중 노비로 전락한 전직 판관 송태하(오지호 분)가 보호하고자 하는 왕자다. 그를 보호하고자 제주로 향하면서 짐승남 추노꾼들과의 대결이 사못 대중을 사로잡는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바로 이곳에 추노 드라마의 백그라운드가 그려져 있다.
- 광명 영회원과 고양 서삼릉 내 소경원-

366년만의 해후가 있던 날,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길을 걸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길이다. 왕가의 몸으로 누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누구에게 죽음 이상의 고통을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8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청산하고 이제 국본의 몸으로 금위환향 하는 날 날선 눈으로 노려보는 반정 대신들의 쓰디쓴 웃음, 서릿발 같은 분기를 참을 수 밖 에 없는 세자의 긴 한숨은 이제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림1: 광명 민회빈 묘 영회원, 좌측이 필자, 중간이 종손 이준기 선생, 우측이 정다경 기자]
인조의 분노는 곧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강빈에게로 옮겨졌다. 강빈의 제거는 왕이 가져야 하는 숙명적인 운명일지도 모른다. 청황제 홍타이지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던 날의 치욕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그래서 유약한 세자보다, 어린 원자보다 더 강한 봉림대군이 그의 유력한 후계자로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러한 인조의 용기있는 결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현세자가 청과 모의하여 왕위를 넘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의 죽음 이후 원자의 처리를 애원하는 강빈의 뒷배에는 훈구대신과 신진사류들이 있다는 확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앗으려는 사악함마저 배여 있다.
사헌부, 사간원, 옥당. 판서, 의정부에서 강빈의 구명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이들과 결탁한 사악한 원흉으로 몰아 그녀에게 사약을 내린다.

녀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지나온 억척같은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석철, 석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머나먼 청의 볼모살이를 하는 동안 석견을 낳아 새롭고 부유한 조선을 꿈꾼 그녀에게 ‘조용한 아침의 나라’ 는 외부세계와는 차단된 암흑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잡혀온 조선인을 속환하여 둔전을 개척하고 수천석의 곡식을 비축하여 나라의 살림밑천으로 삼은 것이 자랑스럽지 않았겠는가. 죽도록 열심히 일한 속환자들의 명단을 일일이 적어 상을 줄 것을 승정원에 천거하지 않았던가. (노비가 도망가면 잡는 것을 추쇄라 하고, 돈을 주어 속량시키는 것을 속환이라 함)

최고의 지위에서 부도덕한 여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가진 어머니란 것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남은 이들의 고통이다. 그래도 세 딸은 노비는 면하여 요미(쌀 지급)만 삭감이 되었지만 아들 셋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첫 째 석철(경선군)은 당시 12살이고, 둘 째 석린(경완군)은 8살, 막내 석견(경안군)은 겨우 4살이었다. 의금부에서는 이들 3형제를 제주도의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부처할 것을 제안하지만 인조는 겉으로는 마치 자애로운 할아비처럼 이들 셋을 한 곳에 정배해 살도록 하지만 철저히 외부인들의 접촉을 차단토록 명한다. 1647년 7월 삼형제가 제주에 도착해 영문도 모르게 제주에서 석철과 석린이 죽고 만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
할아비 인조의 간악함이 아들, 며느리, 처가 식구, 손자들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 비록 막내 손자 경안군만 살아 남았다해도 이것은 조선 최대의 왕실 파륜(破倫)일 것이다. 태종이 그의 형제들을 무참히 죽였다고는 하나 부모에 대한 천륜은 버리지 않았음이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는 하나 그의 후회함이 하늘에 이르렀음을 인조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사관은 논한다.
“지금 석철 등이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무슨 아는 것이 있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뜨거운 장기가 나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만약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성인의 자애로운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또한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들의 죽음을 사전에 모의하지 않았다면 석철, 석린 형제가 죽기 한 달 전에 사신이 어떻게 이처럼 정확하게 그들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러한 가족사를 가진 소현세자 종가와의 인연은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대자사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종가집이 오랫동안 터를 잡아은 고양시 대자사터가 사실은 조선 초 최대의 왕실원찰인 대자사인 것이다. 작년 9월 전통문화학교에 “대자사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 연구”란 학술논문을 게재난 후 이곳에 소현세자 적장자 집안이 정착하게 된 경위를 눈여겨 봐왔다.(경안군과 가족들의 묘소가 이곳에 있음)
소현세자의 소경원이 서삼릉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고양시 대자동에는 제주에 귀양가서 효종 때 해배된 경안군의 묘가 위치해 있다. 사초지 (묘 경사지)아래에 아들 임창군, 임성군의 묘가 있고 언덕 위 높다란 곳에 손자 밀풍군의 묘, 그 아래에는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온 명나라 출신의 시녀 굴씨 할머니 묘가 있다. 이처럼 이곳에는 비록 잊혀 진 역사지만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스토리텔링이 언덕위에 고스란히 남아 역사의 한켠을 채워주고 있다.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기록의 꽃이 아니라 기록의 삭제며 요약일 뿐이어서 이제  ‘소현세자 가족의 수난사’를 생각해보자.

마 전 광명시 문화유산해설사 김옥연 선생의 주선으로 영회원을 방문하게 된다. 1월 17일 아침 고양 대자동에 비친 날씨는 무척 맑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소현세자 종손 이준기 선생, 경기도민일보 정다경 기자와 함께 차량에 올라타 통일로IC에서 불과 30분 만에 광명 애기능(광명IC 인근)에 도착한다. 비포장도로인 논현농원을 지나 500M거리에 영회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내판에 기술된 영회원의 조성경위를 말하자면,
“영회원은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묘소이다. 세자빈 강씨는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강석기의 딸로 인조5년(1627년)에 세자빈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고 귀국하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민희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 하였고 왕실을 계속 저주한다고 거짓을 꾸며 대는 바람에 인조23년(1645년)에 폐빈되어 다음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숙종 44년(1718년)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고종7년(1903년)에는 이 묘를 영회원이라 이름 지었다. 현재 능원의 봉분 앞에는 혼유석, 장명등이 있고 봉분의 좌우에는 문인석, 망주석, 석양, 석마, 석호 등이 남아 있다.“
사실 인조의 후궁 조소영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실록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강빈이 남편 독살설로 무고되어져 사사된 것은 아니다. 이미 강빈은 그의 남편 독살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인조와 일부 반정대신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인조의 비망기에 기록된 그녀의 죄목은 첫 째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했고 이미 홍금적의(왕비 복장)를 만들어 두고 내전의 칭호를 사용한 죄. 그리고 인조에게 조석으로 문안을 폐하고 소현세자의 죽음과 처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죄, 세 번째로는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에 독을 넣은 죄가 있었다. [그림2: 영회원의 앙증맞은 석호]
그러나 첫 째의 죄목은 세자와 강빈이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부른 것이라 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죄목은 어느 누가 지아비를 죽이고 그녀의 형제를 절도(絶島)에 귀양(강빈이 사사된 후 이들 형제는 곤장을 맞아 4명 모두 장살되었다)을 보냈는데 항의를 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는 나인들을 조사했지만 죄가 밝혀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전복을 먹은 인조가 멀쩡했다.
더더욱 대신들의 간언에 의해 강빈이 무고되었을까. 실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대신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죄를 청하지는 않았다. 아니 모두들 사사만은 극력 반대를 했지만 인조는 강빈에 있어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사사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사설이 길었지만 이 애처로운 가족사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강빈의 묘소가 이곳 금천강씨의 선산에 묻히게 된 것은 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강씨를 어느 곳에다 장사 지내는 것이 좋겠는가. 예조에 문의하여 아뢰라 하니 예조에서는 강씨가 이미 죄로써 폐출로 사사되었으니 소현의 묘소 곁에 묻는 데에 대해서는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강씨의 집안 산에 장사지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인조 24년 3월 17일)

무도 밟지 않은 영회원 담장 안에 종손 이준기 선생이 먼저 올라갔다. 그의 생애 처음 강빈 할머니의 묘에 마주 선 것이다. 큰 절을 두 번하는 그의 비장함은 그녀의 고통을 뼈 속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단아한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있고 옆에는 석마와 웃고 있는 문인석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봉분 뒤편에는 석호와 석양이 아담하고 민화적 느낌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교적 석수의 전체적인 크기와 모양은 기둥 같은 괴체감은 없고 아담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문인석의 머리에는 아직도 고식(古式)의 복두공복형 복식이 남아있고 의습선 역시 작은 규모라 볼륨감이 떨어진다.  

강빈의 위패와 시호를 회복한 것은 숙종 대에 이뤄졌다. 평소 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아파하던 그가 만년(1718년)에 이르러 강빈의 시호를 민회(愍懷)라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원래는 천장도감을 만들어 소현세자와의 부장(합장)을 추진하였으나 이미 묘가 조성된 뒤 70여년이 흘렀고 왕과 왕비의 능이 별도로 다른 지역에 조성된 예를 참고하여 합장을 중단하고 봉묘도감을 설치해 봉분과 석물을 중심으로 묘역공사를 진행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석물은 왕조의 비슷한 시기의 다른 석물과 비교해 볼 때 숙종 때 조성되어 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고종 때 이르러 민회빈 묘를 영회원으로 승격하였지만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청 등의 조성은 차후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조의 공신인 이원익 선생 집안이 설립한 충현박물관을 방문한 후 청국장을 맛있게 먹고 일행은 서삼릉으로 향했다. 서삼릉 숲 초입은 세계문화유산의 명성과는 달리 삼송지구 공사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능역 입구에는 식당으로 보이는 와가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다만 최불암이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던 유명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인 자작나무 숲길은 여전히 옛길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삼릉에 들어선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서삼릉은 삼릉, 삼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내에는 삼릉, 삼원과 더불어 46묘 그리고 태실 54기가 있는 곳이다. 이  중 삼원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이 소경원이다.
서삼릉 관리소 뒤편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조금 올라가다보면 보호구역을 지나는 철책이 이어진다. 이 철망을 통과하면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아이리스 촬영장인 아키타처럼 넓은 설원이 펼쳐진다. 그곳이 사랑을 예견한 아름다운 설원이라면 이곳은 애처로움이 남아 있는 설원, 설원이 아닌 설움이 남긴 흰 바탕의 수의와도 같은 곳이다.
소현세자의 행장은 전한다.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청인이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허락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가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를 보호할 수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어찌 꺼리겠습니까? (중략)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로 3남과 3녀를 두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4월 26일)
글의 행간에 세자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3:소현세자 묘 '소경원'의 전경]
윽고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에 이르면 제일 먼저 문에 띄는 것이 원형 그대로의 곡장이다. 하단의 장대석과 절묘하게 배치된 달무늬의 흰 석회는 회색의 방전과 어울려 아름다운 저승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널따랗게 둘러싼 곡장 안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는 장식없는 커다란 봉분이 놓여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놓여있다. 봉분의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한 쌍이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장명등 옆에는 괴량감은 사라졌지만 홀을 들고 서 있는 복두공복의 문인석이 있다. 문인석의 의복을 살펴보면 공복과 중의는 잘 정리되어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복두의 끈은 얇게 귓 선을 따라 매어져 있고 손은 소매 밖으로 나와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양이다. 이전 왕릉의 석물이 커다란 크기의 석인, 석수를 사용하던 것에서 더욱 작아진 것은 임진, 병자호란 이후 혼란기에 역군들이 부족하여 비교적 검박하게 조영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에서 괴량감보다는 사실성을 중요시 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초지 아래에 구덩이처럼 홈이 커다랗게 파져 있어 혹자는 이것이 흉지라고 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구덩이는 사초지를 조성할 때 지반이 침하한 것으로 왕릉 보수 시 흔히 언급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아래 정자각은 이미 원래의 모양은 사라졌지만 석축은 남아 정자각의 단아한 모습을 추정 가능하게 해준다. [그림4: 소경원의 아름다운 곡장과 문인석]

소경원의 아래 종마장 너머 멀리 제주 귀양살이에서 죽은 소현세자의 첫 째 아들 경선군과 둘 째 경완군 묘를 살펴보았다. 지금은 군부대로 인해 소경원과 분리된 곳이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비석과 봉분 두기가 보인다.
종손 이준기 선생은 긴 한숨을 내 쉰다. 살아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죽어서도 군부대에 가로막혀 오갈 수 없는 이런 기구한 삶이 어디 있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비공개 묘인 소경원을 오늘 처음 친견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왕릉과 원소를 익히 보아 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눈꽃에 덮힌 묘는 본 적이 없었다. 하나의 묘소가 아니라 아름다운 꿈, 시대를 앞선 야망을 가졌지만 절대자의 권력에 의해 좌절된 사람이라 그 애처로움은 더욱 절절했다. 그의 시호인 소현(昭顯)처럼 “덕을 밝혀 공로가 있음을 ‘소’라하고 행실이 중외에 드러난 것을 ‘현’이라 함”과 같이 소현세자와 강빈의 실용적인 꿈인 부국강병을 새로이 연구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나의 의무감으로 남는다.

숙종이  민회빈의 시호를 회복하면서 지은 시로 이 글을 맺는다.

-소현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면서-
혼령모신 사당을 돌아보니 더욱더 처연하구나
세월은 흘러 광음은 칠십여 년인데
궁주를 어찌하여 아울러 받들지 못하는고
세상사람 그 누가 마음으로 항상 가련하게 여기는 줄 알리오

2010.1.21 차문성 씀

에필로그) 종손과 민회빈과의 366년만의 해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니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며칠 전 종손은 그의 가족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가족들 모두 그곳을 찾았다. 버려지다시피한 세자빈과의 366년만의 해후는 이렇게 시작한다. 드라마 추노의 배경이 되는 소경원(소현세자)과 영회원(강빈)에는 조선시대의 처절한 정치사를 오늘에 반추함은 물론 생사를 가른 참담한 한 가족사의 얘기가 담겨있다.

다음에는 대자동 경안군 가족 묘, 영회원의 강석기 가족묘와 소현세자 가족의 묘를 탐방할 예정으로 있다.
              

* 소경원 위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내 위치 (비공개 릉)
* 영회원 위치: 경기고 광명시 애기능
* 경안군 묘 위치: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최영장군 묘 옆 대자사터 내 경안군 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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