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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6-30 22:03:42, Hit : 8507, Vote :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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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박물관 성립과 그 배경

일제하 박물관 성립과 그 배경

小窓 아사달 차문성 ( cha@sochang.net sochang@chol.com)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근대사진전(Title: Document, 사진아카이브의 지형도)을 본 지 일주일만인 지난 일요일(2004/06/27) 때마침「근현대 인천에서의 일본, 중국 그리고 크로마이트」란 주제를 가지고 답사를 했다. ‘크로마이트’란 크롬철광이란 의미의 6.25때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명이다. 즐비한 근대건물이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을 가졌지만 근대 역사 속에서의 인천을 바라보는 데는 그러한 건물 이상이 없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교과서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땅에 살아온 흔적인 무덤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근대건축물의 답사에 대해서는 서경뿐 아니라 부경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이미 답사를 한 바 있다.
전통을 기초로 하지 않은 근대건축물도 과연 보존해야 할 것인가.
건축물을 만든 주체가 일본인이라면 어떨까.
더구나 조선지배의 상징이라면 ...
본인은 1995년을 똑똑히 기억한다.
조선총독부-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이 땅의 榮辱을 함께한 건물이 역사 속으로 잊혀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기 때문이다. 건물을 허무는 이유는 일제의 조선지배의 상징이 그 건물이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안에 있다는 이유다. [그림:구조선총독부 민족의 영웅이 되고자 한 당시의 김 대통령과 동조하는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총독부건물은 여지없이 해체된다. 나는 중앙 돔을 해체하는 날 , 그곳에서 하닐없이 한나절을 보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시대의 상징물이 사라졌는데 왜 가슴이 아팠을까.
총독부청사는 (1926) 조선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철근과 콘크리트가 들어간 거대한 화강암 건물이 경복궁에 차지했을 때 조선인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광화문이 옮겨지고 흥례문이 무너졌을 때 그 아픔을 노래한 야나기 선생의 애절한 글귀와 동아일보 설의식 선생의 절규가 메아리쳤던 시대다.
때는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날 「감격시대」가 울린다. 정말 감격스런 날이다.
일종의 해프닝이지만 감격시대란 노래가 나온 배경은 1930년대 말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을 넘볼 때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홍보노래라는 것을 알았다면 엄청난 방송사고였을 게다. 물론 나중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주최측의 실수로 마무리되었지만 오늘날처럼 인터넷의 시대라면 정부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감격시대를 맞을 지도 모른다.
총독부 건물을 없애는 것이 과연 부끄러운 역사를 덮을 수 있는 것일까. 고구려가 지배한 만주땅의 역사가 천수백년이 지난 후 중국의 역사로 탈바꿈된 사실을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총독부건물을 제발 없애기를 바랬다고 한다. 이런 논리라면 세월이 흘러 일본은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합병을 마지못해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구실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기록물의 상당부분이 조선인을 위한다는 명목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자 과거를 없애는 어리석은 민족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철저히 과거를 생각하고 되새겨서 다시는 식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선총독부건물은 당연히 건재했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은 아래의 글을 적으면서 너무나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나마 2001년에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등록문화재 규정이 들어갔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 한 것」은 국가가 보존하겠다는 의지이다.
다행스럽게도 법이 발효된 후 경남도청이 보존되었고 경제적 논란에 휩싸인 영도다리를 보존하는 결론이 이 법을 기초로 세워지게 된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작년에 서울시청의 해체논란이 있은 적 이 있었다. 앞으로 논의는 거세지겠지만 조선총독부의 운명을 자초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나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건립배경과 성립을 통해 일본의 근대를 향한 고집스런 욕심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근대를 향한 집요한 몸부림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 박물관의 성립과 배경을 통해 암울했던 역사의 단면을 보고자 함이 글의 목적이다. 부디 POSITIVE 문화재와 더불어 NEGATIVE 문화재를 통해 반성이란 또 다른 관점에서 앞으로의 천년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Ⅰ. 緖言

1924년 북경정변에 의해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물러난 후 ‘청황실’ 사후 수습 위원회’가 설립되어 그 해 9월에 ‘고궁박물원 임시 조직대강’을 제정해 10월 10일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자금성은 황궁에서 박물관이 되었다.

한편 일본은 1871년 <古器舊物보존포고령>이 내려진 바 있고, 18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참가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박람회사무국’이 설치되었다. 문부성의 博物局이 ‘박람회사무국’에 합병됨에 따라 內山下町(우찌야마시타)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것이 ‘동경국립박물관’의 전신이다.
러일전쟁 후 일제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시점에 근대적 의미의 박람회와 박물관을 설립하려는 노력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 한국 박물관의 형성에 관한 소략한 기술로 인해 편년사 적이고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는 한국박물관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 本考에서는 ‘이왕가박물관’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후 다음 해 개관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정을 통해 최초의 한국박물관의 성립과정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최초의 박물관 형성시기

1. 박물관 형성 이전의 시기 : 통감부 이전의 박람회
일제는 명치기를 전후하여 파리 만국박람회 (1867) 오스트리아 박람회 (1871) 윈 만박(1873) 필라델피아 만박(1876) 파리 만박(1878) 시카고 만박( 1893) 파리 만박(1900) 센트루이스 만박(1904) 영일 만박(1910) 에 참가하기도 하고 직접 박람회를 개최한 경험도 여러 차례 가지고 있다. 京都박물회사가 1872년 설립이 되었고 1873년 해외 박람회에 출품하는 물건을 관장하는 사무를 담당하는 ‘박물관사무국’이 설립되게 된다. 1877년 동경 우에노에서 열린 제 1회 '내국권업박람회'가 일본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다. 채광, 야금, 제조물, 미술, 기계, 농업, 원예의 6개 분야로 이뤄졌다.[그림Ⅱ- 1일본1890,내국권업박람회]

이후 4년마다 한번씩 동경, 교토, 오사카가 교대 개최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박람회의 개최는 박물관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museum'의 번역어로 ’박물관‘과 ’미술관‘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考古利今‘을 의미한다. 즉 박물관은 ’考古‘를 미술관은 ’利今‘을 목표로 한 것이다. ’박물관‘은 오래된 것, 동양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인식하고 ’미술관‘은 새로운 진보성과 서구적인 제도를 의미하게 되는 예술적 패러다임으로 이 시기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박람회는 박물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박물관이 만들어지기 전 몇 차례의 박람회가 있었다. 조선에서의 최초의 박람회는 1906년 부산에서 개최된 ‘韓日박람회’라고 한다.
부산에서 열린 이 박람회는 300여명의 출품자와 400여점이 전시되었다. 당시 출품된 것은 일본은 공산품 위주였지만 조선에서 출품된 것은 각 지역의 특산물이었다고 한다.
이어 1907년 서울의 ‘경성박람회’, 1909년 ‘평안남도품평회’, 1913년 ‘西鮮물산공진회’, 1915년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1917년 ‘조선양조품품평회’, 1923년 ‘조선부산품공진회’, 1927년 ‘경성생산품품평회’, 1929년 ‘조선박람회’, 1932년 ‘전남특산품전람회’, ‘경기도내 공업생산품품평회’, 1934년 ‘조선무역촉진전람회’, ‘조선생산공업진흥회’, 1936년 ‘경상북도직물전람회’, ‘전라북도 산업진흥전람회’, 1940년 ‘全鮮산업체 대용품전시회’등이 이 시기 열린 박람회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일본의 지원에 의한 타율적인 박람회가 그 시발점이었을까.
박람회와 박물관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일본내무성과 농무성 시찰을 한 박정양에 의해서이다. 「박물관 사무를 관리하며 天産, 人造, 古器今物을 수집하여 견문을 넓히고자 박물관 설치에 대한」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민종묵 역시 <견문사건>에서 일본의 박물관과 박람회 관람을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883년 미국이 조선보빙사를 파견하면서 답례로 민영익을 비롯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일행이 당시 개최되고 있었던 ‘보스톤박람회’에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비공식적 이라 하지만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몇 점이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는 것은 비공식적이지만 참가를 했다는 의의가 적지 않다.
1888년에는 개화파 박영효가 고종황제에 <建白書>란 내정개혁안을 상소하였는데 6조에 박물관의 건립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공식적으로 참가한 첫 박람회는 1893년의 시카고 박람회였다. 당시 출품한 품목도 手공예품과 농산품 위주였는데 나전칠기, 자수병품 등이다. 전시관은 기와를 얹은 한옥이었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초라했었던 것 같다. 당시 미국에 유학중이던 윤치경은 “모든 건물위에 참가국들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데 조선국기만이 없었다. 가슴이 미어졌다”는 글을 “윤치경일기”에서 나오므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연이어 1900년에 열린 파리박람회에도 참가했지만 시카고박람회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게속된 노력이 있었지만 박람회를 개최하려던 노력은 국운의 쇠퇴로 1904년 임시박람회사무국의 폐쇄로 근대화 노력의 하나인 박람회의 개최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2. 통감부시절의 박람회
1903년 오사카 천왕사에서 열린 제 5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조선관이 설치되었지만 이는 다분히 일본을 통한 조선이라는 개념이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1907년 동경박람회에 조선인 2명을 토속민처럼 취급하여 전람회에 참여케 한 사건을 당시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학생들이 항의를 한 일이 있다. [그림Ⅱ- 1907년 경성박람회(京城俯史)]

또한 1907년 서울에서 경성박람회가 일본인 관리들이 주축이 되어 열리게 된다. 舊대한제국 정부로부터 2만5천원의 보조를 받아 45일간 99,126점을 전시한다, 그러나 이 전시품의 94%는 일본인들에 의한 출품이고 한국인에 의한 출품은 4,500점에 불과했다. 이는 일본의 선진성과 조선의 후진성에 대한 대비를 통해 조선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908년 2회 ‘경성박람회’는 약 8만점의 출품작과 20만명의 관람객이 있었는데 이로서 미약하지만 박람회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타율적이지만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 간다.

3. 한국박물관의 嚆矢 (창덕궁박물관 혹은 이왕가박물관)
일본에 의해 주도된 박람회가 비록 일본의 선진기술과 조선의 開化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1908년 제2회 ‘경성박람회’에는 20만 명이라는 연인원이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적으로 순종에 선위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총리대신 이완용등이 주장하여 황제를 위무하기 위해 창경궁에 최초의 박물관이 완성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즉위함과 함께 융희 원년(1907) 11월에 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함에 따라 황제의 위안을 겸하여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 예전 보루각(報漏閣)이 있던 일대에 동물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권농장(勸農場) 터에는 연지(蓮池)를 만들고, 춘당대(春塘臺) 일부에 식물원을 영건하며, 예전 자경전 터에는 장서각(藏書閣)을 짓고, 또 박물관을 영선하는 등 많은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공사들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융희 3년 11월에는 동물원, 식물원이 준공되어 개원식을 거행하고 일반의 관람도 허가하였으며 융희 4년 3월에는 박물관도 낙성, 다시 궁내부 주최로 내외 각 관원을 초청하여 성대한 개원식을 거행하고 종람(縱覽) 연음(宴飮)이 있었는데 특히 박물원에는 신라·고려조 이래의 고기물(古器物) · 미술품들이 수집 수장되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창경궁의 동물원 · 식물원 · 박물원[관] 등의 3원을 합한 명칭을 이듬해 3월에 그 소재지가 창덕궁의 비원 동쪽에 있는 어원(御苑)이라는 의미에서 「동원(東苑)」이라 하였다가, 다시 창경궁 소재를 의미하는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쳤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박물관은 동물원, 식물원 , 박물관을 합쳐 최초「창경원(昌慶苑)」이라 불렀다. 일제 때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비하되었다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대표하는 용어로 창경궁을 대신해 昌慶苑이 정착되면서 비하적인 용어로 인식되어져 왔다. 1933년에 재간행된 ‘이왕가박물관사진첩’을 보면, “궁의 일부인 昌慶苑”이란 언급을 하는데 이는 당시까지도 동, 식물원과 박물관을 통칭한 昌慶苑을 창덕궁과 창경궁의 일부지역을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연대표로 살펴보면,
1907년 11월 6일 : 황제의 위안을 내세워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의 창설을 제의
1908년 9월 : 어원사무국에서 박물관 설립 추진
1908년 하반기: 동물원 1단계 완성하여 사육시작
1909년 11월 :동물원, 식물원 완공하여 개원식을 하여 일반에 공개
1910년 3월: 박물관 낙성하여 개원식 실시(기존 건물사용)
1911년 11월 30일: 박물관 본관 완성


박물관 낙성일자는 순종실록과 이왕가미술관요람, 창덕궁 이왕실기의 날짜가 일치하지 않아 순종실록을 근거로 한다. 1910년 3월 박물관의 낙성일자는 신관이 완공되기 전 명정전을 비롯한 곳에 박물관의 소장품을 보관한데서 비롯되었다. 즉 사용하지 않던 궁궐에 대한 보수가 이뤄져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물관의 신관이 다음해 개관됨으로 상당수 소장품이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1915년에 발간된 <경성안내>는 1909년 박물관건립에 관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천교를 지나면 명정문이라 苑내 북부를 식물원으로 하고, 중부를 박물관으로, 남부를 동물원으로 정하여 공사를 시작하더니 명치42년 (1909) 년에 대략 완성을 고하고 박물관의 사무실 및 陣烈庫는 그 보존할 古건축물을 사용하였으니 명정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전, 함덕정등 중요한 것이오..특히 그 진열불상, 도자기, 회화, 古鏡, 금속품, 조각물 등의 秀逸하여 세계적 보물이라 칭할 귀중품은 신건물의 신관에 진열하였으니 고물진품이 12,220여점에 이른다.” 기록되어 있다. [그림 Ⅱ- 창경궁내 이왕가박물관]

도록에 의하면 소장된 소장품의 총수는 12,230점으로 집계되었고(1912) 고려자기와 동기, 삼국시대 불교공예품, 조선왕조의 회화 , 풍속도, 도자기 등이 총망라되었다. 1912년 12월 28일 발간된 최초의 도록인 ‘이왕가박물관소장품목록’에 의하면 불상 49점, 금속공예 205점, 목조 12점, 도자기 (토기 78점, 백자 39점, 청자 80점)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유물은 통감부가 도굴된 유물을 구입하고 이왕가박물관에 의해 다시 재수집 하는 과정을 거쳐 악순환도 거듭되었지만 이왕가박물관에서 직접 수집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조선인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 末松態彦, 下郡山誠一등이 주도하였다. 아무튼 창경궁에서 발족된 한국 최초의 박물관은 <그림Ⅱ->에서처럼 명정전의 우측 언덕 위 일본식 和館 건물이 본관이었다. 본관건물 이외에 양화당 , 통명전, 영춘헌, 관경전, 경춘전 ,함인정, 영희당, 명정전, 숭문당, 문정당, 승화루, 보춘정등 대부분의 전각이 박물관 전시품의 전시장소로 활용이 되어 석제조각품, 조선시대 금속공예품, 고분의 모형, 고분벽화모사도, 불상 등을 전시하게 되었다.

전시물은 명정전에는 석각류, 명정전의 행각에는 조선시대의 토속품, 환경전에는 조선시대 금속기 및 토속품, 경춘전에는 도기, 목죽류가 박물관 본관에는 고려시대 도자기, 금속등의 귀중한 유물을 보관하였다.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이 당시 창경원으로 통칭되고 있었지만 박물관으로 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경원, 창덕궁박물관, 이왕가사설박물관이란 몇 가지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1912년 (대정원년) 12월에 발간된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의 緖言에 의하면 “이왕가사설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경성부가 1932년에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창덕궁박물관”
이라 명기하고 있다.
적어도 <이왕가사설박물관>이란 말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사용된 말인 것은 분명하다. 왜냐면 1911년 2월1일에 <이왕직 사무분장 규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전에 <이왕가사설박물관>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1년 까지는 ‘창경원’ 혹은 ‘창덕궁박물관’이란 말이 사용되었을 법한데 기록상 ‘창덕궁박물관’은 앞서 말한 바 훨씬 후의 일이기에 ‘창경원’이 초창기 이왕가박물관을 부르는 일반적 용어였다고 생각된다.

Ⅲ. 총독부 시절 일제에 의한 박물관 성립시기

1. 조선물산 공진회
(1) 조선물산공진회 개요
공진회의 공식명칭은 <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로 舊경복궁에서 열렸다, [병합 이래 일제에 의해 舊경복궁이라 불림]
조선을 점령한 지 5년째인 시정 5년을 기념하여 1915년 9월 11일에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된다. 그런데 그전까지 사용하던 박람회가 아니라 <共進會>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총독 데라우치와 당시 매일신보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일시적인 진열이 중심인 박람회가 아니라 공진회라는 명칭으로 지속적인 일본자본의 조선투자를 염두에 두었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동화정책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Ⅲ-1 공진회장(경복궁) 건너편 미술관(총독부박물관)]

공진회보고서에 의하면, 1913년에 공진회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1914년에는 일본제국의회에서 경비예산의 협찬을 받았다. 1913년 총독부 훈령으로 ‘공진회사무장정’을 발표하게 되었다. 사무총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각도의 평위원은 일본인 5인 조선인 5인으로 하여 각도 장관의 추천에 따라 심의케 했다.
1915년 총독부의 고시를 통해 8월 6일 정식 고지되었으며 개최기간은 1915년 9월 11일에서 10월 31일까지로 50일간이다.
당시 출품된 물품은 총 3만점에 이르며 나중에 열리는 <조선물산박람회>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당시 관람은 물론 구매도 허용이 되었고 각도별로 출품이 되었다,

공진회 소요경비는 총독부예산으로 50만엔, 지방 및 민간협찬 20만엔을 합하면 약 70만엔에 이르렀다, 1913년에 시설물 공사에 착수했고 미술관 및 1호 진열관, 2호 진열관등의 시설물이 포함되었고 이로 인해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를 제외하고 궁 안의 전, 당, 누각등 4천여칸의 건물을 민간에 放賣하게된다. 경복궁의 홍화문, 유화문, 용성문, 협생문이 이로 인해 헐려 나갔고 근정문 앞의 영제교와 자선당도 이때 헐려졌다. 기존전각을 방매함으로써 공진회장으로 사용한 총면적은 5,226평에 이르렀다.

공진회 규칙 4호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명치 4년 (1909) 이전에 채취, 가공 또는 제조한 물건은 제외(단 동식물, 제13부에 속한 출품과 참고품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음”
그들의 시정기간에 들어가지 않는 물품은 통치성적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1909년 이전의 것은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위의 표에서처럼 제 1호관, 2호관, 審勢館, 철도특설관, 동양척식회사 특설관, 미술관, 기계 [그림 Ⅲ-2 1915, 조선물산공진회 배치도]
관, 박애관, 수산관, 관측관, 영림창 특별관, 참고관, 축산관, 고적모형관, 교육실습관등 15개의 전시관으로 나눠져 있다. 여기서 1, 2호관과 심세관이 가장 핵심적인 전시다. 1호관은 시정 5년간 조선물산과 산업의 발달을 보여주는 것이고 2호관은 병합 이래 발달된 제도 문물을 선전하는 공간이었다.
심세관은 각 지역별로 병합 이래 오년간의 통계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경복궁은 물산공진회 전시장으로 변해간다.
경복궁이 제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애초에 경복궁을 공진회장으로 택한 것도 백성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함도 있었고 고종이 덕수궁, 순종이 창덕궁에 있으므로 왕궁을 훼손하여 조선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함도 간과할 수 없다.
(2) 공간 활용 에서 본 조선물산공진회
공진회의 공간구성은 신축건물과 재래공간의 활용으로 나눠져 있다. 공진회장 건축공사의 목록에는 43개의 공사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미술관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공진회 이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전용됨) 나머지 건물은 임시로 만들어진 목조건물로서 공진회를 폐막한 후 모두 철거되었다.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등 재래공간은 주로 부대행사나 사무를 위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첨부된 배치도그림 Ⅲ-2, 3 에 의하면 근정문 앞에 제1호관이 있으며 현재의 동십자각 근처에 2호관과 참고관이 배치되어 있다. 광화문 양옆으로 철도국 특설관과 동양척식회사 특설관이 있으며 공진회 이후 ‘조선 총독부박물관’으로 사용된 미술관은 근정문에서 向右側에 ‘이왕직특설관’과 함께 위치해 있다. 오늘날 근정문의 우측은 경복궁의 진입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당시 수많은 전각을 훼철하여 빈 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 것을 도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제 1호관 건물은 근정문을 막고 있고, 중앙문 양옆에는 탑이 보이고 로[그림 Ⅲ-3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
비, 진열, 이동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적인 건물이므로 다수의 관람객을 위한 공간이다.
매일신보 (1915.10.17)에 서술된 공진회의 관람순서는 광화문→동양척식회사특설관→분수→철도관→제2호관→ 제2호관→ 심세관→ 미술관 →영림창→ 기계관→ 근정전→ 경복궁 전각→ 경회루→ 연예관→ 각도매점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는 근대적 공간이후에 재래적 공간을 비교토록 되어 있다고 본다.
(3) 전시기법에서 본 물산공진회
첫째 박물관학적 관점이다. 대상을 동일한 기준으로 균질화하고 命名, 분류하는 박물관학적 시선은 근대적전시의 기본적인 시선이다. 예를 들면 쌀의 분류에서부터 수확시기, 생장속도, 충해에 대한 저항력, 단위면적당 생산량, 등이 조사된다. 그래서 증산에 도움이 되는 벼의 품종이 장려품종으로 결정된다.

두 번째 무속, 종교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다. 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조선의 무속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는 기사나 경주남산의 약사상과 감산사의 미륵불상이 물산회장의 조경석물로서 전락하게 된 것은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서 종교적 대상에서 미술품으로서 격하시키는 관점이다.
세 번째는 재래와 근대, 舊政과 新政과의 배치, 半島와 內地등으로 이분화 시킨 점이다. 농업부는 기준년도인 1911년과1914년의 비교로서 구정과 신정을 대비시켜 놓았다.
(4) 전시 방식에서 본 물산공진회
공진회에서 사용된 전시방식은 크게 세 방식으로 나눠진다. 이분화 시킨 견본의 대조와 통계와 도표, 모형과 사진이 그것이다.
‘경성협찬회’에서 발행한 화보에 의하면, 포스트의 가운데는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채로 춤을 추는 기생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상단에는 근정전과 경회루가 보이고 중단에는 공진회장이 보이며 菊花가 군데군데 있는 천연색 화보이다.
전체적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상단의 조선궁궐은 중단의 근대적 건물을 보여주는 공진회장에 비해 황량하고 어두운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다. 더구나 근정전과 경회루 사이에는 무심한 구름만 보일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반면 공진회장에는 양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전근대적 공간과 근대적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생각으로 보여 진다. [그림 Ⅲ-4 공진회포스터]

공진회 포스트의 이중적 장치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강하게 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운데 중심인물인 조선의 기생이 그려져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자율적인 면 보다는 타율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목할만한 것은 할인제도입과 신문, 잡지를 통한 공진회의 홍보다. 공진회가 열리기 전 신문계에 실린 ‘경성의 현상’이란 글은 도로, 교량, 건물, 공원, 궁성, 관청, 학교, 은행, 여관, 요리점, 연극장, 화류계, 전차를 안내하여 근대적인 홍보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2. 물산공진회의 개최가 조선인의 의식에 미친 영향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성황을 이룬 물산공진회는 총독부의 의도대로 조선정부 시절과 비교해 우수한 산업의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을 홍보할 수 있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보도도 그러한 면을 강조했지만 일부 신문의 보도는 양적인 면과 형식에 치우친 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산공진회는 조선인의 전통적인 사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품의 분류에서 계량화하는 일본의 신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박람회의 전시기법을 통한 착시효과는 식민지의 현실적 조건과 전시 공간상의 illusion을 자연스럽게 일치시키게 되고 이를 통해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준 수혜를 은연중에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에 의해 르네상스식 미술관을 비롯한 건물들에 대한 경이로움보다는 왕궁훼손이라는 잠재적인 저항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한편 ‘조선물산공진회’의 폐막 후 공진회 회기동안 전시공간으로 사용된 미술관을 박물관의 용도로 활용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성립되게 되었다.

Ⅳ 조선총독부 박물관

일본 역시 박람회가 박물관의 성립에 미친 영향이 컸다. 1868년 물산조사를 위해 설립된 대학남교에 물산국을 설치하고 대학남교박물관의 이름으로 전람회를 열었다. 이어 1871년 <古器舊物보전령>이 내려졌고 이로서 유물을 영구히 보관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 하였다. 일본 국내에서 박물관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서구의 박물관사상과 박람회에 출품할 항목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본다.

한국에서도 대한제국시대의 만국박람회의 참가와 박물관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1905년 통감부설치로 인해 사실상 일제에 의한 박람회가 주도적으로 되었다. 공진회를 개최하기 위해 발굴, 수집된 유물들을 보존과 함께 전시할 목적으로 공진회 개최관중 미술관을 본관으로 활용하고 자경전을 사무실로 활용하게 되었다. 폐막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설립이 되고 다음 해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과 더불어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가 총독부령으로 공포되었다.

[그림 Ⅳ-1 조선총독부 박물관]

이러한 법적장치로 인해 총독부박물관은 지속적인 유물의 수집과 연구에 착수할 수 있었다.그러나 총독부박물관의 설립에 앞서 오랜 기간 준비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1910년 세키노타다시 일행의 경남북도 조사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발굴조사 및 유물의 수집이 선행되었다. Ⅳ-1 사진에 의하면 박물관 건물은 근정전 우측의 공간을 이용하여 르네상스식의 우람한 건물이었으며 서양식 정원에 폐사지에서 수집한 탑과 부도를 14점이나 전시하였다. (사진에는 안흥사탑과 지광국사현묘탑이 보인다.)
건물내부에는 중앙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2실이 구성되어 있고 홀에는 경주남산의 약사여래상과 반가사유상이 놓여져 있었다. 홀 정면 4개의 진열장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금동불상들이 진열되어 있다고 小泉顯夫는 전한다.
총독부박물관에서 발행한 진열도감에 수록된 유물은 총 200점인데 漢, 唐과 관련된 유물이 38점이며 삼국시대, 고려때 유물은 152점이고 조선시대유물은 총 9점으로 조선시대 유물이 ‘이왕가박물관’과 마찬가지로 그 수가 현저히 적다.

Ⅴ이왕가미술관의 성립

덕수궁은 다른 궁과 달리 1900년대 러시아의 영향이 큰 시절에 건축한 건물이 많아 洋館이 다른 궁에 비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09년 준공되었다. 그 후 고종 재위시 외국사신등이 헌상한 각종의 진귀한 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고종과 순종의 서거 후 비워있던 덕수궁을 일제는 1933년 10월 1일부터 공개하고 이를 위해 석조전에 일본미술품을 진열해 놓았다. 석조전에서 일본의 근대미술이 전시되자 한국의 고미술품도 전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1936년 8월 새로운 미술관 건물의 건설에 착수하여 1938년 3월 준공되면서 창경궁내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미술품만을 골라 이관하고 이왕가미술관을 발족시켰다. [그림 Ⅴ-1 석조전 좌측건물이 이왕가미술관임]

광복 후에는 미 · 소 공동위원회, 국련(國聯) 한국위원단 등이 사용, 1950년 6·25전쟁으로 화재를 당한 것을 복구, 1953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박물관이 경복궁으로 옮기자 현대미술관에서 사용하다가 문화재관리국이 들어서기도 했다.

1936년 이왕가박물관을 덕수궁에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1938년 3월 31일 신축 미술관이 준공되어 창경궁에 있는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중에서 고미술과 공예에 속하는 것 (삼국시대 이래의 조각공예품, 도자기, 회화등)을 이전하고 창경궁의 舊이왕가박물관은 장서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송기형, 창경궁박물관 또는 이왕가박물관 연대기 P189
따라서 1938년 6월 5일 창경궁 ‘이왕가박물관’, ‘덕수궁석조전’, ‘덕수궁에 신축된 이왕가박물관’을 합쳐서 ‘이왕가미술관’이라 칭했다. 이는 귀국한 영친왕의 착상에 의해 영향을 받은 바 있다.
이 건물은 8실의 전시실을 중심으로 수장고(收藏庫) 강당 등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참작한 명실상부한 근대식 박물관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창경궁내 이왕가박물관의 1921년 관람기록을 참고해 보면, 동물원의 관람객이 약 24만 명, 박물관이 약 4만 명, 식물원이 약 2만 명인 것을 보면 박물관과 식물원이 동물원의 보조적인 기능에 머물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Ⅵ-1 오늘날 덕수궁]


이왕가미술관의 본관의 준공 후 경복궁내에 있던 조선총독부박물관과의 병립을 위해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라 칭하고 창경원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삼국시대 이래의 조각공예품 도자기 회화 그리고 조선출사 중국도자기 등 미술품을 골라 이관(移管)하여 전시한 후 6월 5일부터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이왕가미술관에서는 미술공예의 전문가로써 위원 평의원으로 위촉하고 전시활동을 계속하면서 도록(圖錄)들도 간행하였다. 총 소장품은 11,000점 내외에 이르렀다.
소장품이 이왕가박물관보다 적은 것은 미술품만을 옮기고 일부자료는 창경궁에 보관했기 때문이다.
신관은 3층이며 1층은 수장고와 사무실로 사용하고 2층은 총 4실인데 불상과 도자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3층은 기와, 회화 및 특별진열실을 두고 있었다.
‘이왕가미술관요람’에 의하면 조선 고미술과 공예의 최우수 걸작품만을 소장하였으며 특히 도자기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 고미술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 평하고 있다. 미술품 전시에 관한사항은 이왕가 예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져 있다.
“덕수궁미술관에 작년도 신관의 준공을 알림으로써 종래 창경원 안의 진열장에 있던 조선고미술품의 전부를 옮겨서 진열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석조전에 진열한 근대 일본미술과 함께 이왕가미술관으로써 시세에 대응하려 하였다.”

이왕가미술관은 이태왕과 이왕전하의 사후 설립된 것이지만 건물, 소장품, 운영규정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이다.

관람일시/ 덕수궁 및 이왕가미술관은 1월 4일~12월 28일까지 개관

개관시간/ 4.1~9.30;8시에서 17:00까지,기타 오전9:30에서 16:00

덕수궁관람료/ 5전( 5세미만은 무료, 학생단체 20인 이상 반액할인)

덕수궁,미술관/ 덕수궁포함. 이왕가미술관 관람 20전(소인 10전)

특별관람/ 연구 및 특별허가자를 특별관람이라 함. 1건당 50전

Ⅵ 結語

이상에서 이왕가박물관(창경원 혹은 창덕궁박물관)의 형성에서 이왕가미술관의 개관을 알아보고 일본이 총독부의 시정오주년을 맞아 조선물산공진회를 통해 수집된 미술품을 개최관중 하나인 미술관을 폐회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활용했음을 알아보았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경복궁내 약 13만평 궁성 안에「5보(步)의 1루(樓), 10보(步)의 1각(閣)」이라고 형용할 만큼 많이 있던 건물들이 민간불하(民間拂下)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헐려졌던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공진회의 명목으로 조선의 정궁과 근대식건물 위주의 공진회장 건물을 대비시켜 왕조의 권위를 훼손하고 일제의 시정오주년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면밀한 계획에 의해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관람을 하게 되었다.
폐막 후 경복궁내 미술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전용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전후를 기점으로 일제는 발굴과 유물수집에 열을 올리는 데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발표하게 된다. 이왕가박물관은 1910년에 창덕궁에 낙성하여 다음 해 개관하기에 이른다. 1912년 까지 총 소장품이 12,230점에 이르렀으며 소장품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했다.
1938년에 이르러 이태왕(고종)과 이왕전하(순종)의 사후 덕수궁의 신축 건물로 이전을 한다. 이로서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장서각으로 이뤄진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의 신축건물에서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 시기를 맞게 된다.
京城俯史에 의하면, 1931년 12월말 창덕궁박물관은 대지 2만평, 건평 700평, 연건평 1,200평이고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대지 4만 2천평, 건평 1,300평, 연건평 2,504평이라 한다.
물론 일제하 박물관이 이왕직미술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만이 대표적인 것은 아니다. 당시 조선의 민예품에 감동한 아사카와 다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예관>을 개관하기도 했으며, 1938년 성북동에 보화각(現을 간송미술관) 설립한 간송 전형필선생의 활동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암울한 일제시기에 송도고적(1945), 조선탑파연구(1948)등 조선미술사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개성박물관장 우현 고유섭 선생의 활동은 한국박물관성립의 기반이 된다. 이로써 해방 후 한국미술사의 2세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됨은 선학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편하였고 이왕가미술관은 1946년 3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어 존속이 되었다. 또한 국립박물관 (前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8년 문교부산하 기관이 되었으며 덕수궁미술관은 구황실재산총국(1961년에 문화재관리국으로 개편)소속이었다가 1969년 5월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편입이 된다.
이로서 본고에서는 한국박물관의 효시인 이왕가박물관의 명칭에 대해 알아보았고 비록 친일적 세력에 의해 추진이 되어왔지만 이왕가박물관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또한 풍전등화와 같은 韓末期 박람회가 근대 박물관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는 동일선상에 있는 운명임을 생각할 때 이왕가박물관, 미술관, 조선총독부박물관등의 근대 건축물이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비단 과거의 건축물의 보존이란 물질적 아쉬움뿐만 아니라 미래와의 연장선상에 있는 단초가 되지 못해 아쉬움이 더욱 크다. 과거는 과거로만 기억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중 일부라는 대국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민족이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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