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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慈庵(寺)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 연구



        
            
     大慈庵(寺)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 연구

                                                                        차문성


                                            
              〈목  차〉
Ⅰ. 머리말
Ⅱ. 傳대자암(사)지의 위치비정과 그 특징
  1. 대자암지의 현황과 발견경위
   1) 현황과 주변경관
   2) 대자암지 발견일지와 수습유물
  2. 대자암의 명칭과 특징
  3. 기록을 통한 대자암의 추정유물
Ⅲ. 성녕대군 묘의 조성과 대자암 건립의 역사적 고찰
  1. 성령대군 묘의 조성과 대자암 건립배경
  2. 대자암에서의 천도의식과 왕실행사 주요일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고양시 벽제읍 대자동에는 조선 초기 왕자 및 종친들의 묘소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그 중심에는 최영장군의 묘와 태종의 4자 성령대군의 묘가 인근에 조성되어 있다. 성녕대군 묘 주변에 여러 君墓가 있지만 그 중에도 성녕대군 묘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고 다음으로 연산군 대와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성령대군의 묘 주변에 조성되어 있다.
성령대군묘의 진입로에는 현재 大慈社라는 사당이 건립되어 있고 신도비가 사당 내 비각에 모셔져 있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능에 관한 글을 써오면서 이곳을 지날 때면 으레 성령대군 묘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되어진 원당 대자암의 위치에 관심을 두어 왔으나 그간 찾지 못하다가 마을 어르신들과의 대화 중 절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곳은 최영장군 묘 진입로와 경안군 묘소 사이에 있는 목사님의 사택(유치원)이었다. 사택 옆의 경안군 묘소 아래 넓은 공지가 주변의 낮은 야산에 둘러져 있고 드문드문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고양시자료, 고지도에도 조선초기의 사찰 대자암의 존재를 의심할 바 없으나 그 위치에 관한 기록이 소략하여 현재 정확한 위치비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자암은 조선 초기 흥천사, 흥덕사, 진관사 등과 함께 한성인근에 있는 왕실의 원당이나 제례의식을 담당하는 사찰로 조성되어 노비와 寺院田을 부여받고 각종 부역과 세금의 면제를 받는 혜택을 입어 당시 숭유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조선초기에는 유불의식이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으로 사찰이 왕실과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기 위한 방법은 왕실의 상례. 제례의식을 주관하고 능침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흥천사가 신덕왕후, 흥덕사가 신의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지정된 것처럼 대자암도 성령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지만 필자는 논고에서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 째, 조선 초기 사찰이 공식적으로 왕실과 사대부에 배척되어 온 사회적 배경과는 달리 돈독하게 왕실의 비호아래 유지해 온 것은 원당(원찰)과 왕실제례라는 특수성에 기인하여 고승의 명성이나 규모에 의존하기보다는 종친과 궁방에서 제례의식과 묘소 수호를 위한 방편으로 한경(한성)과 개경을 연결하는 의주로의 한 지점에 대자암을 조성한 사실이다. 두 번째로는 조선중기 이후에 사저를 사찰이나 재실로 조영한 예가 없지 않지만 조선 초기에 자식이 없는 성령대군의 사저를 사찰로 조영한 것은 시원적 사례로써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는 사찰 터가 최영장군의 묘소 진입로에 자리 잡고, 우측의 넓은 터에는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소가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사료에 입각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본고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불교사 연구가 타 영역에 비해 미진하고 특히 왕실사찰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왕실의 전격적 후원을 받은 원찰로서의 대자암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태종에서부터 임진란 전까지 중창을 거듭한 왕실사찰의 원형 복원이 가능한 일일 것이며, 이를 통해 대자암지는 조선 초기 사찰이란 한정된 시기의 타임갭슐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Ⅱ. 傳大慈庵址의 위치비정과 그 특징

1. 傳대자암址의 현황과 발견경위

  1) 현황과 주변경관
  고양시에서 발간한 문화재 지적도에는 ‘傳大慈庵址’로 기재되어 있지만 지적도상의 위치는 현재 본고에서 제시한 지역이 아닌 성녕대군 묘역주변에서 최영장군 묘 입구의 개울을 건너기 전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지표조사에 의해 확인된 것이 아니라 성녕대군의 묘역과 신도비를 기준으로 하여 전주이씨 소현세자파(경안군 종친소유 지역) 종약회 및 구전으로 내려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지적도에 기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2005년부터 옛길조사를 위해 서울에서 고양 벽제관에 이르는 길과 파주 혜음령, 쌍미륵, 분수원 등 의주로 길을 조사해왔는데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올림픽기념공원(대자동)을 지나 대자산을 넘어 고양향교, 벽제관에 이르는 길을 자주 이용하였다. 그런 이유로 30여 곳 왕친의 묘역이 대자산에 집중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당시 창건된 대자암의 위치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는데 지적도에 기재된 것처럼 성녕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찾았지만 절터라고 확증할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도비가 있어 그 주변지역에 있을 것으로 짐작하던 중 마을회관에 계신 지역주민(윤석후)에게서 절터였다고 구전되는 지역을 소개받아 찾아간 곳이 최영장군묘 진입로 우측에 있는 舊유치원 자리(사택)였다. 그 지역은 산의 경사면과 가까운 단점이 있어 사찰의 입지로 적당하지 않아 중심축이 형성될만한 장소로 경안군묘역이 눈에 띄었다.(2008년 6월) 경안군 묘역은 이전부터 자주 찾던 곳으로 묘역 앞은 성인 키 반절만큼이나 자란 풀이 무성하여 옛 경관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찰의 위계질서가 갖춰진 풍경과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진 주변경관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최영장군의 진입로 좌측에 흐르는 맑은 물이 대자천과 만나 절터로 추정되는 지역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소현세자의 3자인 경안군 묘역은 향토유적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경안군의 묘가 언덕 위 제일 높은 곳에 벽돌로 된 곡장을 둘렀으며, 그 아래 중간 우측에 임성군 묘, 맨 아래 임창군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7월초 경에 이곳을 둘러보니 무성한 풀이 베어져있고 밭의 일부가 평탄해져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사현장을 살펴보니 조선시대 기와 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7월 10일경에는 밭의 경지가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우측 편에는 물을 빼기 위해 도랑이 아래 논까지 연결되었다. 7월 19일 경 임창군 묘 옆에 있는 초석1개와 용도를 분간하기 어려운 부서진 기단석 2매를 확인할 수 있었다.  

    2) 대자암지 발견일지와 지표상 노출된 유물(수습)
  7월 초부터 나름대로 이곳이 대자암지란 가설 하에「大慈庵(寺)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연구」에 관한 학술논문을 준비하면서 조선 초 대자암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7월19일에는 와편 7조각 및 초석과 기단석을 찾으면서 가설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지만 이와 함께 공사는 일층 빠르게 진행되어 일부 경지가 건축물자재로 덮이게 되어 지표조사의 필요성이 긴급히 대두되었다.
7월 22일 필자(차문성)와 더불어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의 이명기, 장재희씨와 함께 주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와편 10여 점, 부서진 도편 30 점을 발견하여 다음 날 23일 대자암지의 발견 사실을 전화로 고양시청 문화예술과 (정성렬 계장), 문화재청 발굴조사과 (서울경기지역 담당 김응서)와 연합뉴스, 불교총무원 문화팀, 불교신문에 이 사실을 알리고 특히 문화재청과 불교총무원에는 필자의 학술논문 초고(역사적 고찰 부분은 완성)를 첨부하여 긴급히 이 지역에 대한 발굴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대자암지에 대해 기존에 인식하고 있는 2가지 오류 첫째는 성녕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표기된 지적도 상의 오류와 두 번째 대자암이 조선시대의 작은 암자였을 것이란 선입견을 수정하여, 대자암지가 경안군의 묘역 앞에 위치한 넓은 공지며, 왕실원찰 중 대찰로서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발견일지)    
  - 2008년 6월말: 마을회관에서 절터지역에 대한 소개로 주변경관 확인
  - 2008년 7월초: 경안군 묘역 앞 경지정리로 와편 일부 확인
  - 2008년 7월초: 필자 학술논문(대자암의 위치비정과 역사적 고찰) 저술시작
  - 2008년 7월19일: 초석 및 기단석 발견, 와편 확인
  - 2008년 7월22일: 瓦片 10여점과 陶片 저부 30점 수습 (분청인화문상감 등)    하여 사진 기록. (수습된 사금파리: 어골문 기와 잔편 십여점/고려청자로 보이      는 잔편 일부/인화문백토상감분청사기 저부 등), 백자 저부 잔편 십여점
  - 2008년 7월23일: 고양시청(전화)문화재청, 연합뉴스, 불교신문, 총무원(초고송부)
  - 2008년 7월24일: 불교신문(허정렬기자) 및 총무원 불교문화재연구소 김진덕 선      임연구원, 한욱빈, 주상호와 함께 현장조사 실시하여 기단석 유구 및 왕실용 제      기 일부 확인. 어골문, 격자문 등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 즉 14C와 15C에 걸      친 어골문, 격자문 등 여러 종류의 기와와 사기들이 발견되어(수습유물의 성격) 대자암의 위치를 단정하게 됨.  
  - 2008년 7월25일: 종친과 만나 현황설명 및 의견교환, 작은 목재 편 2점 확인

(대자암지의 현황: 7월 중순 장마로 인해 기와 유물층 일부가 노출되어 있음)
  - 조선시대 우물 및 샘터, 단층부분에서 부분적으로 소토가 발견되어 화재 추정.
  - 경안군 묘역 내 왕친묘 3, 숲속 2 총 5개의 무덤군이 주변존재
  - 전체지역을 6지역으로 나눠보면 A 지역에서 도자기 및 와편이 발견 및 당초문      이 새겨진 목재발견, B 지역인 묘역에 기단석 및 초석 발견, C 지역 유치원에      서 와편 다량 발견,  D지역에 와편이 도랑에 층위를 형성해 있음, E 지역 폐자      재로 덮혀 있음. F지역에서 조선초 못이 박힌 목재발견 및 20여년 전 종가집개      조를 하면서 폐기한 와편 및 조선시대 와편이 교란되어 발견 , G지역의 단층에      서 기반석과 아래 잡석이 일렬로 배열된 형태 발견, H 지역에서 와편 발견
    (사진 1 참조)



2. 대자암(사)의 명칭과 특징
  
  ‘사’와 ‘암’이라는 명칭만으로 사찰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을 국가의 기조로 하여 절의 조성 때는 사대부의 비판을 의식해 성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작은 원찰로 시작하였다. 이것은 한경과 개경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원경왕후의 신심과 결부되어 조선 초에 여러 왕대에 걸쳐 왕실의 대표적 원찰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대자사라는 명칭은 실록에는 세종 17년부터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규모로 볼 때 단순한 암자가 아닌 대찰의 규모를 이미 가지고 있어 대자사는 대자암이란 명칭과 혼용하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자사보다는 대자암이란 용어의 사용빈도가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찰명에 대해서는 발굴의 성과에 기대를 걸어볼 일이다.
이러한 대자암은 동 시대의 사찰과 비교하여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째 수도 개경과 한경을 잇는 의주로의 노정에 있는 고양현에 대군의 분묘와 원찰 대자암을 조성한 사실이다. 원찰을 두는 것은 태조의 건원릉에 개경사를 두어 조계종에 속하게 한 예가 있으나, 태조 때와 달리 대자암을 조성할 때는 수도가 개경에 있어 능묘와 종묘제례(당시 한경에 위치)때 개경과 한경을 오가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고 정종 때 관청이 이원화되어 기존 수도의 기반시설과 관리들의 이동에 역제, 비용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수도의 이원화는 외관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태종은 성녕대군이 죽기 전 이미 환도의 계획을 세워 장차 수도를 한경으로 옮긴 후 반나절에 해당하는 (1박 지점) 근거리에 대자암을 계획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녕이 졸한 해에 대자암의 조성과 환도를 동시에 계획한 것을 보면 성녕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이후 세자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했을 것이다. 먼저 태종의 막내 성녕에 대한 애정과 중전 원경왕후의 개인적인 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태종은 대자암을 조성하기 전 진관사(구파발)에서 행한 수륙재에,  “아아! 슬프다. 나와 중궁(中宮)이 너의 죽음을 통곡하나 또한 이제 그만이로다. 너는 효성으로써 죽음에 임하여서도 어버이를 생각하였으니, 한을 먹음이 구천지하 에서도 그만둠이 있겠는가? 너는 나의 아들이 되어서 이미 효도하고 또 재주가 있어,  자식의 직분을 싫어하지 않았다. 목숨의 길고 짧은 운수는 실로 하늘에서 나오고 너의 죄는 아니니, 네가 그것을 어찌 한하겠느냐? 나는 너의 아비가 되지만, 염(좳)에서 의금  (衣衿)을 볼 수 없었고, 빈(殯)에서 그 관(棺)을 어루만져 보지 못하고, 무덤에서도 또  그 광(壙)에 반드시 임석(臨席)할 수도 없으니, 천승(千乘)의 군주(君主)로서도 도리어 필부(匹夫)의 자식 사랑함과 같지 못하도다. 내가 정을 잊어서가 아니라 사세(事勢)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내가 한(恨)하는 것이요, 그것이 또 어찌 극위(極位)이겠는가?”  (태종18년 3월3일, 변계량 찬)

이처럼 태종 자신은 자식의 염과 빈청, 무덤에 임석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필부의 아비에도 미치지 못함을 비유하였다. 도첩제를 비롯해 불교에 대한 탄압을 여러 차례 시도한 태종도 대군 묘 옆에 대자암을 짓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고 불교를 신봉하는 원경왕후를 위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다. 태조 때부터 내원당과 여승이 기거하는 정업원이 왕실에 있어왔고 원경왕후의 사가는 일찍이 불법에 귀의하여 감로사를 비롯해 서울인근의 절에 시주를 해 왔던 터다. 더구나 원경왕후의 사가 형제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4형제는 태종에 의해 불충을 이유로 모두 죽게 되는데 2년 후 태종18년 넷째아들 성녕이 완두창(홍역)으로 죽게 되자 중전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경왕후는 죽기 전 성녕세자와 인연이 있는 대자암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그곳에 기거하기도 한다.
    임금이,
    “성녕(誠寧)이 졸(卒)한 것은 제 명(命)이 아니었다.” 하니, 이원(李原)이 대답하기를,
    “목숨의 길고 짧은 이치는 실로 하늘에 관계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너그러      이 하소서. 진실로 죽을 자라면 비록 의원(醫員)이라 하더라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근래 강회중(姜淮仲)의 처(妻)가 임신하였는데, 양홍달(楊弘達)이 배 가운데 덩어리가 생겼다고 생각하여 뜸을 떠서, 낙태(落胎)한 뒤에야 그가 아들을 가졌던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하였다. 박은(朴?)이,
    “승여(乘輿)가 옮겨 거둥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길이 어가(御駕) 를 돌이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오는 자도 있습니다. 원컨대, 환도(還都)하는 날을 정하여 인심(人心)을 하나로 해서 뜬말을 그치도록 기약하소서. 또 유후사(留後司)에서 길에 사모(紗帽)를 쓰는 것은 편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임금이,
    “여름이 지나서 환도(還都)할 계책이 이미 정하여진 것을 여러 대언(代言)이 함께 아는 바인데, 어찌하여 뜬말이 있는가?”
    하였다.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교지(敎旨)를 받들어 이미 군영(軍營)을 지었으니, 이것이 그 명백한 증험(證驗)입니다.” 하니, 임금이,
    “어찌 반드시 군영(軍營)이겠느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도 거기에 있다.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 유후사(留後司)도 또한 도읍지(都邑地)인데, 사모(紗帽)를 쓰고 길을 가는 것이 또 무슨 미편(未便)한 것이 있는가?” (태종 18년 4월1일)

    “방금 두 도읍(都邑)사이에 왕래하고 전수(轉輸)하는 신민(臣民)의 폐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殿下)께서 성녕 대군(誠寧大君)이 졸(卒)할 적에 상심한 바가  있으시고, 또 4월은 전하에게 액달[厄朔]이 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신 등은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났으니, 전하께서 신민(臣民)의 폐를 생각하고      기꺼이 환도(還都)하려고 함은 매우 융성한 거조(擧措)입니다. 반드시 7월 농한기 때를 기다려서 환도(還都)하여 신민들의 소망에 답(答)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기고 명하여 도총제(都摠制) 박자청(朴子靑)을 경도(京都)에 보내어, 옛      세자전(世子殿)을 수리하게 하였다. 유정현(柳廷顯)·이원(李原)·육조 판서(幽曹判書)·참판      (參判)·대간(臺諫)에 명하여 각사(各司)에서 진언(陳言)한 가운데에서 시행할 만한 말을      골라서 아뢰게 하였는데, 속히 환도(還都)하기를 청하는 것이 가장 많으므로, 임금이 이 달 19일로 정하였다.(태종18년 7월2일)
  성녕대군의 죽음으로 잠시 논의가 중단된 환도계획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어 7월19일에 정비와 경빈이 개경을 출발하여 7월21일에 환궁하였다. 길이 좁아 농사에 폐를 끼침을 염려해 단계적 이전을 염두에 두어 태종은 7월 27일에 환도하게 된다. 정비 일행은 개경에서 출발하여 빠른 이동을 해 중간에 1박을 했는데, 도리도표(조선후기 발행)에 의하면, 개경-장단(40리)-파주 파평관(40리)-고양(40리)-한경(40리) 총 160리 길중 어디에서 숙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중간 지점인 파평관에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점심나절 고양의 벽제관에 도착해 저녁 무렵에 한경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초기 고양현에 벽제관(한성에서 40리길)이 정확히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1년 때 벽제관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벽제역은 이미 태조 때부터 사용하여 벽제역에서 사신이 머무르는 숙소를 이름하여 벽제관이라 칭한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벽제역에서 대자산에 이르는 길은 고양향교를 지나 고개 길 하나 넘으면 이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두 번째 특징으로 ‘이전복원’을 통한 대자암의 신속한 건립을 들 수 있다.
태종 18년 4월4일에 대자암이란 암자를 짓게 되는데 이때 사용한 ‘대자’란 명칭은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는 왕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경어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寺’가 아니라 ‘암자’란 호칭은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불사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寺의 사용은 권도로서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이유로 5월9일에 성녕의 장인인 성엄을 통해 불당의 일부를 완성하여 불사를 개최하는데 이는 결국 신축이 아니라 이전복원을 단행하게 된다. 성녕대군의 죽음과 관련하여, 대자암의 완성 전 수륙제를 진관사에서 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삼재를 비롯해 대부분의 제례행사를 대자암에서 행한 것만 봐도 환도의 계획과 함께 대자암의 빠른 완공을 염두에 둔 듯하다. 대군의 사저 이전을 통해 지금도 대자암이 양반가의 전형인 99칸 대찰로 구전되고 있으며, 성령대군의 사저를 사찰로 조영한 것은 조선시대의 시원적 사례로써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사찰 터가 최영장군의 묘소 진입로에 자리 잡고, 우측의 넓은 터에는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소 등 총 5구에 달하는 무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찍이 최영장군은 고봉현 등 여러 곳에 유배를 한 후 죽음을 당하게 된다. 사지가 찢겨 그의 머리는 고양현에 있는 부친의 무덤 아래에 묻혔다고 전해지나 사료를 통해 정확히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최영장군의 무덤은 접신을 구하는 무당들이 찾는 장소로 이름이 높아 한때 이름 있는 무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안군을 비롯해 나머지 3기의 무덤 역시 소현세자의 자손으로 죽음이나 유배를 당한 限 많은 왕친들의 무덤으로, 대자사는 허한 기운을 누르고 기운을 보충해주는 비보사찰적 개념도 포함해 이 장소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3. 기록을 통한 대자암의 추정유물

  대자암의 추정유물은 지표상에 드러난 것으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종손(이준기)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일대 땅은 농사 외에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여 유구의 발굴을 통해 추정유물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추정유물을 기록상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나열하면 첫째, 암자를 조성할 때 보현사에서 가져온 전단불을 들 수 있고 미타상과 나한상 그리고 문종 때의 중창을 통해 조성한 석가상과 관음상등의 다량의 불상과 보살상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무엇보다 왕실 원당(원찰)으로서의 조건은 왕의 어진과 위패의 봉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眞殿사원의 영향으로 조선초기에는 주로 어진을 봉안하다가 점차 후기로 갈수록 어진보다는 위패를 봉안하게 된다. 이는 어진각, 어영각, 위패각 등으로 불리었는데 태종, 원경왕후, 세종, 소헌왕후, 문종 등의 어진도 이 대자암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 번째로 화엄경과 법화경 등 경전의 봉안이 이뤄진다. 그런데 한글의 반포 3개월 전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게 되어 세종은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정음으로 번역하게 한다. 이 석보상절을 보고 지은 국한문 찬불가가 월인천강지곡일 것인데 이것의 판목이 봉안된 한 곳이 대자암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네 번째, 절에 달아놓는 등롱이 주옥으로 만들어져 있고 단청은 중국에서 수입하고 금벽으로 꾸민 극락전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더구나 안평대군이 쓴 해장전 벽화각은 천하의 명필이라 칭하고 있다. 다섯 째, 分사리의 기록을 통해 사리 탑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로선 논바닥 아래 어디쯤인가로 짐작할 뿐이다.  
  
(왕조실록 기록을 통한 대자암의 추정유물)
-세종 2년 8월9일: 보현사에서 가져온 전단불을 대자암에 두라 명함
-세종 2년 10월13일: 대비의 원을 이루기 위해 향과 축문을 하사
-세종 2년 10월14일: 법석을 베풀고 본궁에서 물품하사
-세종 3년 9월4일: 대비를 위한 법석에 옷[衣]·바릿대[鉢]·등롱(燈籠) 따위 기구는 모두 궁중의 재물을 들여서 준비.
-세종5년 5월6일: 대비를 위한 법석의 전지(傳旨)로 세면포(細쭜布) 7필, 상면포(常綿布) 28필, 정포(正布) 2백 52필, 저화(楮貨) 4백 장을 대자암(大慈菴)에 보냄
-세종28년 5월27일: 승도들을 크게 모아 경(經)을 대자암(大慈庵)에 이전하였다. 처음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이영서(李永瑞)와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을 명하여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금을 녹이어 경(經)을 쓰고, 수양·안평 두 대군(大君)이 내왕하며 감독하여 수십 일이 넘어서 완성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어 대군(大君)·제군(諸君)이 모두 참예하고, 이 회(會)에 모인 중이 무릇 2천여 명인데 7일 만에 파(罷)하였으니, 비용이 적지 않았다.
- 중들을 대자암(大慈菴)에 많이 모아서 전경회(轉經會)를 베풀었다가 7일 만에야 파회(罷會)하였다. 중이 대개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장설 관리(掌設官吏)가 분주히 접대하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며, 떡과 과일의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처음에 임금이 왕비(소헌왕후)를 위하여 주부(主簿) 강희안(姜希顔)과 수찬(修撰) 이영서(李永瑞)에게 명하여 금은(金銀)으로써 불경을 쓰게 하고, 불경의 거죽옷은 모두 황금을 사용하여 용을 그리게 하고, 또 주옥(珠玉)으로써 등롱(燈籠)을 만들어 그 정교(精巧)를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차 법회(法會)를 베풀어 전경(轉經)을 하였다. 소윤(少尹) 정효강(鄭孝康)은 평상시에 집에 있으면서 청정(淸淨)하기를 힘써서 중[僧]과 도인(道人)과 같았고, 또 안평 대군(安平大君) 부인의 종형(從兄)이 된 이유로써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상시 흥천사(興天寺)에 있으면서 무릇 불경을 쓰는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였다. 강희안과 이영서도 또한 모두 이마를 드러내 놓고 부처에게 절하였는데, 혹 조사(朝士)가 그들을 보면 부끄럽게 여겨 절하지 아니하였다.(세종28년 10월15일)

-세종 30년 9월29일: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기신재(忌晨齋)를 의례대로 대자암(大慈菴)에서 행하라.” 하였다. 대자암은 본래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종(李?)의 묘 옆의 재암(齋菴)인데, 종실(宗室)에 반부(攀附)하여 무릇 큰 불사(佛事)는 모두 여기에서 행하니, 시사(施捨)하는 곡식과 비단을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문종 즉위년 2월19일: 대자암(大慈庵)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다만 2간(間)뿐이니, 지금 부왕(父王)을 위하여 1간(間)을 더 짓고 석가(釋迦)·관음(觀音)의 두 불상(佛像)을 만들어 들여서 봉안(奉安)시키는 것 (결국 증축과 불경 조성함).
-문종 즉위년 4월10일: 신미(信眉)의 설(說)로써 대궐 안에 공장(工匠)을 모아 두고서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이룩하게 되는데,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일찍이 대자암(大慈庵)으로써 원찰(願刹)로 삼아서 여러모로 비호(庇護)를 베풀고, 임금에게 아뢰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헐어 버리고는 이를 새롭게 하면서 그 예전의 제도에 보태어 단청(丹靑)을 중국에 가서 구해 사고, 등롱(燈籠)의 채옥(彩玉)을 구워 만들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극도로 하여 절 이름을 극락전(極樂殿)이라 하고, 또 불경(佛經)을 간수할 장소도 건축하였다.
-문종 즉위년 9월17일:  대자암(大慈庵)의 극락전(極樂殿)이 완성되니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여 금벽(金碧)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이때에 와서 도량(道場)을 크게 베푸니 수양(首陽) 이하의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들이 그곳에 갔다.
-문종 즉위년 9월19일: 수양 대군(首陽大君) 등이 대자암(大慈庵)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청컨대 사리 분신(舍利分身)을 베풀어 정근(精勤)하게 하소서.”
하므로,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을 명하여 가게 했더니 분신 사리(分身舍利) 수매(數枚)를 얻어왔다.
-문종 2년 2월21일: 대자암(大慈菴)의 법회(法會)가 끝났다. 임금이 세종(世宗)의 대상(大祥)에 법회(法會)를 베푸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감독하게 하여 무릇 5일 만에야 끝나게 되었다. 승인(僧人) 8백 명에게 바릿대[?]·능라단(綾羅段)·황색 명주[黃紬]·가사(袈裟)를 차등이 있게 하사(下賜)하고, 외호승(外護僧) 2백 70여 명에게는 면포(綿布)를 차등이 있게 하사하였다.
- 세조6년 12월25일:  도적이 대자암(大慈庵)의 두 불상(佛像)의 복장(腹藏)을 훔쳤으므로, 명하여 도성문(都城門)을 닫고 수색하여 잡게 하였다.
-용재총화 제9권: 안평대군(이용)이 쓴 대자암 해장전 벽화각의 글자는 울연히 날아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니 훌륭한 보물이다. 지금 모화관은 제학 신장이 쓴 것인데 비록 이용만은 못하나 역시 볼만하고 우리 백씨가 쓴 경복궁 문전의 액자는 오로지 이설암을 모방한 것이지만 찬찬하고 법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긴다. 정국형이 쓴 창덕궁의 諸殿 諸門의 액자는 자체가 바르지 못하고 짜이지 못하여 어긋난 데가 많다.


Ⅲ. 성녕대군 묘소의 조성과 대자암 건립의 역사적 고찰  

  1. 성녕대군 묘역의 조성과 대자암 건립배경  
  
  대자암은 성녕대군이 졸한 지 불과 1주일이 지난 뒤 태종이 한경 인근에 불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불가함을 아뢰어 대신 성녕대군의 사저를 헐어 고양에 있는 분묘 인근에 원당을 짓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약 1개월 뒤 시호를 내리고(3월) 그 다음달 4월 대자암을 본격적으로 지으면서 신도비를 묘 입구에 세우게 했다. 당시 대자암은 신축이 아니라 성녕대군의 사저를 이전 복원하는 것이므로 보통 6개월 이상 소요되는 불당의 건립기간을 앞당겨 5월에 완공을 보고 성녕의 장인인 성억을 통해 5월 9일 대자암에서 불사를 마련하게 하였다. (글 말미에 있는 서거정의 시문에서 신도비의 위치와 묘소는 원 위치일 것으로 추정 함)   태종은 평소 성녕대군에 관한 일을 말할 때면 무척이나 애틋함을 표현하곤 했는데 이날도 성녕의 묘에 사제(賜祭)하게 한 뒤, 소경공이 평소 쇠고기(牛)와 닭고기(鷄)를 좋아했으니 삭망제에 종묘에 천신(薦新)하고자 하고 희생(犧牲)으로 닭을 쓰고자 했다. 그 해 4월 태종이 대제학 변계량에게 귀신의 이치를 묻자, “귀신은 본래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사지내면 와서 흠향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고, 그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귀신은 나의 정성과 공경에서 이루어져 와서 감응하는 것입니다.”라 하여 예에 정성을 다하고 후사(양자)를 정해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   마을 어른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대자사는 99칸 대찰이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아마 그의 사저를 이전 복원한 실록의 기록을 전해  들은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이 같이 사저를 헐어 사찰을 짓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재실을 짓는 경우는 빈번하게 이루어지는데 현재 파주 수길원의 재실터 역시 99칸 사저를 옮긴 경우라 한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이 많은 제재를 당하게 되는 때에 대자암에 대한 왕실의 은사는 상당한 특혜에 해당하였다. 태종은 비보사찰 70사와 그 밖에 상주승 1백명 이상의 사원을 제외한 모든 사원의 수조지를 폐지하고 노비는 各司와 一郡에 분속토록 하는 첫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의 전 치세에 걸쳐 사찰의 수는 격감하고 도첩제를 시행하여 승려들의 도성으로의 출입을 제한하는 한편 종파를 11종에서 7종으로 병합을 단행한다. 더구나 왕사와 국사제도도 폐지하고 고려 때부터 이어온 능찰의 제도도 폐지하게 된다. 세종 때에는 더욱 과감한 억불책을 시행하여 공인된 사찰을 242개사로 제한하고 세종 6년 선교양종으로 나눠 각 종 18개사 36개사만 공식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종과 세종, 문종에 이르기까지 대자암의 건립과 중수, 전답과 노비의 제공, 왕실의 제례를 행하기 위한 장소로써 대자암은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하사된 밭과 노비 외에 세종1년에 대자암에 밭 50결을 추가하고 승효사, 감로사에 속하는 노비 100명을 대자암에 주게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밭 250결(약 50-60만평)을 주었다고 하니 그 규모는 대자리 전체의 논밭과 주변의 산을 포함한 상당한 규모에 해당한다. 이는 왕조가 개창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수도를 이전하여 경기도 일대에 충분한 전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로 짐작되며, 왕친과 불교를 믿는 사대부가에서의 시주가 끊임없이 이어져 상주승도 무려 120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녕대군의 졸기와 대자암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 졸(卒)하였다. 종(褈)은 임금의 제4자(第四子)로서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왔고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행동거지가 공순 (恭順)하였으므로, 임금과 정비(靜妃)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 12세에 총제(摠制)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이 궁위(宮闈)를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진(瘡胗)에 걸려서 바야흐로 병이 심해지니, 신(神)에게 제사지내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祈禱)하였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이 의원(醫員) 원학(元鶴)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항상 종(褈)의 곁에 있으면서 자세히 방서(方書)를 궁구(窮究)하여 일찍이 손에서 놓지 않았고 친히 약이(藥餌)를 잡아 병을 구료(救療)하니, 양전(兩殿)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나이 14세였다. 임금이 철선(輟膳)하고 통도(痛悼)하여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예조 참판 신상(申商)과 공조 참판 이적 (李迹)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부정윤(副正尹) 이승(李昇)으로서 상(喪) 을 주장하게 하였다. 빈장 도감(殯葬都監)을 세워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 각 각 2원(員)이 그 상(喪)을 다스렸는데,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  에 의하였다. 이튿날이 지나서 미명(未明)에 그 영구(靈柩)가 돈화문(敦化門)으로부 터 나와서 사제(私第)에서 염빈(殮殯)하였다. 종(褈)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형제 간에 우애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활을 잘 쏘았으나 다른 기호(嗜好)는 없었다.(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 2월 4일, 1418)

    -대자암의 건립 제안
     임금이,
     “내가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을 주어서 절을 삼고자 한다. 그 대군(大君)의 옹주(翁主) 집은 궁궐 근처에 짓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대언(代言) 하연(河演) 등이 대답하기를,
     “집을 주어서 절을 삼는 것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도성(都城)안에서 집을 주어서 절을 삼는 삼는다면 그 종말에는 여염(閭閻)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니, 청컨대, 성녕 대군의 분묘(墳墓) 근처에 암자(庵子)를 지어서 중을 거주하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 2월 11일, 1418)

    -성녕대군 이종에 증시(贈諡)
     성녕 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에게 증시(贈諡)하여 변한 소경공(卞韓昭頃公)이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졸(卒)한 성녕 대군 이종은 위(魏)나라 종실(宗室) 풍도공(豐悼公)과 진(晉)나라 종실 요동 도혜왕(遼東悼惠王)과 송(宋)나라 종실 임천 무열왕(臨川武烈王)의 증시 (贈諡)한 예에 의하여 나라 이름을 아울러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어서 하교(下敎)하기를,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와 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의 시호도 또한 이러한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이종에게 증시(贈諡)하여 변한 소경공으로 하고, 정효공(定孝公) 이방우(李芳雨)에게는 진한(辰韓)을 더하고, 공정공(恭靖公) 이방의(李芳毅)에게는 마한 (馬韓)을 더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 3월 13일, 1418))

    -대자암의 건립과 신도비의 건립
     명하여 소경공(昭頃公)의 분묘(墳墓) 곁에 암자(庵子)를 짓게 하였다. 분묘는 고양 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에 있었는데, 암자를 대자암(大慈菴)이라 이름하고  노비 20구(口)와 전지 50결(結)을 붙이었다. 명하여 전 도총제(都摠制) 조용(趙庸)에게 묘지(墓誌)를 짓게 하고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게 하고, 직예문관(直藝文館) 성개(成槪)로 하여금 이를 모두 쓰게 하였다.성개에게 흑마포(黑麻布)·백저포(白苧布) 각각 2필씩을, 각수(刻手) 김유지(金有知)·중[僧] 명호(明昊) 등 3인에게 쌀과 콩 아울러 10석을 내려 주었다.(4월4일)

    -소경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대광보국성녕대군변한소경공신도비명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찬자 변계량 영락(永樂) 16년 무술년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측근 신하가 왕지(王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녕대군 종(種)이 죽었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또 아들도 없으니, 그를 슬퍼하는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그의 무덤 길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여서 조금이나마 그의 구천(九泉) 아래에 있는 정혼(精魂)을 위로함이 있게 하고, 또 나의 무궁한 슬픔을 막게 하라.” 하였다. 신(臣) 계량은 엎드려 명령을 받들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대군의 휘는 종(種)이니, 세자(世子)의 동모(同母) 아우이며, 형제의  차례로는 넷째이다. 을유년 가을 7월 임인일에 낳다.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치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잡스런 장난에는 담담히 좋아하는 바 없으니, 왕과 왕후 양궁(兩宮)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또 활쏘기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되니, 장년이며 능한 자도 다 그를 추중(推重)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에까지도 다 도리를 얻어 모든 것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전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 기거하고 음식 먹는 데까 지도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갑오년 정월에는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고, 정유년 9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의 위계(位階)를 주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좌군 동지 총제(左軍同知摠制) 성공(成公) 휘 억(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금년 정월 19일에 병이 드니, 양궁께서 근심이 극심하여 기도하고 구료(救療)하고 약쓰는 등의 일을 성심껏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졸하자 매우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다. 종친(宗親)과 모든 신료들과 아래로 노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 없었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위의 말씀을 올리고, 또 수라 들기를 청하니, 이튿날 다만 죽을 올리라고만 명령하였으며, 정사 보는 것을 3일 동안 중지하였다. 그때 전하가 애통해함이 지나쳐서 몸과 기운이 조금 평안치 못하게       되니, 기로(耆老)들과 대신들이 고기 반찬을 드시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두 번 세 번 더욱 부지런히 주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고, 소찬(素饌) 으로 30일을 마쳤다. 대군 변한국공(大君卞韓國公)으로 추봉(追封)하고 소경(昭頃)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주무관(主務官)이 장사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해 4월 을유일에 고양현(高陽縣)의 북쪽 산리동(酸梨洞) 진방(震方)의 산기슭에 장사 냈다. 그의 제 택(第宅)에 사당을 세우고 또 후사(後嗣)를 세워 그의 제사를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사하고 제사하는 예는 대체로 유감됨이 없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는 아들이 되어서는 어버이에게 그의 효도를 다하고, 아 버지가 되어서는 아들에게 그의 자애(慈愛)를 다하였다. 지금 대군(大君)의 상사에 성심은 간절하고 지극하며, 애통해함은 다함이 없고 생각하는 것은 깊고 멀어서 근본과 결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것은 비록 타고난 천성의 덕에서 나왔지만 인륜의 도를  지극히 한 것이다. 아니면 또한 대군의 자질과 품성이 우뚝하여 행동과 실지가 서로 맞기 때문에, 전하의 사랑함이 이와 같이 지극함을 얻은 것일 것이니, 대군은 어지시었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았으니 아,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이 일찍 이 《논어》를 읽다가 공자 같은 성인도 먼저 죽은 아들 이(鯉) 때문에 우는 일을 면치 못한 것을 진실로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소경(昭頃)이 졸하니, 하늘의 혼은 또 바르지 못한 것도 있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쓰노라.
      명에 이르기를,

      소경의 자질은 / 昭頃之質
      옥같이 깨끗하고 볕처럼 온화하다 / 玉潔陽和
      소경의 행실은 / 昭頃之行
      효도하고 우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 孝悌柔嘉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 敏而好學
      양궁의 권애함이 더함이 있었다 / 眷愛有加
      하늘은 어찌하여 덕을 부여하고 / 天胡賦德
      수명은 빼앗는가 / 而奪之年
      아, 성스러운 아버지여 / 嗚呼聖父
      슬픔이 천지에 가득하네 / 痛彌天淵
      진실로 바르지 못함이여 / 信乎靡定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 孰便其然
      품질을 높여서 그를 봉군하고 / 崇秩其封
      후사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네 / 立後以祀
      해와 달은 이미 밝고 / 日月旣良
      산과 시내는 아름답도다 / 山川其美
      그의 몸 그윽하게 감췄으니 / 其藏其密
      길이길이 평안하리라 / 其永寧哉
      묘도에 비 세우고 명을 새겨 / 刻銘墓道
      슬픔을 밝히노라 / 用昭厥哀

      하였다. (서거정의 동문선 제121권 碑銘)

    -문종대의 대자암 증축 주장
     임금이 진관사 개축이 불가한 이유를 글로 지어 보이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대간(臺諫)을 불러와서, 불경(佛經)을 베껴 쓰고 절을 짓는 일을 정지시킬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라.”
     하니, 이계전(李季甸)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그들에게 간(諫)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옳지 못한 듯합니다. 신 등은 생각       하기를, 대자암(大慈庵)의 역사는 정지시키고 진관사(津寬寺)에 공력을 합쳐서 짓는 것   이 옳겠습니다. 진관사(津寬寺)는 곧 태조(太祖)께서 조선(祖先)을 위해서 창건했던 것이고, 역대(歷代)의 조종(祖宗)께서도 그대로 두셨는데, 지금 이것이 무너지고 부서진 이유로 고쳐 짓는 것은 의리에 해로움이 없으니, 누가 감히 의논해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집현전(集賢殿)과 대간(臺諫)에서도 또한 말하지 아니하니, 임금이 이에 진관사(津寬寺)를 짓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뜻을 손수 써서 보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진관사(津寬寺)를 짓는 일이 옳지 못한 것이 네 가지니, 비록 새 법당(法堂)을 짓더라       도 이전 절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큰 불사(佛寺)를 능히 지을 수가 없는데, 지금 나라의       힘은 몇 해 안에는 준비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진관사(津寬寺)는 항상 거(居)하는 중 이 본래부터 적으니, 만약 새로 만든 불상(佛像)과 새로 인쇄한 불경을 둔다면 도적을 방비하기가 어렵게 된다. 지금 나라의 힘이 반드시 1백여 명의 중으로 하여금 항상 그 곳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다. 진관사(津寬寺)는 비록 오늘날이 아니더라도 그전에 이미 다시 창건할 것을 정해 놓고 나라에서 이미 재목과 인력(人力)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렇다면 오늘날에 부왕을 위해서 추천(追薦)한 공덕(功德)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진관사를 지어 새로 이룩한 불경(佛經)을 간수한다면 이는 대자암(大慈庵)을 부정(不淨)한 것으로 여기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일에 있어 왕비(王妃)를 위해 이룩한 불경도 또한 진관사로 옮겨 둔 후에야 옳겠지마는, 그러나 일찍이 부왕의 교지(敎旨)가 있었으니 옮길  수가 없다. 이미 옮길 수가 없다면 지금 이룩한 불경도 또한 마땅히 대자암에 모아 두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지금 만든 불상(佛像)도 또한 마땅히 대자암에 모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법당(法堂)을 이룩하였더라도, 이미 새로 만든 불상과 새로 이룩한 불경을 간수하지 않는다면 부왕을 위하여 추천(追薦)한다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대자암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두 가지이니, 태종(太宗) 이후로부터 유교(遺敎)가 없지  않았으며, 또 부왕의 감식(鑑識)으로써도 일찍이 보호할 생각이었던 절이었다. 지난 병인년 겨울에 부왕께서 명령하시기를, ‘태종 양위(兩位) 분의 시식(施食)과 나의 후사(後事)까지를 모두 대자암에서 이를 행하라.’고 하셨으니, 이 까닭으로 쌀 3백 섬으로 보장 (寶長)을 삼고, 또 이룩한 불상(佛像)과 불경을 모두 대자암에 간수하도록 하였다. 병인년에 추천(追薦)하는 일을 이미 대자암에서 행하였으며, 부왕(父王)의 감식(鑑識)은 성녕 재궁(誠寧齋宮)으로서 싫어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은 물이 없는 것을 의심하였지마 는, 그러나 지금 새 샘물이 바위 아래에 생겨나서 불공(佛供)에 넉넉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성억(成抑)의 무덤에 가까운 것을 의심하였지마는, 그러나 부왕의 교지가 일찍이 정해져서 그 곳에 장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또한 가까운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된것이다.
    지금 법당(法堂)을 새로 창건하는데 중지할 수가 없는 것이 두 가지이니, 지금 이룩한 불경과 지금 이룩한 불상과 지금 인쇄한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은  대자암 안에서 간수할 만한 집이 없는 까닭으로 부득이 더 짓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 당당(堂堂)한 불전(佛殿)을 부수는 것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러나 부수지 않고서 새로 짓는다면 지금의 역역(力役)이 더욱 더 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부수고 부수지 않는 것은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사사 계교(計較)에 달려 있을 뿐인데, 나라에서 어찌 관여하겠는가? 병인년에 추천(追薦)한 일은 부왕의 감식(鑑識)으로 왕비(王妃)를 위하여 정리(情理)를 억제함이 많아서 그 재력(財力)을 감히 마음대로 쓰지 못하였지마는, 지금은 신자(臣子)가 우러러 선왕(先王)을 위한 일이니, 병인년(1446 세종 28년.)의 추천(追薦)함에 비해서는 마땅히 더함이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여 이 삼간(三間) 법당(法堂)으로서 더한 것이 있다고 인정할 뿐이요,  이외의 것은 한결같이 병인년의 규식(規式)에 의거하였으며, 등롱(燈籠)은 지금 또 새로 만들지는 않겠다.”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후일(後日)에 대간(臺諫)에서 오면 아울러 이 뜻을 설명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경오(1450, 3월1일)  
    
   -중종대의 대자암 중수
    홍문관(弘文館)에 전교하기를,
    “대자사를 수리하는 일은 대비전에서 하시는 일이니 내가 아는 바 아니다.”
    하매, 홍문관이 회계(回啓)하기를,
    “상께서 아시는 일이 아니라면, 곧 수리하지 말게 하여 뭇사람의 의혹을 푸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비전에서 하시는 일을 내가 어떻게 권하며 어떻게 막겠는가.”
    하므로, 또 아뢰기를,
    “외인(外人)이 어찌 그것을 가려 내겠습니까? 상께서 대비전에서 하시는 것인 줄 알면서 말리지 못하신다면, 스스로 하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였다. (중종3. 1508. 5.7)

    “정인사(正因寺)가 불탔기 때문에 두 능(陵)을 위하여 대자사(大慈寺)를 수리하는 것인      데 이제 옳지 않다고 하므로 대비전(大妃殿)에 여쭈었으니, 수리하지 말게 하라. 양가(兩加) 문제는 정원(政院)이 전후 사정을 알며 또 내 뜻을 알면서도 이처럼 아뢰나, 일을 말하는 것은 정원의 소임이 아니고 오직 왕명을 출납할 따름이거늘, 요사이 보면 일이 크건 작건 대간이 아뢰어서 허락받지 못하면 홍문관(弘文館)이 아뢰고 정원도 아뢰니,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내 그것을 묻노라. 그리고 대자사를 수리하지 말게 한 일을 태학생에게 말하라.”(중종3년 1508년, 5월7일)
     *정인사: 세조의 세자 덕종(경릉)이 요절하자 1459년 왕명으로 창건한 절

2. 대자암에서의 천도의식과 왕실행사 주요일지
  수록서명저자기사동문선 제81권
(만덕산백련사중창기)서거정태종께서 일찍이 치악산 각림사를 지으시고 대회를 베풀어 낙성하는데 선사(천태영수 도대선사 행호스님)의 명망을 듣고 불러서 그 자리를 주장하게 하였고 또 장령산 변한 소경공 묘소 곁에다 선사의 명망을 듣고 명하여 주지를 삼았다.(초대 주지 행호 도대선사)신증동국여지승람
고양군대자암:대자산에 있다. 서거정의 시에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절안에서 고승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 기우는 날에 전조의 능을 조상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마소. 다락집 오르니 한이 많네.”하였다.춘정집변계량金書法華經書: 위의 불경한부는 주상전하께서 황비 원경왕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이다. 태후께서 소경공의 명복을 빌기위해 대자암의 곁에 전각 한채를 건립하여 나한을 안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시자 전하(세종)께서 슬픔을 금치 못한 끝에 전각을 건립하라고 명하셨다. 그 전각이 준공되자 중앙에 미타 한구와 석가 및 18나한을 안치하고 또 법화경이 완성되자 그 곳에 보관해 두고 신 변계량에게 서문을 쓰라고 하였다. 용재총화개경 안화사에 갔을 때 전액을 보니, 바로 송나라 휘종이 쓴 것이요.(중략) 안평대군 이용이 쓴 대자암 해장전 백화각 의 글자는 울연히 날아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니 또한 휼륭한 보물이다. 우계집성  혼함양리에서 대자사에 도착했는데 두통과 치통과 이질이 한꺼번에 발작하였습니다. (우계집 속집 제3권 ‘송운장에게 보내다)1580년)  수록문서명날짜기사조선왕조실록태종18년2월4일성녕대군의 졸기태종18년2월11일성녕대군의 집을 절로 삼고자 함3월3일동부대언 성엄에게 진관사에서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3월10일서운관에 명해 성녕대군 장일을 고르게 함.3월13일성녕대군에게 증시하여 변한 소경공이라 함4월1일임금(태종)이 성녕이 졸한 것과 환도할 계책을 말함4월4일소경공의 분묘 곁에 암자를 짓게 함(노비20구,전지50결)5월9일경승부윤 성억에게 불사를 대자암에 마련하게 함세종1년12월13일대자암에 밭 50결을 더 주게 함세종1년2월22일감로사의 노비100명을 대자암에 주게 함세종2년7월29일삼재를 대자암에서 베풀음7월29일상왕이 본궁의 재물로 승당을 짓게하라 함세종2년8월19일보현사에서 가져온 전달불을 대자암에 두라 명함10월13일대자암 법석에 향과 축문을 전함(대비의 원 축원) 세종6년4월5일불교의 혁파로 선교양종으로 나눔. 각 18개사 총 36개사만 남겨 두가는 예조의 계. 이와 관련하여 고양의 대자암은 원속전이 152결96복에 97결4복을 더 함. 거승은 120명.세종2년7월8일대자암 지계승 21인을 부름세종28년5월27일승도를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함: 성녕대군의 집에서 금을 녹여 경을 쓰고 수양, 안평 두 대군이 내왕 감독하여 완성되고 법석을 베품, 이때 모인 승려만 2천명이 넘음.세종30년9월29일소헌왕후 기신재를 대자암에서 거행문종즉위년4월25일대자암의 중수문종1년2월7일좌부승지(左副承旨) 이숭지(李崇之)를 대자암(大慈庵)에 보내어 불사(佛事)를 베푸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15일부터 세종을 위하여 크게 도량(道場)을 베풀고 추천(追薦)하였는데, 승도(僧徒) 1백 8명이 의발(衣鉢)을 시주하고 5일 만에 파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날마다 돌려가면서 감독하게 하였다.9월17일극락선의 완공: “극락전이 완공되니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여 금벽이 햇빛에 번쩍 거렸다. 이 때에 와서 도량을 크게 베푸니 수양이하의 대군과 여러 군들이 그곳에 갔다.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고양현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성산(城山)【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劍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봉현(蜂峴)이다.【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 대자사(大慈寺)【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 50결을 주었다.】 압도(鴨島)【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갓[草場]이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傳대자사 터에 관해 조선왕조실록과 문집을 중심으로 역사적 고찰을 살피고,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알아보기 위해 주변경관에서의 키워드를 나열해 내력 및 현황을 파악해보았다. 그 키워드는 성녕대군 묘와 신도비, 옛 교통로, 대자천명, 대자사터의 명칭과 유래, 종친묘의 조성 등으로 하여 위치의 비정과 일부의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졸고를 정리하면, 대자암은 성녕대군의 원찰로 조성되어 한경에서 40리 지척에 두고 성녕대군, 태종, 세종, 소헌왕후, 문종, 세조 등 왕실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찰의 혜택을 누려왔다. 대자암은 사원전을 포함하여 250결의 대규모 사찰로 상주승 120명과 노비 수 백명이 거주하는 절로서 한 때는 2천명의 승려가 함께 모여 법석을 주관하기도 하여 끊임없이 왕실과의 유대관계를 맺어온 사찰이다. 더구나 분신사리탑의 조성과 묘향산 보현사의 전단불의 이전, 어진과 불경의 봉안, 조선초 도대선사를 지낸 행호스님이 초대주지를 지내고 신미대사의 설법 등 대찰로서의 근거는 이미 충분하게 확인하였다. 이러한 왕실원찰로서의 대찰이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지표조사만으로 알 수는 없다. 명종 때까지 실록에 대자사가 기록되고 있어 다만 임진란 벽제관 전투 때 불에 탔을 것이란 것과 왕실원찰 혹은 승병의 거병이란 이유로 왜군에 의해 훼손되었을 개연성이 크다는 추측뿐이다. 이것은 대자암지 기단석이 드러난 단층 위 燒土(불에 탄 붉은 흙)층과 일부 산화된 붉은 기와가 드문드문 발견되는 점에서 이를 방증하고 있다.
  논밭이 일부 메워진 지금 뉴타운 이주민의 이주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어 그 원형을 상실할까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땅의 소유주가 적정한 수준의 발굴(부분발굴)에 동의하고, 이미 본인과 함께 절의 유구를 확인한 조사자(불교문화재연구소)가 왕실원찰의 근거를 제시하여 조선 초 찬연한 불교의 중흥을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밝혀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문화재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의지만이 남아 있다고 본다.   이 글을 통해 미처 다루지 못한 건물지의 구성, 탑지의 확인, 와당과 도편의 성격에 대해서는 발굴이 차후 진행된 후로 미루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이 조선 초기 왕실원찰인 대찰 대자암(사)의 원형을 연구하고 빠른 시간 내 이 일대를 긴급발굴(가지정)하여 땅 밑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서거정의『대자암에 쉬었다가 임진으로 향하다』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산중에 파리한 말을 채찍질하여 / 山中策羸馬
절(대자암)에 들렀다 고승과 작별했는데 / 寺裏別高僧
숲은 빽빽해 구름과 함께 어둑하고 / 樹密雲俱暗
모래는 깨끗해 물이 절로 맑구나 / 沙明水自澄
황량한 비탈에선 옛 비갈(성녕대군의 신도비로 추정)을 찾고 / 荒陂尋古碣
석양 아래선 전대의 능을 조문하네 / 斜日弔前陵
괴이타 마소 가을 슬퍼한 길손은 / 莫怪悲秋客
누대에 올라야 한을 토로한다오 / 登樓恨可憑



(참고문헌)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0,
탁효정, 「조선후기 왕실원당의 유형과 기능」,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
불교신문사, 『한국불고사의 재조명』, 불교시대사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단종실록/명종실록』
성현, 『용재총화』
서거정, 『동문선』
이행 외,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도로공사, 『한국도로사』,1981
변계량, 『춘정집』
성혼, 『우계집』
서거정, 『사가집』
고양군지편찬위원회, 『고양군지』, 1987
『고양시 문화재지적도』
                                  


                                   부록    

사진 1: 위에서 바라 본 (임창군 묘) 대자암지 전체 전경 (아래 민가가 보이는 지역에 대자천이 흐르고 우측에 유치원과 최영장군 묘 진입로가 있다)
사진 2: 부서진 도편 및 와편 - 맨 아래 가운데 20센티 정도 되는 사금파리가 분청인화문상감이며 우전문이 14C 즁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됨.  


사진3 : 아래 잡석과 중단의 기단석이 일렬로 노출되어 있고, 기단석 위 소토가 드문드문 보여 불에 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사진 4 : 도랑에 흩어진 기와와 도편. 이 중에 일부 화재로 산화된 기와편도 보인다.사진 5: 부서진 목편2점 (상단 30센티: 옆면에 당초문이 음각되어 있음. 하단: 우측에 끝이 둥그런 조선 못이 박혀있고 붉은 가루가 떨어져 단청 칠이 된 것으로 추정됨.)  



사진 6: 대자암지의 드러난 기와층  



(2008-10-22 17:18:28)  
본 기고문은 대자사를 발견하고 이를 검토하기 위해 작성된 학술논문의 성격으로 고양시, 경기도, 문화재청에 제출되어 현재 발굴을 검토중에 있음. 또한 사진과 자료는 연합뉴스 및 불교신문에 제공하여 신문기사화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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