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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5 20:42:40, Hit : 4176, Vote :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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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대자동 ‘왕자의 계곡’(Prince's Valley)에 위치한 경안군


-2편: 드라마 추노, 심도있게 보는 법-
[답사지: 경안군묘-임창군묘-임성군묘-밀풍군묘-소현세자를 모신 명나라 시녀 굴씨지묘

대자동 ‘왕자의 계곡’(Prince's Valley)에 위치한 경안군 묘역(경안군 집안의 대자사터 정착배경)

                                    소창박물관 운영자 차문성 씀
                                     2010.2.14


대자동 왕자의 계곡

이집트 남부 서안 룩소르에 가면 18왕조에서 20왕조에 이르는 유명한 파라오의 무덤이 있다. 투트모스 1세, 람세스와 투탕카멘의 묘가 있는 곳을 ‘King's Valley’라 부르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왕비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지하묘로 만들어진 무덤 내 대부분의 유물은 수 세기에 걸쳐 도굴의 대상이었으나 세기적 발견인 젊은 왕 투탕카멘의 묘에서 3,500여점 이상 진귀한 유물이 발견되어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세기적 관심이 집중된 이집트 왕가의 묘는 나폴레옹시대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의 식탁과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놀라움의 상징이었다.
이와 비견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조선왕릉이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동록된 사실은 실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는 518년간 존속하고 27대에 이르지만 왕릉, 추존왕릉, 왕비릉을 합쳐 무려 44릉에 이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산군과 광해군이 폐위되어 왕릉이 아닌 ‘묘’가 되므로 조선왕릉은 42릉 2묘가 될 것이다. 이만하면 단일항목(왕릉)의 수, 독창성에서나 동아시아의 지리풍수적인 측면에서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오히려 늦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주로 왕릉의 분포는 파주, 고양, 구리, 남양주, 화성, 여주 등에 있고 왕자들과 비빈의 묘 역시 왕릉 주변 지역에 있지만 별도로 조성된 예도 많이 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동록된 만큼 별도로 조성된 왕자군과 후궁의 묘도 잘 관리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림1) 통일로: 필리핀참전비 입구 대자동 비석군

그런데 고양시 벽제읍 대자동은 주변에 왕릉이 위치하지 않지만 유독 왕자와 외척의 묘가 20여 기에 이를 정도로 밀집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이런 의문 중 특히 소현세자의 3자인 경안군 집안을 주목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경위에 관심을 가지고 논문(「대자사의 창건배경과 위치비정 연구」차문성, 전통문화 7호, 전통문화학교, 2009-09-01))을 쓴 바 있다. 조선 초기 왕실사찰 대자사터를 경안군 묘역에서 발견한 이후 계속적인 자료 수집을 위해 이곳을 오가면서 20여기의 왕족과 외척의 묘가 있는 이 대자동 골짜기를 룩소르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왕의 계곡’에 빗대어 나는 ‘왕자의 계곡’이라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왕자의 계곡’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을까? 여지도서의「경기도 고양군여지승람 총묘(塚墓)」를 살펴보면 최영묘, 성녕대군묘, 근령군묘가 이곳에 언급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왕족들의 무덤이 이곳에 위치한다. 문종의 딸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한 서린 무덤은 별도로 치고 라도 왕자 묘를 중심으로 대자동의 묘역을 크게 나눠보면 태종 때의 성녕대군과 그 형제 및 자손(근령군, 온령군 형제와 자손 원천군 등), 성종대의 이성군 집안(경양군, 영평군 등), 연산군 때 두 차례 화를 입은 우산군과 자식(무풍군, 금천군 등), 인조대의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집안의 묘역으로 사분할 수 있다.


그림2) 위 경안군묘/아래 임창군묘/우측중간 임성군묘

경안군 집안이 대자동에 정착하게 된 배경

대자골짜기에 한번 들어 가보자.
대자동에 들어서서 노인정이 있는 경안길로 가다보면 3개의 유명한 묘가 있는데 제일 안쪽에 위치한 것이 성녕대군의 묘다.

*[참고:안내표지판에 적혀있는 ‘성령대군’은 ‘성녕대군’의 잘못된 표기로 수정되어야 함. 寧은 편안할'녕'으로 령이 아님. 따라서 앞 글자가 받침이 있는 경우 그대로 '녕'으로 발음하고 효령대군처럼 없는 경우는 령으로 표기해도 무방함. *올바른 표기법: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성녕대군 사당을 지나 좁은 나무 사잇길로 올라가면 성녕대군과 그 양자 (효령대군의 자손) 원천군의 묘가 나온다. 그 앞서 최영장군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고 유치원 옆길로 가면 언덕 위 가파른 사초지가 형성된 경안군의 묘와 아래에 있는 임창군, 임성군의 묘를 만나게 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곳은 바로 드라마 추노의 배경이 되는 왕자 경안군 집안이다. 드라마 추노에서 전직 판관 송태하와 그 일행이 운주사의 와불이 누워있는 곳에서 읍례를 표하는 원손이 바로 경안군이다. 경안군 집안이 이곳 대자사터에 정착하게 된 경위에 대해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일말을 추측하여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로는 경안군이 효종10년(前봉림대군) 경안군에 복작시킬 때 제택과 의복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 때 정착한 곳이 현재의 대자사터일 가능성이 높다.
고종 9년 승정원일기에서 양녕대군의 16대 사손(祀孫)인 이승보(숭례문 개축공사 책임자), 소현세자의 사손인 이필용과의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사우(祠宇)는 시일을 기다렸다가 봄에 영건(營建)할 것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사옥(祠屋)은 비록 전일에 지은 것입니다만 지붕을 기와로 덮지 않았고 또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 목재가 지금 모두 썩어 문드러져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응당 새로 지어야 합니다. 사손(祀孫)이 제사를 주관하는 청사(廳舍) 또한 매우 협소하니, 고쳐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마른 땅을 사서 향불 피우는 비용을 마련하는 데에 이용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옛 터에 그대로 짓는다는 것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장차 옛 터를 그대로 하여 다시 짓는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의 묘소가 대자동(大慈洞)에 있는데, 이곳은 몇 리의 거리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서울과는 40리의 거리이고 본 읍과는 5리의 거리입니다. 성녕이 죽은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이 몸소 그 묘소에 임하셨을 때에 ‘자애로움이 크다.’ 하여, 그 동리를 대자동(大慈洞)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녕이 죽은 것은 태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에 있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녕은 겨우 14살에 죽었으니, 바로 태종이 재위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 때문에 대자동으로 이름한 것이로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녕의 묘소는 대자동에 있고 경안군(慶安君)의 묘소는 그 산등성이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똑같은 장소인데 사패(賜牌)한 땅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당초에 틀림없이 사패한 땅일 터인데, 지금은 서로 매장하고 있습니다. 연석에 오른 유신(儒臣)은 바로 경안군의 후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가의 정의상 진실로 똑같은 지역의 산이 매우 좋을 것이다. 경안군의 사우는 산 아래에 있는가? 고양(高陽)읍에 있는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일찍이 산 아래의 제청(祭廳)에 봉안했습니다만 제청이 무너졌습니다. 신이 사손(祀孫)이기 때문에 옮겨서 신의 집에 봉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선군(慶善君)은 일찍이 봉작했다. 경완군(慶完君)이 이번에 봉작할 대상인가?” 하니, 이필용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억울한 일이 있었다. 그의 자손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에 사는 사람이 10가구도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리도 적단 말인가?” 하니, 이필용이 아뢰기를, “경안(慶安)ㆍ임창(臨昌)ㆍ밀풍(密豐) 삼군(三君)이 잇달아 혹독한 화를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숫자가 적은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9년)

이 대화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첫 째는 고종 때 시호를 받지 못한 대군, 왕자군, 공주에게 대거 시호를 하사하는 은전을 고종 8년부터 대거 행하게 되었는데 소현세자의 큰 아들인 경선군과 유배에서 살아남은 경안군은 효종 때 시호를 이미 받았지만 둘째 왕자 석린 만은 고종 때 이르러서야 시호를 받게 된다.

*[참고: "소현세자의 1남 이백(이석철)은 경선군으로 증하고, 3남 이회(이석견)는 경안군으로 하라. 그리고 1녀에게는 경숙군주를 증하고, 2녀는 경녕군주로, 3녀는 경순군주로 하라.“(조선왕조실록 효종10년 1659년 윤3월)] 공주는 정비, 옹주는 후궁의 딸을 말함이고 군주는 왕세자의 정실에서 태어난 딸을 말함. 즉 남아는 왕자君이고 여아는 郡主가 된다.

두 번째로 고종은 이날 사손들과의 대화에서 성녕대군의 사우를 물었고 그 사우는  현재의 위치에 재건된 바 있다. 근데 고종은 같은 대자산 아래에 경안군 묘가 있는 것을 알고 사패한 땅이냐고 물었다. 사패지란 나라에서 공신 등에게 하사하는 땅이다. 경안군의 묘, 명나라 출신 시녀 굴씨의 묘, 임창군 묘, 임성군의 묘, 밀풍군 묘가 차례로 이곳에 들어선 것을 보면, 이미 왕실에서 설립한 대자사가 언젠가부터 폐사지가 되었으므로 이 땅을 효종 때 경안군에 시호를 하사하면서 사패한 것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이로써 경안군의 사후 임성군(弟), 임창군(兄)의 묘소가 중앙에 들어선 후 언덕을 중심으로 종중의 묘가 차츰 들어서게 된다.
세 번째 사실은 이필용과의 대화에서 고종은 사우의 위치를 물었는데 이미 제청이 무너져 신주는 사손인 자신의 집에 봉안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임창군 묘  아래 10여 미터 정도에 사우가 위치해 있어야 할 터인데 작년(2009년) 지표조사 시에는 조선 초기의 사발과 차륜문이 새겨진 복합문 기와가 주로 발견되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 경안군 사우터가 이곳에 있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일이다. 더구나 이필용이 삼대에 걸친 환란으로 소현세자의 자손이 10여 가구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기지만, 현재에도 자손이 많이 번성하지 않아 경안군 묘 아래 사우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가파른 사초지에서 경안군의 한 많은 인생역정을 보다.

안군 묘는 대자사 터의 제일 위쪽 가파른 사초지에 위치해있다. 크지 않은 봉분에 오래되지 않은 붉은 벽돌로 곡장이 둘러져 있고, 계체석 하계 우측에는 세월이 녹녹히 묻어있는 오래된 비석과 양관을 쓴 문인석이 무덤 양 옆을 지키고 아담한 동자석이 공양을 드리듯이 시립해 있다. 임자년에 증축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1972년에 곡장을 새로 증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점은 2m 가까이 되는 커다란 비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석이란 나말여초에 주로 선사들이 입적한 후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승탑과 더불어 조성하는데 주로 상단 이수부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쟁탈하기 위한 역동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비를 받치는 대좌에는 거북의 몸을 한 이무기의 형태가 나타난다. 경안군 비석은 상부가 별도로 조각된 이수부의 형태며 하부는 귀부(龜趺)가 아닌 사각의 형태를 하므로 이를 ‘이수방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림3) 경안군묘 비석 이수부

그런데 경안군 이수 부분에 용 대신 화려하게 장식된 새 2마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석 이수부가 잠시 숙종 때 화려하게 장식되긴 했지만 이 이수 부분에는 쌍룡이 또아리를 트는 장면이나 단룡이 새겨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새 2마리가 새겨지는 것은 흔하지 않은 예다. 새가 새겨진 경우는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일 가능성도 있지만(건너편 이성군 묘역 비석에 삼족오로 추정되는 표식이 있음) 이런 경우 둥근 원안에 3발을 가진 새로 표현한다.
특별한 경계부가 없이 새 2마리가 있는 경안군의 경우, 이와는 달리 극락세계에서 천년의 수명을 산다는 공작이나 가릉빈가로 볼 수 있지만 이는 주로 승탑의 기단부 혹은 불상의 대좌 등에 표현되는 방식이라 선뜻 가릉빈가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만약 가릉빈가라면 일반적으로 인수조신 즉 머리가 사람의 형태를 하고 몸은 새의 모습 혹은 주악을 연주하는 극락조의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신라하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후대의 비석임을 고려한다면 가릉빈가의 특징 중 유난히 돋보이는 날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날개는 유난히 크고 두텁게 묘사되고 다섯 개의 선각이 조식되어 있다. 구름 위 살포시 앉아있는 새는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부리에는 앞발을 이용해 뭔가를 입에 물고 있다.  
생경한 모습의 이 도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경안군 집안의 혹독한 시련을 살펴보면 극락세계의 한 장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왕통 적장자로서의 고통을 수구파로부터 받았지만 저승에서는 극락조의 형상을 통해 망자의 혼이라도 편안하게 모시려는 후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한다.
경안군 집안의 독실한 불교신앙은 작년 송광사 관음보살좌상에서 발견된 450여 점에 달하는 복장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관음상은 부인 허씨가 경안군의 무병장수를 발원한 것으로 불교신앙으로 가족사의 고난을 극복하려 했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4) 경안군묘 비석: 196cm

깊게 새겨진 이수부 아래는 “朝鮮國 王孫 贈 顯祿大夫 慶安君 兼 五衛都摠管 行承憲大夫 慶安君 諱 檜之墓 益盛郡夫人許氏附左”라 적혀있다.
이 비석에 해제를 붙이면 먼저 왕자군이기 때문에 조선국이란 명칭을 앞에 붙이고 추증(贈)된 품계는 현록대부로 종친부에서 정1품에 해당하는 경안군임을 의미한다. 디음으로는 정2품 관직의 오위도총관 행직(行職)으로써 품계보다 낮은 관직을 역임했다는 의미로 행승헌대부(정2품) 이름은 삼가 ‘회’라 한다. 원래 兒名은 석견으로 불렸지만 관명은 ‘회’이다. 祔左란 망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부인 허씨가 합장되어 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추노에서 원손으로 나오는 경안군은 나이 4살 때 어머니인 세자빈 강씨가 무고한 죄로 사사되자 두형과 함께 제주로 유배되었지만 효종1년(1650) 강화도와 교동으로 이배되고 1656년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 효종으로부터 경안군에 봉해진다. 이처럼 효종 때 이르러 경안군으로 증(贈)되었지만 불과 7년 뒤인 1665년 현종6년 때 22살의 나이로 경안군이 졸하고 만다. 집안이 이미 빈궁해서 제대로 의례를 갖춘 상례를 할 수 없어 왕의 하교로 예장의 품격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이 비석 제작의 공력을 짐작해 볼 때 경안군의 사후에는 이처럼 격이 높은 비석을 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실록을 뒤적거려보면 숙종 때 비석을 세운 단서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숙종 때 다시 한 단계 추증되는데 아마 종친으로서는 가장 높은 정1품의 반열인 현록대부에 오른 것으로 생각되어 비석의 입비시기가 숙종 때 추증된 후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안의 비극은 소현세자에 이어 경안군에도 이어진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지만 경안군 역시도 죽음이 석연치 않다.
실록에는 경안군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경안군 이회가 졸하였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아들이다. 소현의 자녀가 모두 죽었고 유독 경안군만이 살아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실려 돌아와 죽었다. (중략) 특별히 예장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의관 박군은 삼가서 구호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형장을 가하고 먼 곳에 정배시켰다.”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 임성군에 거듭되는 환란

창군(1663-1724)의 묘는 경안군 묘 아래에 있다. 현재는 문인석과 석물들은 없으며 다만 상석을 받치는 고석과 장명등만이 남아 있다. 장명등은 후대에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옥개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형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옥개부와 화사석, 간주석으로 이루고 있는데 간주 상단은 모란문, 연화문, 국화문 등이 있고 그 아래는 안상이 있어 불교식 문양이 옅어져 감에 따라 서서히 회화적 문양으로 대체되어 가는 시기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석물의 변화는 효종이 승하한 후 석물의 출초(화원이 그리는 석물 그림으로 이 그림을 바탕으로 석물을 본뜸)에 불교식 문양을 최대한 줄이고 모란꽃이나 연꽃 등 화초로 대체하게 된다.
무덤 앞에 설치되어 망자를 안내하는 장명등의 경우 상대에 표현되는 목단은 화원의 초를 바탕으로 해 회화성이 강하며 기본적으로 인조의 장릉 병풍석에도 목단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설에 임창군의 장명등은 중국 석등을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사료를 살펴보았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임창군이 청나라의 사은사로 여러 번 봉행하게 되어 그러한 개연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석물의 조성은 주로 봉분 근처에 가가(假家)를 만들어 그 안에서 조성하는 예에 비추어 무거운 석물을 먼 곳에서 옮겨 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럼 미술사적 관점에서 형태는 어떤지 알아보자.
왕릉 장명등은 조선시대에 걸쳐 형태가 8각에서 4각으로 다시 4각에서 팔각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도기적 모양이 보인다. 이 장명등의 옥개부분에서 팔작지붕의 합각부가 유려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지만 화사석 아래가 서서히 줄어드는 전형적인 사각의 장명등임을 보여주고 있다. 간주석 하부의 형태가 향로의 모양으로 변화하는 예는 숙종의 명릉에서도 볼 수 있지만 옥개와 화사석과의 상승감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시기인 서오릉 내 정성왕후(영조 비:1692-1757) 홍릉의 예에서 비로소 상승감과 안정감을 가져오고 그 형태상 임창군의 장명등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림4) 좌로부터 숙종(1661-1720), 정성왕후(영조 비:1692-1757), 임창군(1663-1724) 장명등

이들 장명등을 비교해 볼 때, 옥개부분의 면적이 점차 넓어짐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사각등 위에 위치한 옥개석이 안정감을 중시해 그냥 위에 올리는 것이라면 상승감을 중시하여 화사석위에 올리는 옥개석은 화사와 닿은 부분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장부를 화사석에 꽂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정성왕후의 옥개석 역시 이러한 방식을 택해 장부를 꽂았지만 임창군의 경우는 화사석의 천정이 뚫려 있는 상태로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임성군(1665-1690)의 묘는 바로 경안군묘와 임창군묘 사이 나무 숲에 가려져 세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다. 경안군의 형인 경선군이 자식이 없어 임성군이 양자로 입적이 되어 봉사를 했지만 임성군 역시 자손이 없어 형 임창군의 둘째 밀남군이 양자로 입적된다.

그림5) 임성군묘

임창군과 임성군 이 들은 그의 조부인 소현세자와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조선 왕실의 적장자란 이유로 자신들은 모르게 밀지에 이름이 올라 고통을 받게 된다.
숙종 5년에 강화도의 돈대를 쌓는 현장에 이유정이 투서를 던진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 왕손의 적자 임창군 이혼과 그의 동생 임성군 이엽의 이름을 거론함으로써 어린 임창군, 임성군은 결국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물론 숙종은 이혼과 이엽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터였지만 이미 투서에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종묘사직이라는 큰 계책을 위해 할 수 없이 이들을 유배시키게 된다. 그의 어머니 경안군 부인과 처가 함께 따라가 여러 차례 제주의 풍토병을 앓기도 한다. 몇 년 후 유배에서 풀려난 후 그는 왕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그의 만년에 사은사로 중국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고 숙종의 신임이 남달라 다른 종친들이 감히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래 숙종조 왕조실록의 내용에서 왕의 신임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혼은 소현세자의 손자이다. 숙종 기미년에 흉인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가 있다고 무고하여 그의 아우 이황과 함께 옥에 갇혔었는데 숙종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사형에서 관대하게 용서하여 제주도에 귀양 보냈다가 곧바로 풀어주고 총애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혼도 근신하고 자중하였는데 만년에는 돌보아 대우함이 더 한층 융숭하여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

불운한 왕자, 밀풍군 자결하다.

그림6) 밀풍군묘

창군 묘에서 우측 언덕을 넘어가면 소현세자 종중묘가 나오게 된다. 그 맨 위에 있는 것이 밀풍군 묘며 아래에는 그 후손들의 묘가 세워져 있다. 안타깝게도 임창군의 장자인 밀풍군 역시 영조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인좌의 난(1728년 무신란)에 휘말리게 된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즉위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님은 물론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계되었다고 하여 영조와 노론을 일거에 제거하고자 이인좌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사건이다. 이인좌는 청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북상하는 중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어 토벌된다. 이로 인해 밀풍군은 다음 해 옥사에 갇히고 자결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계속해 노론들은 밀풍군의 가족을 노적으로 올려 노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영조에 의해 거부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소현세자 집안은 다시한번 좌절을 겪는다.

명나라 시녀 굴씨,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지켜보리라”

그림7) 명나라 시녀 굴씨의 묘(소현세자의 시녀로 귀국시 청에서 조선으로 따라 옴)

래로 내려가 한쪽 귀퉁이에 조그만 무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무덤에 나와 있는 계단석은 대자사터에 방치된 돌을 이용해 기단을 만든 듯하고 그 위의 상석은 주변의 돌을 이용해 치석을 하였다. 비석은 현재 종손 이준기 선생의 부친께서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로 적혀 있다.
명나라 시녀인 굴씨는 조선이 청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기 위해 이곳 언덕배기에 묻혔다고 한다. 알려진 바 대로 소현세자와 북경에서 교유를 한 독일인 신부 아담샬은 소현세자가 청국에서 귀국할 때 천주교도 여러 명이 소현세자에 시종토록 주선했다 한다.
환관이며 기독교도인 이방조,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두문방의 다섯 사람과 여러 궁녀가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국시 1644년 11월 26일 북경을 떠나 다음 해 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그 중 일부는 소현세자가 졸한 후 청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았는데 그 대표적인 시녀가 최회저, 유저, 긴저, 굴씨 등이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기록상으로는 굴씨가 70여 살, 최회저가 80살까지 살면서 상궁이 되어 조선에 많은 기여를 했다. 숙종 25년에 최회저는 상궁의 교지를 받고 관으로부터 의자와 식물을 넉넉히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굴씨의 묘가 이곳 경안군 집안에 함께 묻힌 것은 소현세자 사후 시녀로 여전히 있었지만 소현세자 집안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안군이 해배된 후 이곳 대자사 터에 정착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굴씨와의 관계가 돈독히 유지되었고 경안군이 급사한 후 그를 장사지내고 임창군과 임성군을 키우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굴씨에 대한 대표적인 자료는 병자란 때 척화한 많은 군신들에 대한 송덕을 기리기 위한 서책을 정조 때 제작하는데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존주희편’에 굴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굴씨에 대한 자료는 왕권의 강화와 명에 대한 의리론이 다시 부상한 시기인 정조 연간에 제작된 많은 서책에 전하고 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정조가 왕명으로 편찬케 한 존주휘편, 백과사전격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성해응의 연경재전집 등에서 비슷한 내용이 전해진다.
이중 청장관전서의 내용이 저본이 되어 정조가 편찬케 한 존주휘편 등에 수록된 것 같다. 경수당전고에는 그녀가 명나라 궁중의 상투 트는 법과 예법에 정통하고 비파를 잘 타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굴씨는 본래 중국 소주의 양가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장추전 에 선입되어다가 이자성이 명경을 함락시키지 민간으로 숨었다. 그후 자성이 패해 청 구왕의 손에 들어가 군중에 있었다. 인조때 소현세자가 심양에 입질하였을 때 굴씨를 데려다 두고 있었는데 그 후 귀국시에 데리고 와서 만상(萬象殿)에서 장렬왕후를 섬기게 했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타고 또 금수를 잘 길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효종(孝宗)이 일찍이 굴씨에게 여자들의 상투 트는 제도를 물어본 적이 있었으니 요즘의 사대부에서 상투 트는 제도는 굴씨가 가르쳐 준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 즉 굴씨는 참으로 아는 게 많다. 굴씨가 이미 우리나라로 오고 나서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70여 세가 되어 장차 죽으려 할 때에 데리고 온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를 서쪽 들판 길 가에 묻어서 수구(首邱)의 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굴씨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70여세를 살았는데 숙종(肅宗)이 광평(廣平) 전씨(田氏)에게 명하여 굴씨의 제사를 맡게 하고는 해마다 제수 용품을 주어 지금까지도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전씨는 또한 명(明) 나라 조정의 상서(尙書) 응양지(應揚之)의 후손이라고 한다. 내가 이원(梨園)의 노인에게 들으니 굴씨가 소현세자를 따라 향교(鄕校) 동네 집에서 살면서 이따금 이원(李園)의 여러 사람에게 불려 가서 발을 쳐놓은 상태에서 비파의 손가락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니 지금까지도 전악사(典樂士) 강씨(姜氏)란 사람이 사숙(私淑)하였다고 한다.“ (규장각 경수당전고 해제/ 한성대 정후수 교수 번역)


러나 현재 무덤의 위치는 들판 길가가 아니다. 아래에는 작은 샛길은 있었지만 큰 길과 연결도로는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장작을 옮기는 정도의 작은 소로에 불과하다. 현재는 신작로가 나서 옛 의주로 길인 고양읍 벽제관과 연결되는 길이 만들어지고 반대 방향으로는 통일로가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작고 초라한 무덤이지만 조선시대 여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굴씨의 묘를 가끔은 찾아와 그리 외롭지는 않다고 종손 이준기 선생이 전한다.
고국의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청나라의 시녀가 된 이들의 운명에 새로운 정착지로 등장한 조선은 자유로운 신세계가 아니었다. 그들의 주군인 소현세자가 죽고 강빈의 억울한 죽음, 그 아들의 유배에서 어쩌면 청나라에서보다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쳤을 이들 중 진저는 조선에 온지 물과 2년만인 1647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다행히 유저는 35년 후 생을 마감하고 최희저는 숙종이 친히 비망기를 내려 “중국 여인으로는 상궁 최씨가 있었을 뿐인데 이제 막 죽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마련하고 제급하게 하라”고 명할 만큼 오랫동안 조선에 의탁한다,

족이든 서민이든 여인이든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은 곤궁하기 짝이 없다. 관념적 사회, 파벌중심의 사회에서 왕위는 버렸지만 왕손의 적장자로서의 삶은 항상 백척간두에 서 있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자의 죽음과 한 집안의 융성과 몰락 그리고 명나라에서 온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을 남겨진 석물과 자료를 통해 잠시 역사의 단면을 되새겨보았다. 요즘 들어 무덤을 국토의 효율성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만 치부하지만 역사의 주인공 혹은 그들과 함께 살아간 동 시대 사람들의 무덤과 석물을 통해 실물 역사를 되살리는데 적잖은 기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튼 추노 드라마를 통해 새로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집안은 우리 역사의 가장 안타까운 애환으로 남는다. 그간 장희빈 등 내명부의 치졸한 싸움에 놀아나던 역사의 흐름이 한 시대의 담론을 중심으로 거듭나기까지는 열린 마음으로 역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으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 굴씨의 수구지심, 경안군, 임창군, 밀풍군의 무덤을 통해 지금부터 300여 년 전 한 왕족 집안의 부침을 살펴보았다.
잊혀진 역사, 아니 잊고 싶은 역사가 소외된 한 왕족의 부침뿐이겠는가. 우리는 학교 다닐때의 역사시간에서, 혹은 인문학을 통해 문화의 융성함과 부국강병을 추구한 시절을 배운다. 부국강병을 추구한 세종대왕의 업적이 그렇고 임진왜란의 불멸의 영웅 이순신, 우리 문화의 융성기인 정조대왕의 수원화성이 매일매일 인파로 붐비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배움이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오는 깨달음이 더 크다.
병자호란시 항복의 굴욕를 배우고 삼학사의 죽음과 기개를 배우는 것도 위대한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
실패의 역사가 이렇게 중요하다면 병자호란의 주역인 인조 장릉(파주)과 소현세자 묘인 소경원(고양 서삼릉)을 이제는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경안군과 임창군 묘역을 답사해 역사의 소외된 단면을 직접 살펴봐야 할 일이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지 270여 년이 지난 후 또 다시 일본에 병합될 때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의 글에서 현실의 비정함과 침전되어 가는 정의의 얼굴을 되새겨본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의리는 없다. 하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데고 그 고난을 위해 죽는 이가 하나도 없으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위로는 하늘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책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길이 잠들어도 참 통쾌하리라.”  

왕자의 계곡’을 빠져 나올 때쯤 하얀 눈발이 점점이 희뿌연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역사에서 진정 배울 것이 없다면 버릴 것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역류된 하늘은 어느 새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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