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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25 22:07:36, Hit : 6290, Vote :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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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정녕 독도를 아느냐

                                                                                                                             

                               ■ 네가 정녕 독도를 아느냐 ! ■

이전에 쓴 글 “독도에서 부는 바람”을 보니 김영삼 정부 때 하시모토 내각과의 독도 설전이 떠오른다. 당시 천리안에서는 모리오카라는 한 청년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 외치는 바람에 지각 있는 PC통신 강호제현들이 앞 다퉈 이를 비난한 일이다. 급기야 독도에 접안시설이 만들어졌지만 일본의 망언은 지금까지 줄어들지 않는다. 이번에는 고이즈미 총리까지 나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 서슴없이 말하는 지경에 이르른다. 근래에는 독도사진이 게재된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얼마 전 일본에서는 한 실업가가 일본우정국에 “독도는 일본땅”이란 글이 들어간 우표발행을 거액을 주고 신청했다 한다. 

 

 

 

 

 

 

 

 

 

 

 

 

 

 일본에는 우정국에 일반인이 가족사진이 들어간 우표를 일정금액을 주고 신청할 수 있지만 국가간 중대 사안이므로 일단 거절되었다 한다.
도대체 독도는 현재 한국의 영토며 이전에도 그랬음이 분명한데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텐데 그 이유를 알아보자.


조선시대에는 소위 空島 정책이라 하여 조선조 초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해 태종 때 섬 거주자를 내륙으로 강제이주 시킨 정책이 있다. 조선 태종 이후에는 내륙에서 먼 섬에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는데 세종 때 울릉도와 독도에는 부역과 조세를 피해 섬으로 도망한 사람들도 있어 문제가 되었다. 안무사 김인우는 부역을 피하고 조세를 면하기 위해 울릉도에 거주하는 20여인을 추쇄한 적이 있었다. 임금이 우의정 한상경등에 이의 처리를 물으니 무릉도에 사람이 거주하여 이를 지키는 것이 이롭다고 한 반면 당시 공조판서 황희는 사람이 산다면 왜구들이 무릉도에 들어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원도도 위험에 빠지니 사람들을 추쇄하는 편이 옳다고 하여 공도정책이 지속되게 되었다. 오늘날의 일을 두고 황희 정승이 다시 살아나면  얼마나 후회할 일인가. 
아믛든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우산도는 자산도라고도 했으며 독도를 말한다. 무릉도는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며 의죽도라고도 했다.) 라 기록되어 있어 비록 공도정책이 시행중이지만 토산물과 도피자의 추쇄를 위해 정기적으로 울릉도를 오간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땅임이 분명한 데 왜 일본은 지금까지 망언을 연발하고 있는가.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자.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이것은 조선과 일본에서 마찬가지 였다. 조선조 초에는 울릉도를 무릉도라 하였고 일부 기록에는 의죽도라고도 하였다. 독도는 우산도 혹은 자산도 라 했는데 이 우산도의 명칭이 일본과 문제가 되기도 한다. 독도란 명칭은 광무10년(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와 매천야록에 사용된 된 바 있지만 그 이전에는 흔히 사용치 않은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 했고 독도는 송도(마쯔시마)라 했다. 숙종 때  안용복이 울릉도에 일본어부가 거주하는 것을 보고 다투다 호키슈(지금의 도토리현)에 잡혀간 이후 대마도의 농간으로 울릉도와 죽도가 다른 섬 인양 서계를 보낸다. 조선에서의 서계가 죽도는 일본의 영토이고 울릉도는 조선이 영토임을 말하자 대마도의 농간임을 알게 된다. 막부에서는 백기주의 청원으로 이를 심의하여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임을 알리게 된다.
이 후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별 거론하지 않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시마네 현이 독도를 지적에 편입하기 위해 내무성에 문의했지만 독도는 일본과 무관하다는 답신이 왔다. 사소한 문제로 조선과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지 않기 위해서다.  1905년 시마네현의 기업가가 다시 한번 리양코섬(독도)을 편입해 달라고 청원하여 1905년 죽도의 영토편입이 결정되었다. 여기에서도 독도의 명칭에 문제가 있었는데 송도의 이름을 포괄적으로 죽도란 이름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다케시마(竹島)는 원래 울릉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내각의 결정의 내용은 「내무대신 請議인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하는 데 있어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 섬을 떠나 서북 85리에 있는 무인도는 타국에서 이를 점령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흔적이 없어 재작년인 명치 36년 본국인 나카이라는 자가 숙사를 지을 인부를 파견하여 빌려 달라는 청원을 해와 소속 및 성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바 이를 죽도라 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끼섬의 관할하에 두도록하여 이를 인정한다」고 고지한다.
이는 일본의 첫 조선침략이며 이어 1909년 「간도에 관한 청. 일 협약」이 체결된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선 항복 선언을 했고 포츠담선언을 받아 들였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영토는 혼슈를 비롯 4개 섬과 기타 섬으로 한정했는데 독도의 명칭은 없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인 SCAPIN 677은「일본은 4개의 본도와 약 1천개의 작은 인접 섬을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제외되는 것은 울릉도, 리앙쿠르암(독도), 제주도등」이라 명시한다. 이로써 독도는 미군정에 의해 한국영토로 잠정적 인정이 된다.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중공군의 남하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때인 1951년 7월 20일의 샌프란시스코 회담에는 연합국 49개국이 참가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Japan , recognizing the indepenendence of Korea, renounces all righ, title and claim to Korea , including the islands of Quelpart, Porrt Hamilton and Dagelet」 최종 평화 회담시 독도의 이름은 빠지고 거문도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의 수정을 요구하지만 미정부의 답신은 “독도는 한국정부의 영토라고 생각지 않고 이는 1905년에 무인도로서 시마네 현에 소속되어 있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이 국무원 고시 14호로 확정되었다. 독도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보호 하에 있는 수역은 한반도 및 부속도서의 해안과 좌의 제선을 연결함으로써 조성되는 경계선 간의 해양이다. 」라 하여 이를 일본에서는 LEE LINE이라 불렀다. 이로써 일본의 외무성은 1952년 1월 「대일 강화조약의 해석상 일본의 영토로 인정된 시마네현 소속의 죽도(독도)를 대한민국 정부가 이승만 라인내에 포함시킨 것은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라 항의한다. 1954년 정부는 「이 분쟁을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일본 정의의 제의는 사법절차를 가장한 또 하나의 허위의 시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재판에 의해 그의 권리를 증명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성명을 낸다. 이상이 대략의 일본의 영유권 주장의 내용이다.  



앞서 언급한 바 일본에 비해 조선에서는 이 섬의 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다양하다. 국토가 국제법상의 요건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요건이 있다.
㉠선점㉡국가의 영향력㉢해양법(대륙붕)을 따질 때 대한민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
독도는 古來로부터 신라의 땅이었다. 지증 왕때 이사부에 의해 복속되었으며 그 영역은 독도에 미쳤음이 분명하다. 우산국이라함은 울릉도뿐 아니라 그 부속도서도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울진에서 울릉도까지가 123 ㎞ 그 곳에서 동쪽으로 92㎞ 떨어진 곳에 독도가 있다.  일본에서는 가장 가까운 오끼시마에서도 160 ㎞나 떨어져 있음은 영향력과도 거리가 멀다.
조선조 초에서부터 숙종때까지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는 공도정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숙종때 울산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불법으로 어로행위를 하는 일본어부와 다투게 된다. 안용복은 용단도 있었고 水營에 소속되어 있을 때 일본어에 능했는데 일본어부에 의해 안용복과 박어둔은 일본에 잡혀가게 된다.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고 우산도 역시 울릉도에서 하루 거리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를 잡아 왔느냐”고 호통친다. 이 일로 대마도주와 귤진중은 조선정부에 죽도는 일본 땅이므로 귀국의 어부가 침법하였다고 하고 다시는 죽도에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당시 어리석은 관리들은 죽도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죽도가 일본 섬인줄 알고 회답을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폐방(弊邦)에서 어민을 금지 단속하여 외양(外洋)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니 비록 우리 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또한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 밖의 섬이겠습니까? 지금 이 어선(漁船)이 감히 귀경(貴境)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거느려 보내도록 하고, 멀리서 서신(書信)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숙종조 실록)
조선에서 죽도를 울릉도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위의 서계에서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라는 말이 분명히 나와 대마도에서는 울릉도의 명칭을 삭제해 줄 것을 통역에게 말하자 홍중하는 통역을 책망하고 조선은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예조참판 이여가 다시 회계를 보내는데, 조선 정부는 울릉도가 강원도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대나무가 나기 때문에 혹 죽도(竹島)라고 칭하므로, 울릉도와 죽도는 이름만 다를 뿐이며 실제로는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한편, 숙종 19년(1693)에 박어둔과 안용복 등을 잡아간 것은 우리 국경을 일본이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구속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죽도) 도해 및 어로의 금지를 요청하고 있다 결국은 안용복이 동래로 송환되어 풀려나게 되나 이 일로 조선에서는 변방의 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된다.
안용복은 이에 그치지 않고 僧 뇌운과 함께, 출어하면 큰 이익을 얻는다 하여 배를 마련한 후 「朝鬱兩島監稅將安同知騎」라는 관리의 깃발을 달고 관복인 당상관복과 갓을 준비해 출항을 했다.  마침 도망치는 일본어민을 따라 오끼 섬까지 쫓아가 에도까지 이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막부에서 이 일을 조사한 후 죽도는 조선의 땅임을 각 번에 하달하였다.
「처음부터 그 섬을 조선으로부터 뺏은 적이 없는 데 돌려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이 죽도에 가서 어로행위를 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한다.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해라」(일본 태정관 편 공문록,내무성지부)
한편 귀국한 안용복 일행은 이 일을 강원도 감사 심평에 고하나 심평은 오히려 안용복 일행에 중죄를 줘야 한다고 조정에 알린다. 이로써 윤지선에 의해 안용복은 관직사칭을 해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나 지사 신여철은  “안용복의 일은 매우 놀랍기는 하나, 국가에서 못하는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므로 공로와 죄과가 서로 덮을 만하니, 일죄(一罪)로 결단할 수 없겠습니다.”“ 신여철과 남구만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안용복은 끝내 귀양을 가게 된다.

성호 이익선생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나는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웅 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대마도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대마도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張循王)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大商巨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 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이상에서 안용복에 대한 처리 결과를 볼 때 조선정부의 처리와 일본 막부의 처리 관점은비슷하다. 선린외교의 차원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 깔려 있다. 막부는 일본에서는 영원히 죽도에 나서지 말 것을 각 번에 경고했음이다.

성호이익은 일본에서의 죽도는 조선에서는 의죽도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였으며 주로 울릉도라 칭한다고 한다. 더구나 실록에도 울릉도의 가운데에서는 많은 대나무가 난다고 했으니 죽도하는 말은 의죽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울릉도는 의죽도 혹은 죽도라 불렸으며 한 섬에 두개의 명칭이 있은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선시대에는 흔한 일이다. 아울러 안용복이 쫓아간 바닷길도 울릉도-독도-오끼섬 이므로 독도 역시 당연히 울릉도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독도는 조선초에는 우산도로 불렸으며 조선후기에는 자산도로 불려왔다. 실록이나 기타 조선조 기록에는 자산도 라했으며 이는 비변사에서 안용복의 추문때 안용복이 분명 말한 기록이 비변사등록에 나와있다.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자...“
따라서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히 조선의 땅임을 분명 인정하였음이 분명하다. 


힘없는 나라에서 무엇을 탓하랴 만은 일본이 조선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 백번 죽어도 그 죄를 씻지 못한다. 조선후기 통신사 조엄은 일본은 조선의 萬年之怨讐라 하였지 않는가, 그런데도 일본은 아직도 독도가 일본 땅임을 외치니 그 죄는 아직도 용서받을 수 없음이다. 러일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의 내무성이 시마네 현의 지적에 편입하는 것을 허가해 준 것이나 한국전쟁이 치르지는 가운데 열린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일본의 로비로 엉뚱하게 거문도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어찌 참회하는 일본의 모습이겠는가.
더구나 미국이 일본이 입장을 생각해 SCAPIN에 들어간 독도의 한국영토임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보다 냉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근대화과정에서 국제법에 엄청난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침략으로 이어졌고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시대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러일전쟁 바로 전 편입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되지 않는다. 막부의 죽도도해 금지령이 있은 것을 무시하고 무인도라 하여 조선의 선점을 무시한 것이 국제 법에 합당한 것인가. 戰후 모든 것이 전쟁이전으로 돌려졌는데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뜻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용복과 그 일행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에 항의했다.  울릉도에 온 일본인을 꾸짖자 그들은 송도에 사는 일본인이라 한다. 그러자 송도(독도)는 자산도로 조선의 땅임을 비변사에 고하지 않았는가. 울릉도에 비해 자산도의 기록이 적은 상태에서 안용복의 기록은 공신력을 가진다. 기록상으로 신라 이후 불러온 동해(DONGHAE)를 일본해라 주장하고 말도 되지 않는 임나일본부설이 한민족 일본 경영설로 주장되는 지금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를 통째로 앗으려 한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인가.
엊그제 신문에 가칭 고구려 연구회의 이름을 가지고 합의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의 역사를 근간으로 간도를 고착화하려 한다면 당연히 “동북아 역사 연구소” 가  타당할 것이다. 이는 간도 귀속의 고착화는 고구려사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바로 조선의 백두산정계비와 19C 후반 감계회담과 연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 묻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의 영유권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쓰시마의 귀속문제는 어떤한가.
태종의 교시에 의하면 , 대마도(對馬島)라는 섬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누추한 곳이므로 왜노가 웅거해 사는 것을 들어 주었던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 이후로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군민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의 부형을 잡아가고, 가옥을 불태운 탓에,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 섬 속에서 울고 헤매지 않는 해가 없었다. 이에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치며 분통이 터져서, 놈들의 살을 씹어 먹고 놈들의 살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지가 몇 해가 되었다[동문선]
그렇다면 대마도는 헐벗은 왜노를 위해 임시로 빌려준 땅에 불과하지 않은 가 말이다.
조선 500년간 빌려준 땅을 이제 내어 놓아라면 정당힌 주장이라 일본인은 생각하는가.

아~ 우리는 왜 콩알만한 독도에 이처럼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독도는 구한말 일본에 최초로 희생된 땅이다. 그렇기에 독도는 바로 진정한 독립의 상징인 것이다.  
이제 외로운 독도에 희망의 비석을 세우자.
명재상 황희도 조선의 관리도 능히 생각지 못한 일을 촌부가 능히 해결하였다.나약하다는 백성의 힘으로 이룩한 거룩한 소리인 것이다. 울릉도에 가면 안용복 장군의 충혼비가 있다. 마침내 필부인 그에게 장군의 칭호가 붙여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안용복의 이름 석자가 새겨지는 날 , 모두가 함께 손잡고 “홀로 아리랑”을 목터지게 불러보자.
그날이 진정 우리의 자신을 찾는 날이기에 긴 목마름으로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자...


小窓아사달 차문성

“小窓의 문화가 있는 풍경”을 기념하며 진정한 독립을 위한 그날을 위해...

*덕수궁 미대사관아파트 건립반대 운동을 하는 남이님, 호박님,사군자님,덤벙님, 좋은사이님 팔공님 하제님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뜻한 손길을 보내는 우리얼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참고) 조선왕조실록 신동금 독도영유권에 대한 고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한일관계사연구회 독도와 대마도 신용철님 사진 2매 빌림


     




(2004-02-28 07:04:39)  
2/28일 조간신문에는 독도우표에 항의하여 세계각국에 항의서한을 보냈다고 합니다
스투파 (2004-02-29 08:57:01)
정식 개통을 기다리면서 이 글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아사달님의 깊은 연륜과 함께 배여나오는 문화가 봄날의 꽃잎처럼 홈페이지 전체에 날리는듯 합니다.
(2004-02-29 14:48:27)  
스투파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귀감이 되는 활동기대합니다. 홈페이지 준비하면서 스투파님 홈페이지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읍니다. ^^
4 (2007-01-25 05:44:31)
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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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朝鮮國王城之圖"발견과 그 진위에 대한 小考   2004/02/01 7574 905
6   새해 아침(元旦)에 거는 믿음   2004/02/01 5273 899
5   신미양요 때의 전리품   2004/02/01 5161 850
4   공주박물관 국보 도난 사건을 통해 본 불상의 의미   2004/02/01 6752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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