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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3-23 12:43:23, Hit : 6392, Vote :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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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은 정녕 문화재가 아닌 것 인가!

80년대 중반 어김없이 계절이 바뀔 때면 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래 중 “광화문연가”가 있었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

         

              광화문은 정녕 문화재가 아닌 것인가

                               小窓 아사달 차문성 cha@sochang.net


80년대 중반 어김없이 계절이 바뀔 때면 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래 중 “광화문연가”가 있었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 따라 떠나가지만...” 이렇게 시작되는 낭만적인 노래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상대적인 갈망이었는지 모른다.


87년 6.29선언으로 6월 민주화 항쟁의 성지가 된 광화문네거리에서 지금은 6월 항쟁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지만 군부에 항거한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침묵의 바다를 넘어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갈망으로 용솟음쳤던 그날을 생각하면 온 몸에 전율이 날 정도다.

세종로와 태평로가 이어진 덕수궁 길은 점심시간이면 한가로이 오가는 직장인들이 휴식처가 되어 있고 월드컵 때는 세계인을 놀라게 한 분출하는 생명력을 보여줬고 숭고한 촛불시위로 어린 죽음을 애도하는 몸짓을 서슴지 않은 곳이다.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1919년 암울한 일제시기 고종의 서거를 맞아 광화문에서 대한문까지 독립을 외친 곳이 이곳이며 순종의 서거에는 6.10 만세운동을 벌인 곳도 이곳 광화문이다. 그러고 보면 광화문은 한 세대도 중단치 않고 역사의 진원지가 된 셈이다.

       그림 2) 구한말 광화문앞 육조거리


이렇듯 광화문은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상징적인 존재인 만큼 광화문은 숙명적인 삶을 품고 살아왔다.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로 태조4년 궁성이 완성되었을 때부터 존재해 왔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이 대원군 집권 때 재건되었다. 사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모가 안난 우진각의 지붕과 중층으로 된 광화문은 경복궁과 조화의 극치를 이룬 걸작품이었다 한다. 

이러한 광화문은 문화재인가. 그럼 왜 문화재가 아닐까.


문화재가 아니면서 조선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써 서울의 한복판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수난과 오류의 역사를 통해 그 의미를 알아 볼 참이다.


그림 3) 일제하 조선총독부건물


화문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 건물이 1926년에 완공 된 후 총독부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이 이에 강한 반발을 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민예운동가 야나기무네요시 선생이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이 있은 후 「조선인을 생각한다」란 기사를 발표했고 잡지 <개조>와 <요미우리>신문을 통해 「아! 광화문이여」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 이 한편의 글을 공개할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행해지려고 하는 동양 옛 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해서 나는 지금 가슴을 찢기는 듯한 느낌이다. 경성에 있는 경복궁을 찾아 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 왕국의 정문인 장대한 광화문이 헐리는데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을지 모른다.”1)  

조선인의 서정성을 자극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조선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본인 지식인 중의 한명이었다. 실제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부터 1940년까지 21차례나 조선을 왕래했고 80여 편에 이르는 조선 관련 글을 남겼다. 이는 당시 총독부의 사주로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던 세키노타다시를 비롯한 관학자들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그러나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전후한 총독부와의 일견 타협은 그의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조선민족미술관의 소장품 3천여점은 해방 후 고스란히 국립중앙박물관에 포함되었다.

아무튼 이로 인해 광화문철거가 예상보다 논란이 거세게 일게 되자 철거가 아니라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으로 결정하게 되어 다음해인 1927년 이건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아일보 설이식선생의 <헐려짓는 광화문>이란 논설에서 광화문은 원래 물건이라 생명이 없지만 같은 하늘아래 살아온 조선인의 마음은 아까워하고 못 잊을 뿐이란 사설을 이 발표된다. 이처럼 광화문의 운명은 쓰라렸지만 그 생명은 연장되는 듯 했다.

광화문과 더불어 광화문네거리의 변형은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광화문, 광화문이여~

그림 4) 6.25때 폭격 맞은 광화문

금의 광화문 사진과 일제 때 광화문철거 이전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는데 해태상의 위치가 다르고 광화문의 위치와 방향도 맞지 않으며 성곽도 광화문에 연이은 도성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해태상의 원 위치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앞으로 나와 있어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 사이인 사헌부 터에 있었고 광화문도 정남향에서 약간 틀어져 (문화재청은 5.6도 동쪽으로 틀어졌다함) 지금처럼 남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관악산방향을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해태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뿔을 단 상상의 동물이다.

중국의 고서 <異物誌>에 의하면 “동북지방의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해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잘못한 사람에게 뿔로 받는다” 고 되어 있어 해태상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동물로써 광화문 앞에 놓여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편 대전회통에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의 입식(笠飾)에 옥정자(玉頂子)를 사용하고 대사헌의 흉배(胸褙)는 해태를 사용한다.”하였으니 광화문 육조거리에 있는 사헌부의 표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속설로 광화문의 조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억제하는 역할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복원된 광화문은 예전 조선총독부의 정남향으로 설계되어 남산에 있는 조선신사의 위치를 바라보고 있어 癸坐丁向인 북북동에서 남남서쪽을 바라보는 유현(幽玄)의 美를 살리지 못하고 당시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위치에 맞춰 복원위치가 정해져 현재까지 논란을 야기 시켜왔다.


여기서 한양도성의 철거당시의 상황과 복원과정을 살펴보자.

일제 때 남대문 성벽을 철거하기 전 1906년 이미 대구성곽을 철거하고 1907년 박중양에 의해 한양도성의 성벽을 매각해 통해 도시계획 비용으로 충당하려는 의견이 제시된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묵인 하에 한양도성의 성벽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 황태자의 한성방문과 맞물려 있었다.


한양도성의 철거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와 황실권위의 실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첩경이었다. 500년 조선 도읍지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강점 오 주년을 기념해 <시정오주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일부가 공진회장으로 탈바꿈하였다.   

1910년 5월 대한매일신보의 <북궐경매> (북궐은 경복궁을 일컬음) 에서는 “궁내부에서 동궁전 사천여 칸을 방매훼철하고 일대 공원을 作할 次로 去 9, 10일에 경매를 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정오주년조선물산공진회> 공사의 일환으로 들어선 <조선총독부박물관>은 해방 후 <구황실재산총국>,<문화재관리국>,<전통공예관>으로 활용되다가 95년 7월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철거되는 운명에 이른다. 공진회 이후 경복궁은 단골 박람회장으로 활용되다가 1926년 조선박람회라는 대규모 행사장으로 탈바꿈하고 1926년 순종이 서거하자 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 시키기에 이르렀다.


광화문의 복원에 대한 변명

화문은 또 한번의 시련을 겪는다. 동족상잔 육이오는 민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만큼 문화재의 수난도 극심했다. 국보인 “지광국사현묘탑”이 반파되고 급기야 광화문도 폭격에 맞아 문루와 석축일부가 파손되게 된다. <서울육백년사>에 의하면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궐문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고 문루는 소실되어 버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의식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구 150만의 전통도시는 파괴되고 많은 근대건축물도 소실되었다.

50년대 중반까지 신축보다는 재건에 치중했고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대학과 공공건물을 중심으로 신축되어진다. 이러한 시기 광화문의 복원은 때늦은 감이 있다.

건춘문 뒤 방치되어 있던 광화문의 석축은 1968년 12월 11일 박정희 대통령과 외교사절 문화계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41년 만에 복원되는 감격스런 날을 맞이하게 된다.

1968년은 문화재복원에 있어 감격과 탄식을 준 날이다.

위치는 앞서 말한대로 동측으로 5.6도 틀지 않고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의 정남향으로 세웠고 원위치에서 14.5 m 안으로 들어와 있다. 해태의 위치도 광화문에 근접해 있는 실정이다.

1900년대에 찍은 사진에는 광화문 양쪽으로 난간과 계단이 뻗어 있었다.

나는 복원에 대한 의문을 복원된 다음 해인 69년 발행된 공간 1월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예가 석도윤씨의 <복원된 광화문 준공식 날 >을 요약해 보면 ,

“광화문이 총독부 청사를 가리지 못해 안타깝다. 이는 처음 광화문이 세워졌을 때 주변의 높은 건물이 없었을 터이고 안계(眼界)에는 남대문만이 보였을 터이다. 또한 한글전용문제가 합일되어 한글전서체를 사용할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은 “원형 그대로란 문화재복원”을 말하는 것보다 “역사문화환경의 조성이란 측면에서 문화재개발”이란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문화재 보존과 활용을 광범위하게 해석한 것이지만 용어상의 차이점을 알수 있다. 문화재보호법 2조 2항의 <문화재보호의 기본원칙>인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1999녀 1.29일에야 명문화된다.

“光化門이 아니라 왜 광화문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로 광화문을 적은 것은 앞서 석도윤 선생의 글에서처럼 당시 한글전용의 사회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 본다.

그림5) 복원된 광화문

그럼 왜 경복궁의 정문을 복원하면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했을까.

당시 광화문을 설계한 강봉진씨에 의하면 “서울특별시의 주관으로 6.25때 불타버린 광화문을 그 자리 (일제 때 옮긴 건춘문 북쪽, 수도육군병원 앞) 에 재건하기 위한 계획에 따라 원형대로 목조로 설계한 바 있었으나 그 후 대통령각하의 지시에 의해 이 계획은 폐기되고 광화문을 원래 있던 중앙청 앞 정문 자리에 원형인 목조대신 철근콘크리트조로 재건키로 됨에 따라 금년 초에 다시 위치변경과 구조변경에 대한 재설계를 시행하고 지난 3월 15일에 공사를 착공한 이래 연내에 준공을 목표로 목하 주야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2)로 적고 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철근콘크리트조로 만들었다는 말인데 당시 상량문을 보니 그 이유가 나와 있다.

“홍종철 장관과 하갑청 국장이 대통력의 뜻을 받들어 중앙청 앞 옛자리에 광화문의 복원중건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복원공사에 있어 두가지 원칙이 세워졌는 바 하나는 실측도에 다시연구와 검토를 가해 이 문의 옛모습을 완전히 구현시킬 것과 또 하나는 자재에 있어 석재는 옛것을 쓸 수 있는 대로 쓰되 목조부에 관하여는 국산의 사정과 외국의 추세를 감안하여 목재대신 철근 콘크리트로 하며 개와는 한식의 것을 쓰기로 한것이다. 서기 1968년 10월 17일 15시”


현재 석축의 속에는 탄흔으로 사용 불가한 것을 제외한 원래의 석축이 20~30% 들어갔고 목재는 철근과 목재를 혼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의 목재를 구하기 쉽지 않은 이유와 복원기술의 결여라고 볼수 있겠다. 또한 조국근대화란 기치 하에 재건한 오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답사를 하다보면


“광화문은 왜 한글로 쓰여져 있나요” 

“광화문 석축은 왜 시멘트로 되어있고 성문은 왜 철조 인가요” 라는 질문을 숱하게 받는다.

“글쎄요. 과거를 반드시 오늘의 시각을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의 평가란 현재의 것만이 아닌 미래의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바로 그 시대의 것이 중요 하겠죠” 라 애써 그 시대의 대변인이 되어 버린다.  


광화문의 재복원, 과연 필요할까.


2003년 흥례문의 복원과 근정전이 보수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했다. 이제 광화문의 잘못된 복원에 따른 전격적인 재복원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을 해체하고 도로 안쪽으로 들어간 광화문을 내밀면서 난간설치와 월대복원문제, 西십자각의 복원을 다각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앞으로 내밀었을 때 도로문제와 광화문의 방향을 동으로 5.6도 틀었을 때 도로의 형태가 변형되는 것이 고민거리다. 지난 2003년 7월 공청회에서 주민들은 복원을 위해 또 다른 변형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되었던 광화문을 보면 언제나 우리나라 문화재의식의 발전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 상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기존 광화문을 해체하는 희생을 치르고 복원을 결정한다면 이건 시키는 것이 문화재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하나를 얻고자하면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당시 사람들은 철근과 시멘트가 만년대계를 위해 석축을 대신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게다가 당시 광화문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광화문”이란 한글현판이 光化門을 대신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사랑과 문화재사랑은 그 일화가 유명하지만 원형복원이란 면에서는 볼 상 사납다. 그러나 누가 “光化門” 쓰더라도 원형은 아니지 않는가. 복원은 復元이며 어차피 다른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광화문은 문화재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광화문은 또 다른 의미의 문화재가 분명하다.


1963년 정부에서는 광화문을 포함한 경복궁 일대를 사적 117호로 지정한 바 있어 사적지에 함 한다고 했다. (사실 확인을 문화재청에 하였더니 광화문은 당시 신문발표와는 달리 사적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2004년 말 에 옮김에 따라 2005년을 기해 광화문 일대는 문화재청으로 이속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광화문은 사적지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라 원형훼손 및 이건이 쉽지 않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선총독부(구 중앙청) 건물 해체가 불과 10여 년 전에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negative 문화재는 문화재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철거되어 버렸다. 지금에 와서 근대건축물의 소실 방지를 위해 등록문화재 지정을 시행한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95년 총독부건물을 해체하는 날 “감격시대”가 울려 퍼졌다. 민족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총독부의 잔재를 없앤다는 날에 천황의 군대를 찬미하는 노래가 울렸다. 이것은 방송사고 이전에 얼마나 진정으로 역사를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근대의 건축물이 일제와 관련되었다고 모두 해체 철거한다면 우리 역사의 missing link는 점점 깊어질 것이 분명하다.


철근 콘크리트의 광화문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역시 역사의 기록이 아닌가.
광화문을 복원할 요량이면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 친필은 어디에 보관하고 광화문은 어디로 이건할 것인가를 먼저 논의하는 게 순서라 본다.


우리가 이러한 문화인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유형의 문화파괴의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광화문의 쓰임새는 많다. 민속촌이나 역사촬영지에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문루가 파괴되고 탄흔이 그대로 있는 석축위에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 전 유홍준 문화재청장께서는 “광화문” 현판을 정조의 한글 집자로 쓸 계획이라 밝혔다. 비록 광화문이 다시 파괴되는 한 이 있더라도 과거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원의 의미를 살려 이 시대의 자랑스런 韓國人이 써야만 한다. 이것은 복원의 기록을 위한 것 이다.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는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조국근대화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의 오류로써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역사, 원형을 간직한 문화재 그러한 역사의 향기를 그리워할 뿐이다.
missing link를 기록해주는 광화문은 문화재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재인 것이다. 이 땅 오천년의 역사는 自省의 역사도 영광의 역사도 모두 간직한 地層위에서 존재할 뿐이다.

역사의 발전은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록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질 수 있다고 감히 믿는다.


小窓 차문성 씀

















        그림 5) 복원된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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