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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15 11:57:43, Hit : 4775, Vote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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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해체보수작업에 대한 소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해체보수작업에 대한 소회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간다. 1960년대 후반 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위해 민족적 아이텐터티의 확립이란 이름으로 구성한  '조상위원회' 설립 후, 최초로 만들어진 광화문 충무공상이 해체보수작업을 위해 철거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상>은 조각가 김세중교수가 1967년 봄, 제작에 착수해 1968년 4월에 건립했기에 무려 42년만에 대수술이 진행되는 셈이다.
당시 조각가의 고민 중 하나는 민족의 구국영웅에 대한 참고를 할만한 시각적 전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1950년대 진해에 건립된 윤효중의 이순신동상과 부산 용두산공원에 있는 김경승의 충무공, 현재 해사박물관에 있는 김은호의 이순신영정처럼 이미 만들어진 것이 있었지만 이들은 항상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김은호의 영정이 문교부표준영정으로 되어 있었기에 갑옷과 문양 등 김은호의 표준안을 참고했지만 투구는 두정린 형식을 채택해 중국 양식이란 논쟁을 피했다. 이순신동상이 가진 특징은 한발을 앞으로 뺀 콘트라포스토(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의 예)의 자세와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결연한 의지가 특징으로 지적된다. 특히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장군의 칼에 새겨진 一揮掃蕩 染血山河(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산하가 피로 물든다) 라는 문구는 조각상에 그대로 새겨넣었다. 조각상을 제작 중에 광화문 사거리가 20차선으로 확장되자 조각상의 크기도 수정되어 무려 6.5m로 확대되어 주물제작의 어려움으로 제작이 연기되기도 했다. 여러번 시행착오 끝에 이순신상은 몸체를 2부분으로 나눠 제작되었다. 이렇게 광화문 충무공동상은 탄생되었고 서울의 상징적 존재로 남게되었지만 당시 군사정부와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조형물은 군사정권의 당위성과 함께 1970년대 전국에 걸쳐 상징적 조형물과 성역화작업이 진행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을 공공조형물로 부르고 있다.공공조형물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2009년 완성된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은 언론의 대대적인 홍보와는 달리 다른 나라의 도심에 설치된 조형물과 비교해 볼 때 그 작품성은 별도로 치더라도 역동성과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높은 축대위에 설치되어 위압적이며 동세가 떨어지고 전근대적인 조형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흔히 초등학교 동상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이상의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익히 아는 도버해협을 마주한 프랑스의 도시 칼레의 예를 들어보자. 100년  전쟁기간동안 칼레는 11개월 동안 완강한 저항을 했지만 결국 식량이 떨어져 영국 에드워드 3세에 항복을 했다. 에드워드3세는 시민대표 6명을 교수형 시키는 대신 시민들의 목숨은 살려준다는 얘기가 바로 <‘칼레의 시민>(1884-1888, 브론즈, h230cm)이 탄생한 배경이다. 결국 사형당일 만삭인 왕비의 청으로 이들의 목숨을 살려준다.
칼레 시는 당시 관행대로 희생한 6명의 영웅을 똑 같은 크기 유사한 형태로 제작하기를 원했지만 로댕은 이 같은 구상이 단조롭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이 이야기의 소재만으로 6명의 군상을 위대한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벗어버린 옷과 밧줄에 매인 목, 추위와 두려움 그리고 체념적 동작을 한 각기 다른 포즈로 절망감을 표현했다. 로댕은 이 작품을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낮은 받침대를 요구했지만 칼레 시는 관행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높은 받침대 위에 작품을 올려둔다. 이 같은 로댕의 희망이 이뤄진 것은 그로부터 무려 50년이 지난 뒤 그의 위대한 작품세계가 현실에서 구현된다.
노블리스(명예; 고귀한 사람들) 오블리제(도덕적 의무)를 표현한 로댕의 예를 들지는 않더라도 도심의 모뉴멘트는 역사성과 동시에 한 시대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 프라하 구도심 한 가운데 있는 종교개혁가 얀후스의 동상(그림2: 프라하 도심에 있는 얀후스 동상)에서 볼 수 있는 “서로 사랑하라. 모두에게 진리를 베풀라”라는 한 신학자의 외침을 광화문광장에서는 들을 수 가 없다. 아직도 가진 자의 특혜, 귀족적 우월성 때문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빌어 구상적 모티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지 궁금하게 한다.
대기와 적막한 바람과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작품을 안치하고자 하는 로댕의 신념과 소망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세종대왕을 하늘처럼 높고 금빛처럼 빛나는 배경을 가진 중세화가들의 캔버스로 여지없이 만들어 버린다. 광장이 가지는 소통과 인간 교류의 장이란 기본적인 바람 외에 철학적 절규가 필요하다.

예술이 될 역사적 사건들이 유구한 세월의 상흔을 가진 이 땅에서 어찌 찾을 수  없을까. 이러한 인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예로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청으로 끌려간 삼학사를 시대적 편린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고종 30년(1893) 대보단에 나아가 고종은 “나라를 존중하는 큰 의리에서는 삼학사가 최고이고 임진왜란때 나라를 회복한 공훈에서는 권율이 바로 으뜸가는 공신이다.”라 말한 삼학사의 기개가 이 시대에는 이미 망각된 존재일까. 사실 이들 삼학사에 대한 기념비적 동상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부여의 창절사. 영천의 장엄서원 그리고 당시 전쟁터였던 남한산성 현절사란 곳에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지만 근대적 의미에서의 예술적 조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1933년 5월 13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三學山斗’에 대한 글귀가 실렸다. “조선의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은 인물”이란 의미로 청태종이 친히 조선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삼학사에게 내린 전액으로 삼학산두의 이수부가 봉천(오늘의 심양)에서 발견되었다. 삼학산두 비석은 청조가 망하자 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 비석이 땅속에 묻혔다가 조선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심양시 춘일공원에 ‘삼학사 중수비’를 건립하고 삼학사의 절개와 민족혼을 지켜 조선독립의 염원을 기념하는 추모제가 열렸지만 후에 중국 공산당 홍위병에 의해 다시 내팽개쳐져 현재는 발해대학에 전시중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삼학사 공공조형물이 광화문네거리에 세워져야 할 것은 광장이 가진 공공적 역할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공공예술은 장소가 갖는 특성에 따라 변화하고 시민과의 소통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복궁은 과거 왕조의 페쇄된 영역이지만 광장은 시대를 넘어 언제나 시민에게 개방된 열린 장소였다.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거리에 과거와 현재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적 사명감과 이를 발굴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 아닐까. 바람과 대기 속에 그의 작품을 맡기려는 로댕의 숭고한 예술혼이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텍스트를 광장에 내려놓는 것이 새로운 소통의 방식 일께다. 100년 전쟁 후 참담한 프랑스의 소도시 칼레를 살리려는 6명의 시민대표를 위대한 표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없는 인간적인 고뇌와 고독으로 표현한 로댕의 예술혼을 삼학사를 통해 되살릴 수 는 없을까.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 책임이 아닌지 고민해 본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없는 광화문은 왠지 쓸쓸하다. 한국 현대사를 지켜본 충무공 동상에 대한 애정 뿐 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 가슴속 충무공 이순신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빚일지도 모른다. 이순신장군이 광화문광장에 다시 서는 날, 이제는 더 이상 철거의 논쟁과 역사성을 떠나 서울을 대표하는 공공조형물로써 열린광장과 함께 다시 한번 우뚝 서길 기대해 본다.


 


참고)


안은정, 환경조형물의 기능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2006


정하영, 설치미술에서 공간의 재해석, 잔북대, 2007


김미정, 1960~70년대 한국의 공공미술, 홍익대 2010
김재경, 도시외부공간공공미술설치 개선방안연구, 한양대, 2001(충무공사진)




(2010-12-31 10:22:57)  
보수를 위해 철거된 지 40일만인 2010년 12월 23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광화문 광장에 누런 구리빛을 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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