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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대마도(對馬島) 지역
이즈하라(嚴原) 지역
세이잔지(西山寺)
가네이시죠(金石城)
반쇼인(万松院)
대마(對馬) 역사민속자료관
죠오쥬인(長壽院)
슈젠지(修善寺)
도모노우라 지역
안코쿠지(安國寺)/ 아미다지(阿彌陀寺) /우시마도(牛窓) 지역
이도(井戶, 지금도 물이 나오는 우물) / 오까야마성
고류지(廣隆寺) / 야사카(八坂)신사 / 야사카노토오(八坂塔)

기요미즈데라(淸水寺)/기요미즈야키(淸水燒)/미미즈카(耳塚, 이총)/도요쿠니(豊國)신사?호오코오지(方廣寺)
후시미모모야마죠(伏見桃山城)/도오다이지(東大寺)
고분시대(3세기후반-7세기)
아스카문화
이타부키노미야(板蓋宮) 전승지
이시부타이(石舞台)고분
가와라데라(川原寺)/가메이시(龜石)
미세마루야마(見瀨丸山)고분/7세기 아스카(飛鳥)시대 건축의 특징

호류지(法隆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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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금요일
오늘의 행로
가네이시죠(金石城) > 반쇼인(万松院) > 대마역사민속자료관 > 대마도돌담 > 죠쥬인(長壽院) >

슈젠지(修善寺) > 이즈하라항 하까다항 하까다역

슈젠지(修善寺)


아메노모리 호슈 사진

「義兵將崔益鉉殉國記念碑」(의병장 최익현 순국기념비)가 있다.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은 1906년 6월에 전라북도 태인에서 투쟁했다가 체포되어 원수의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대마도 감옥에서 굶어죽고 유해가 슈젠지(修善寺)에 안치되었다. 그의 발언과 행동은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의 침략과 부르주아적 개혁을 거부하는 점으로 시종일관되었다.

■ 아메노모리 호슈우(雨森芳洲)
■ 발행 : 동아시아 교류의 집 아메노모리 호오슈 암자
■ (東アジア交流ハウス 雨森芳洲庵)

출생
아메노모리 호슈우(雨森芳洲)는 칸분(寬文) 8년(1668) 5월 17일에 타카츠끼초 아메노모리(高月町 雨森)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슌료우(俊良)라고 했고, 소년시대에는 또우고로우(東五郞), 그 후에는 노부끼요(誠淸)라는 이름으로 마뀌었습니다. 호슈우(芳洲)라는 것은 호라고 해서 본명 이외에 불렸던 이름입니다.

학자의 길을 택한 결의
12세가 된 호슈우(芳洲)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이어가도록 권유받아서, 쿄오또(京都)에서 가장 이름 있는 타까모리(高森)라는 의사에게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호슈우는 아버지에게 지지 않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큰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공부에 전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타까모리(高森)선생님이, 「중국에는,『글을 배우면 종이를 소비하고, 의술을 배우면 사람을 소비한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친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듣고 있던 호슈우(芳洲)는 무척 놀라서, 「종이를 헛되이 쓰는 것은 그래도 좋다. 그러나 잘못으로 귀중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과 같은 일에 종사하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가 없다」라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온 의학을 그만 두고 학자가 되려고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학문의 길
호슈우(芳洲)가 17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호슈우(芳洲)는, 그 다음 해 어머니와 함께 에도(江戶)로 가서 키노시타 쥰안(木下順庵)이라는 유명한 유학자 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힘께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는, 후에 훌륭한 학자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 큐우소우(室鳩巢)? 사까키바라 코우슈우(□原□洲)? 기온 난까이(祇園南海)?아메노모리 호슈우(雨森芳洲) 등 다섯 사람은 『모쿠몬(木門)의 5선생』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유명합니다.

쓰시마(對馬) 관찰사(또노사마--殿樣)를 섬김
호슈우는 겐로쿠(元祿) 2년(1689) 22살 때, 키노시타(木下)선생님의 권유로 쓰시마 관찰사(對馬藩)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은 에도(江戶)의 쓰시마 관찰사(對馬藩)의 관처에서 관찰사(또노사마--殿樣)인 소우 요시자네(宗義眞)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쓰시마(對馬)는 일본 본토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서쪽 바다에 있는, 조선과 가장 가까운 섬으로써, 그 섬을 다스리고 있던 쓰시마(對馬)의 절도사는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로부터 조선과 무역을 맡는 임무를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또, 조선으로부터 조선통신사들이 토쿠가와(德川) 장군의 대가 바뀔 때마다 축하하러 일본으로 왔었는데, 쓰시마 관찰사(對馬藩)가 통신사를 영접하고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외교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쓰시마 관찰사(對馬藩)였으니까 그 밑에 통역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고, 많이 아는 훌륭한 학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학자로 호슈우(芳洲)가 선발되었던 것입니다.
26세 때, 그는 처음으로 쓰시마(對馬)로 갔습니다. 거기서 호수우(芳洲)는 「쓰시마(對馬)는 일본을 대표해서 조선과 친교를 맺는 관찰사(藩)이기 때문에 학문을 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해서 학교를 세우고 섬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호슈우(芳洲)는 중국어는 잘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조선통신사가 올 때 조선어를 잘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36세부터 3년간 조선에 유학해서 매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조선에 가서는 말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지리, 역사,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관습, 그 외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까지도 배워 왔던 것입니다.

외국 사신 영접사(신몬야쿠--眞文役)로서 활약한 호슈우(芳洲)
에도(江戶)시대는 약 26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 조선통신사는 12회나 일본에 왔습니다. 그 여덟번째와 아홉번째에 호슈우(芳洲)는 외국 사신 영접자로서 활약하였습니다.
통신사의 일행 중에는 정치가뿐만 아니라 화가, 소설가, 시인, 군인, 곡예사 등 조선에서도 특히 뛰어난 사람들이 300명에서 500명이나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쓰시마(對馬)를 통해서 에도(江戶)에 가서 조선에 돌아오는 데에 반년이나 걸렸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말이 다르고, 풍습이나 생각하는 방법도 전혀 달랐기 때문에 조선사람들과 일본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는 호슈우(芳洲)의 수고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슈우(芳洲)는 일기 속에는, 「한자에서 하나의 글자를 잘못 읽으므로 해서, 말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되어서 8일간이나 고생을 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또, 아홉번째의 통신사가 에도(江戶)에 도착했을 때, 호슈우(芳洲)가 너무나 지쳐 곤히 잠들어 버려서, 호슈우(芳洲) 대신에 통신사에게 건넬 한자 문장을 쓸 사람이 없어서 곤란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외국 사신 영접사라고 하는 일은 중국에 대한 지식이 있고, 조선어를 능숙히 할 수 있어야 하고, 게다가 조선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이해를 하고 있는 호슈우(芳洲)가 아니면 능히 해낼 수 없는 큰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조선과의 우호에 진력한 호슈우(芳洲)
외국 사신 영접사로서 활약했던 호슈우(芳洲)는 61세 때, 이웃 나라와 사이 좋게 지낼 것을 구체적으로 썼던 『교린제성(交隣提醒)』이라는 책을 내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외국과 사이좋게 사귀는 데에는 서로 진심을 교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외국과 교제할 때에 귀중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이 외국과의 무역의 창구로써 열었던 곳은 나가사끼(長崎)와 쓰시마(對馬) 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쓰시마(대마도)를 통해서 조선으로부터 인삼이랑 목면, 생사를 사왔던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그 대금을 은화로 지불하고 있었습니다만, 많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질이 나쁜 은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조선사람들이 알고서 엄중히 비난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사이좋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도막부(江戶幕府)는 곤란해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아베노모리 호슈우(雨森芳洲)에게 의견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호슈우(芳洲)는 「국가간의 교제는 서로 신의로 사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설파했던 것입니다. 일본과 조선의 우호관계가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기를 바라고 노력했던 호슈우(芳洲)는 쓰시마(對馬) 사람들로부터도 조선사람들로부터도 존경 받았습니다. 조선통신사들은 호슈우(芳洲)의 집 앞을 통과할 때에는 행차 가마에서 내려서 진심으로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호슈우(芳洲)도 54세가 되었을 때 무릎이랑 허리가 무척이나 아파서 사신 영접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호슈우(芳洲)는, 쓰시마(對馬)에 건너가서부터는 한번도 고향인 시가(滋賀)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고향을 평생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호슈우(芳洲)가 썼던 많은 책들은 지금도 호슈우 암자(雨森芳洲庵)의 서고에 귀중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생명을 걸고 끝까지 잘 해 내려고 노력을 하였으며, 평생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었던 호슈우(芳洲)는 호우레끼(寶曆) 5년(1755) 1월 16일 쓰시마(對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새로운 우정이 움틈
일본과 한국은 메이지(明治)시대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랜 세월 호슈우(芳洲)가 바랐던 서로의 입장을 평등하게 인정하며 사귀는 공평한 외교관계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양국의 역사적 과거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우정이 싹트고 있습니다.

호슈우(芳洲)의 고향, 타까츠끼초 아메노모리(高月町 雨森)에 있는 호슈우 암자(雨森芳洲庵)에는 한국으로부터 많은 중학생? 고교생이랑 일반인들이 찾아와서, 호슈우(芳洲)에 대하여 공부하고, 당시의 일본과의 관계를 보다 깊이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찾아와서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을 설파했던 호슈우(芳洲)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일본에 가장 가깝고 옛날부터 일본 문화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해 준 나라와 이제부터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사귀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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