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창 박물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소개 | 소창 칼럼 | 역사의 강물에 서서 | 옛길 따라서 | 박물관 이야기 | 문화유산 답사기 | 역사문화 보고서 | 열린 사진관 | Travel | 문화풍경 | 열린 마당

-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도래인 연표

조선통신사 연표
★를 붙인「조선통신사」는 12번이지만 그 이외에도 대마도주가 부산에 파견한 참판사(大差倭) 등과 조선 부산부가 대마도에 파견한 문위행(問慰行) 등이 260여 년간에 각각 50여 번 왔다갔다 했다.
무로마치(室町)시대(13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도, 에도(江戶)시대(17세기 초부터 19세기중엽) 조선통신사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양국의 사절단이 자주 왔다갔다 했었다. 고려와 조선이 파견한 사절단은 공식적인 것만으로도 12번이었다. 한편 일본이 파견한 사절단은 약 70번이었다.

서기 관련 사항

1579
1580

1589

1590
1592~
1598
1599

1600
1603
1604


1605

1606

1606


1607
1607

1608
1608


1609
1611
1615

1616 

1617
1618 
1623 
1624
1627 
1628
1629 

1633 

1634 


1635 


대마도, 宗義智(소오요시토시)가 쓰시마도주로 취임
일본, 以酊庵(이테이안) 玄蘇(겐소)스님이 室町(무로마치)시대 최후의 일본國王使(국왕사)로 한양을 방문
일본, 玄蘇와 대마도주 宗義智가 풍신수길의 명령으로 「일본國王使」 명칭으로 한양을 방문
室町시대 마지막 조선통신사가 방일
임진왜란
일본군, 조선에서 퇴각하고 임진왜란 끝남
일본, 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아 대마도주 宗(소오)씨가 조선과 국교회복 교섭을 개시
일본, 풍신씨파와 반풍신씨파와의 전쟁
일본, 德川家康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하고 덕천막부가 성립
조선국왕, 대마도 주민에게 부산에서의 무역활동을 허가
대마도주 宗義智와 玄蘇의 안내로 探賊使(탐적사) 惟政(松雲대사)과 孫文或이 교토(京都)에서 德川秀忠(도쿠가와히데타다)과 회견
惟政과 孫文或이 교토 伏見(후시미)성에서 장군 德川家康과 회견
일본, 德川秀忠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조선, 대마도주 宗義智에 의한 통신사 파견요청에 대해 德川家康의 國書와 정릉, 선릉을 판

범인의 인도를 요구
대마도주, 德川家康이 서명한 國書와 범인 2명을 조선에 인도
★回答使兼刷還使(회답사겸 쇄환사) 呂祐吉(여우길) 일행 467명 방일하고, 대마도주 宗義智와 玄蘇의 안내로 江戶성(도쿄)에서 장군 德川秀忠과 회견
呂祐吉 일행, 돌아갈 때 駿府성(시즈오카)에서 德川家康과 회견
玄蘇, 부산포에서 己酉約條(기유약조)를 체결(그것은 조선과 대마도와의 무역협정이었지만 이후 양국간의 기본조약이 됨)
玄蘇, 부산포에서 己酉約條(기유약조)를 체결(그것은 조선과 대마도와의 무역협정 이었지만 이후 양국간의 기본조약이 됨)
玄蘇 일행 320명, 弔問使(조문사)로서 부산에 건너감
대마도에 以酊庵이 완성됨, 주인인 玄蘇 돌아감
宗義成이 대마도주로 취임
일본, 오오사카(大阪)성 전쟁에서 풍신씨가 완전히 멸망
일본, 德川家康 사망
덕천막부, 기독교를 금지하고, 명 나라 이외의 외국선 기행지를 일부지역만에 한정
★回答兼刷還使 吳允謙 일행 428명 방일하고, 교토 伏見성에서 장군德川秀忠과 회견
부산에 豆毛浦倭館(두무포왜관)이 완성
일본, 德川家光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回答兼刷還使 鄭立 일행 300명 방일하고, 장군 德川家光(도쿠가와이에미쯔)과 회견
조선, 정묘호란
대마도주 宗義成(소오요시나리)가 부산왜관을 개수
대마도 사절인 規伯玄方스님 일행, 「일본國王使」이름으로 부산에 건너가고 조선국왕과 한성에서 회견
덕천막부, 해외와의 통행과 무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
일본, 1606년에 대마도주가 國書를 위조하고 조선에 건넨 사건이 드러남
덕천막부, 국서 위조사건에 대한 심리를 개시하고, 사건 해결 때까지 대마도 소속 배의 조선 왕래를 금지
조선, 대마도주 宗義成이 요청한 馬上才 파견을 결정
일본, 장군 德川家光이 국서 위조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림(대마도주 宗義成은 무죄, 柳川調興과 規伯玄方스님은 유배)
덕천막부, 통신사 방일을 1636년에 실현하도록 대마도주 宗義成에게 명령하고, 장군의 칭호를 일본國王大君으로 함
일본, 장군 德川家光이 조선의 馬上才를 관람
덕천막부, 외국선의 입항과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만으로 한정하고,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귀국을 전면적으로 금지
덕천막부, 교토(京都) 5개 절에서 고른 학자승을 대마도 以酊庵에 주재하도록 하고 조선과의

 

서기 관련 사항

1635 
1636 


1636
1639

1643

1644

1649

1651
1655

1658
1664
1667
1673
1678
1680
1682

1683
1685
1686
1689
1696

1700
1705
1709



1711



1711
1713
1716
1717
1719
1727
1729
1732
1745

1748
1755
1760

1764



1766
1782~1787
1783
1786

1787
1788
1804
1811


1812


1832

외교문서를 관리 감독하게 함
일본, 닛교(日光) 東照宮이 완성 (德川家康묘지)
★朝鮮通信使 임광 일행 475명 방일, 장군 德川家光과 회견하고 日光東照宮에 참배
조선, 병자호란
조선, 대마도에 대한 사절단인 問慰行을 1859년까지 51번 파견
덕천막부, 포르투갈 배의 일본입항을 금지
덕천막부, 조선과의 무역을 장려
★德川家綱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尹順之 일행 462명 방일, 장군 德川家光과 회견하고 하고 日光 東照宮에 참배
일본, 오키나와의 琉球國慶賀使(유구국경하사) 방일, 장군 德川家光과 회견하고, 이후 장군이 바뀔 때마다 오키나와에서 慶賀使를 파견
일본, 琉球國謝恩使 방일, 장군 德川家光과 회견하고, 이후 琉球왕이 바뀔 때마다 오키나와에서 謝恩使(사은사)를 파견
일본, 德川家綱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趙珩(조형) 일행 488명 방일, 장군 德川家綱과 회견하고 日光 東照宮에 참배
宗義眞(소오요시나리)이 대마도주로 취임
대마도주, 조선으로 무기를 밀수출한 사람 수십명을 처형
일본, 조선으로 무기를 밀수출한 장사꾼 등 38명을 처형
조선, 부산왜관의 초량 이전을 허가함
부산왜관 초량에 이전
일본, 德川綱吉(도쿠가와쓰나요시)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尹趾完(윤지완) 일행 475명 방일하고 장군 德川綱吉과 회견, 이후 日光東照宮 참배가 폐지됨
대마도와 조선, 왜관에서의 일본인 항동규정을 체결(癸亥約定)(계해약조)
덕천막부, 나가사키(長崎)에서만 하고 있는 외국무역에 상한액을 설정하고 제한
덕천막부, 조선무역에 상한액을 설정하고 제한
일본, 雨森芳洲(아메노모리 호오슈)가 대마번의 유학자로 취임
울릉도에서 도토리(鳥取)에 건너간 安龍福(안용복), 조선으로 돌아옴
덕천막부, 일본인이 울릉도에 건너가는 것을 금지
덕천막부, 조선무역의 증액을 허가
대마도의 雨森芳洲, 5년간 왜관에서 일함
일본, 德川家宣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일본, 新井白石(아라이하쿠세키),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접을 간소화하기를 제기


덕천막부, 新井白石 제기에 의하여 통신사 대접을 간소화하고, 장군의 칭호를 「일본국왕」으로 함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趙泰億(조태억) 일행 500명방일하고, 대마도에서 新井白石에 의한 대접 간소화를 알게 됨
趙泰億 일행, 장군 德川家宣과 회견
일본, 德川家繼가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일본, 德川吉宗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덕천막부, 新井白石에 의한 대접 간소화를 부정하고 종래 방법으로 변환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洪致中 일행 479명 방일하고 장군德川吉宗과 회견
조선, 어민의 일본 도항을 방지하기 위해 원양어업을 금지
대마도의 雨森芳洲, 2년간 왜관에서 일함
대마도, 以酊庵이 화재로 인해 西山寺에 이전
일본, 德川家重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洪啓禧(헝계희) 일행 475명 방일하고 장군德川家重과 회견
대마도, 雨森芳洲가 사망
일본, 德川家治가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통신사 趙? 일행 462명 방일하고 장군 德川家治와 회견
일행이 돌아갈 때, 오사카(大坂)에서 대마번 소속 무사 鈐木傳藏이 道訓導인 崔天宗을 살해 趙?, 고구마 재배 방법을 조선으로 알림
덕천막부, 조선과의 사적무역을 단절하기 위해 대마번에 해마다 금 12000兩을 지급
일본, 흉년
일본, 淺間산 대분화로 인해 큰 피해
일본 江戶(도쿄),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
일본 江戶일대, 대홍수로 인해 큰 피해
일본, 德川家齊가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조선통신사 방일 일정을 연기
조선통신사를 대마도에서 대접할 것을 결정
★조선통신사 金履喬(김리교) 일행 336명, 덕천막부 사절과 대마도에서 회견하고 國書를 교환 (易地聘禮)
1811년을 마지막으로 이후 통신사 방일이 실현되지 않음
덕천막부, 조선통신사를 대마도에서 대접(易地聘禮)하기 위해 해마다 대마도에 금 2500兩을 지급하기를 결정하고, 조선외교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 (1817년에 정지)
조선, 영국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내항해서 외국의 압력이 강해짐

 

서기 관련 사항
1837


1853

1855
1858
1862

1866
1868

1872
1873
1875
1875


일본, 德川家慶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조선과 일본, 조선통신사를 오오사카(大阪)까지 초청하기를 합의했지만 양국의 국내사정으로 인해 연기를 거듭했다가 중지됨
일본, 德川家定이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일본, 미국 함대가 내항해서 외국의 압력이 강해짐
조선과 일본, 1865년에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대접할 것을 합의
일본, 德川家茂가 征夷大將軍으로 취임
조선, 左議政 趙斗淳(조두순), 대마도에 지급할 면포와 쌀 징집의 지체는 교린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
일본, 대마도 以酊庵에서 학자승이 주재하고 외교문서를 관리 감독하는 제도를 폐지
일본, 덕천막부가 무너지고 명치유신정부가 성립됨
일본, 신정부 수립을 알리는 사절이 부산에 건너감
대마도, 조선과의 통교관계 무너짐
조선, 대원군이 실권을 잃음
초량왜관을 일본외무성이 접수하고, 부산왜관 260년간의 역사가 막을 내림
명치정부, 군함을 부산으로 파견
운양호사건

일본서기를 인용한 이유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사료가 빈약하였기 때문이며 공통된 사항을 위주로 하되 불확실한 것은 제외하였음.

 

Copyright(c) 2004 cha@sochang.net All Rights Reserved./ 016-9234-9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