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1. 도래인들의 활약
<日本書紀>등 고문헌 가운데 5세기 후반의 도래인에게 대한 기술은 신뢰할만한 기사가
많다. 예를 들면 463년에「新漢」인「陶部高貴, 鞍部堅貴, 畵部因斯羅我, 錦部定安那錦, 譯部卯安那를
上桃原과 下桃原 그리고 眞神原」에 배치하고 470년에는 「才伎」인 「漢織, 吳織, 衣縫兄媛,
弟媛」을 배치했다고 <日本書紀>에 나온다. 「新漢」이란 「요새 온 백제인」이라는 뜻이다.
「陶部高貴」는 須惠器(가야토기와 비슷한 토기)를 만드는 기술자이다. 「鞍部」는 철제 마구나 무기를
만들고 「錦部」는 양잠과 비단에 대한 기술자이다. 그들이 일본열도의 생산기술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須惠器는 고열에 지탱할 수 있는 점토를 이용하고 녹로로 만들고 경사지를 이용한 가마(登窯→오름가마)에서
고열인 환원염으로 구운 토기이다. 그것은 4가지의 새로운 기술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6세기에는 큐슈(九州)지방은 물론 도호쿠(東北)지방까지 보급되었다. 신라계인 秦씨는 關西지방에서
충적평야를 개척하고 교토(京都)분지에서는 鴨川과 桂川 일대에 논을 풀어 호적으로 뛰어올라가게
되었다. 교토에 있는 松尾大社와 加茂神社 그리고 稻荷大社는 秦씨와 인연이 깊다. 또 교토 고오류지(廣隆寺)는
秦씨의 절이고 적송으로 만들어진 미륵보살상이 있는데 비슷한 불상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다.
백제계인 漢씨는 아스카지방과 가와치(河內)지방(현재 大阪 근처)에 살게 되었다. 河內지방 후루이치(古市)일대의
중심세력은 왕인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西文씨였다. 후에 西文씨는 西文씨, 武生씨, 藏씨 3개 씨족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 武生씨는 말 사육자으로 알려지고 馬史, 馬首를 칭하고 있었다. 古市 西淋寺는
西文씨가 지은 절이다.
아스카지방에 정착한 것이 東漢씨이었다. 다카마쓰즈카(高松塚)벽화고분으로 유명한 檜前이 그들이
산 지역이었다. 후에 아스카문화가 생긴 지역인 사실도 중요하다. 일본 고대 국가의 발상지인 그
지방에서는 8세기 후반에 거주자의 80~90%가 백제계 후손이었다는 고문헌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植原和郞은 고분시대에 간사이(關西)지방에서는 선주민의 후손 10%에 대해 도래인계
90% 비율로 혼혈되었다고 발표했다. 814년에 완성한『新選姓氏錄』은 平安京(현재 교토)과 그
주변 5개 지방에 살던 씨족 리스트다. 모든 씨족을 「皇別」「神別」「諸蕃」으로 분류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체의 30% 이상인 324개 씨족이 도래계 씨족(諸蕃)이고 「皇別」「神別」 중에도
도래계 씨족이 있다는 사실이다. 平安시대(794~12세기 말) 초기에 들어도 그들의 출신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河內(현재 大阪 근처)지방에서는 48개 씨족 중 70% 이상인 48개가 도래계
씨족이었다. 그들이 일본민족의 조상이 된 것이다. 간사이(關西)지방에 이주한 백제계 도래인들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 시기에 그 기반을 닦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2. 백제와 아스카(飛鳥)문화
大阪근처인 河內飛鳥(飛鳥寺가 있는 아스카와 다른 곳)에서 백제계 도래인을 검토해보자. 河內飛鳥는
동서 3km, 남북 8km인 좁은 지역이다. 그곳에 백제 琨伎(昆支,곤지)왕을 받드는 飛鳥戶신사가
있다. 『續日本紀』에 「百濟安宿(飛鳥戶)公奈登麻呂」라는 이름이 나오고 『新撰姓氏錄』에는 「飛鳥戶造---出百濟王,
比有王男, 琨伎王也」, 「飛鳥戶造---百濟王未多王之後也」라는 글이 있다. 그들은 백제 琨伎(곤지)왕과
未多(동성)왕의 후손을 자칭했지만 도대체 그것은 무슨 뜻인가?『삼국사기』에 곤지왕에 대한 이러한
기술이 있다. 475년 9월에 고구려의 대군이 한성을 포위해서 위기에 빠졌을 때에 백제 개로왕이
태자인 문주에게 난국을 피하고 왕통을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문주는 목만치(木滿致) 등과
웅진에 가고 백제왕조 재건을 의도했다. 문주왕은 동생인 곤지를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3개월 후에
죽었다는 글이다. 한편 『日本書紀』에는 『百濟新撰』을 인용하고 461년 7월에 개로왕이 동생인
琨伎(곤지)를 「왜(倭)」로 파견했다는 글이 있다. 그가 개로왕의 동생인지 문주왕의 동생인지
명확해지지 못하지만 그를 받드는 飛鳥戶신사의 존재로 보아 왜로 건너온 일은 사실인 것 같다.
하나 더 이상한 것은 문주왕과 남하한 목만치는 그 이후의 백제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門脇禎二는 5세기 말에 활약한 蘇我滿智가 바로 백제 역사에서 사라진 목만치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해석한다.
도래인을 관리로 중용했다는 雄略천황 조정에서 5세기 말에 외교와 재정면에서 활약했다는 蘇我滿智는,
倭 조정이 백제 관리인 목만치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蘇我씨의 계보전승 상에서
첫번째 실제 인물로 추측되는 滿智는 세기 말에, 아마 475~476년경에 건너온 백제 관리인
목만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본다. 덧붙이면 蘇我씨와 백제의 木씨와의 관련을 암시하는 것은 더
있다. 후에 蘇我씨 종가집으로 유명한 蘇我入鹿(鞍作)은 林大郞鞍作라고도 일컬었는데『新撰姓氏錄』에
林씨는「百濟國人, 木貴의 후손」이라는 글이 있다.그 사실도 반증의 하나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蘇我滿智의 아들이 韓子이고 손자가 高麗라는 이름으로도 고대 한반도와의 인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高麗의 아들인 稻目은 大臣이 되고 馬子, 蝦夷, 入鹿까지 계속되며 그 일족이 아스카(飛鳥)문화라는
꽃을 피우는 데 중심인물이 되었다.
문주와 남하한 목만치는 해구(解仇)일파와의 전쟁에서 지고 백제인들이 많이 건너오던 왜국에서 재기를
의도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 후에 蘇我씨 일족이 친백제 정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납득이 가는 것이다. 蘇我滿智가 정착한 곳은 大阪 근처인 河內에서 二上산을 동쪽으로
넘어간 曾我였다. 二上산 서쪽인 河內飛鳥에는 곤지 등이 있었다.
눈을 백제에 돌려보자. 웅진에 천도한 후에 군인인 解仇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이 5년간에
3명이나 바뀐 상태였지만 501년에 즉위한 무령왕이 20여년 계속되던 내분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의 남하를 막고 번영된 백제의 기반을 닦아내었다. 그는 국제적 감각에도 밝아 513년에
오경박사인 단양이(段楊爾)를 왜국으로 파견하였다가 3년만에 고안무(高安茂)로 교체하고 522년에는
司馬達等을 파견했다. 한편 521년에는 중국 양으로 사절을 파견하고 「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들인 성왕은 수도를 웅진보다 안전한 부여로 바꾸고 553년에
오경박사뿐만 아니라 易, 曆, 醫의 박사들을 왜국으로 파견했다. 554년에 易박사인 施德王道良,
曆박사인 固德王保孫 등이 건너왔다. 그 후에도 오경박사로 固德馬丁安, 王柳貴 등이 교체로 건너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오경박사를 잇따라 파견한 것이다. 그들이 유교의 고전인 오경, 즉 『易經』『詩經』『書經』『春秋』『禮記』를
강의했다. 이 일로 인하여 여러 사물을 추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양성화되고 고대
국가의 행정을 행할 관료들이 생겨난 것이다.
蘇我씨가 오경박사들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승을 받아들이고 절을 지은 것도 蘇我씨 일족이었다.
불교가 공식으로 전래된 때가 538년이고 552년에는 백제 성왕이 불상을 보내왔다는 글이 『日本書紀』에
있다. 그 때 대신인 蘇我稻目이 飛鳥小治田에 있던 집에 불상을 모셨지만 마침 천연두가 퍼졌다.
배불파인 物部尾輿 등이 그 원인을 불교 탓으로 돌리고 불상을 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 사건은
불교를 둘러싼 蘇我씨와 物部씨의 싸움으로 알려지지만 나는 단순한 종교 싸움이 아니라 도래인계
씨족과 토착계 씨족의 권력투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587년에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그 3년전인 585년에 鹿深臣이 백제에서 불상을 가져왔다. 蘇我稻目의 아들인 馬子는 집 옆에
절을 짓고 그것을 모셨다. 그런데 또다시 천연두가 퍼지고 敏達천황도 천연두로 죽었다. 다음에
즉위한 用明천황이 불교 여부를 자문하자 大連인 物部守屋이 배불을 주장하고 대신인 蘇我馬子는 숭불을
주장해서 심하게 대립되었다. 그 후 蘇我馬子는 物部守屋 집을 습격하고 物部씨를 망쳤다. 『日本書紀』는
587년의 일이었다고 전한다.
物部씨를 망친 蘇我馬子는 587년에 백제에 사절을 파견하고 절을 짓기 위한 기술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에 응해서 백제에서 건너온 건설, 기와, 노반 등 기술자들이 8년만인 596년에
절 건물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飛鳥寺(法興寺)이다. 609년에 금동석가여래상을 완성하고 금당에
모셨다. 그 불상을 만든 사람이 止利불사(司馬鞍作止利, 鞍作鳥)인데 그는 522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司馬達等의 손자이다. 止利의 아버지는 多須奈이다. 그들은 3대에 걸쳐 활약했다. 「司馬」는
백제의 姓이고 「鞍作」은 일본의 氏였다. 623년에는 法隆寺 석가삼존불도 만들었다. 法興寺(飛鳥寺)
창건 당시의 모습은 1953년부터 시작한 3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밝혀졌다. 탑을 중심으로 금당이
동, 서, 북쪽에 3개 배치되는 1탑 3금당 형식 가람이었다. 그것들을 회랑으로 둘러싸고 강당은
회랑의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람배치의 전형은 평양 근교에 있는 고구려 청암리폐사이다.
발굴한 결과, 동쪽과 서쪽 금당 크기는 부여 정림사의 금당과 똑같고 또한 서문 크기도 치수까지
정림사 중문과 똑같은 것이 밝혀졌다. 물론 기와는 백제양식이었지만 건물을 설계할 때 쓰인 자는
「高麗尺」(고구려尺)이었다. 고구려척이 백제에 전해지고 그것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구다라(百濟)尺」라고
부르고 후세에는 「구지라(鯨)尺」으로 널리 알려졌다. 法興寺(飛鳥寺) 이후, 7세기에는 法隆寺,
四天王寺(大阪), 廣隆寺(京都) 등이 건설되고 아스카(飛鳥)문화가 꽃피었다. 聖德太子의 스승으로
활약한 慧慈는 615년에 고구려로 돌아갔는데 慧慈는 662년에 聖德太子가 죽었다는 부음에 접하자
추선 공양을 드렸다고 한다.
法隆寺의 건립 시기에는 스님이 잇따라 건너왔다. 602년에 백제에서는 스님인 관륵(觀勒)과 법정(法定)이
건너오고 고구려에서는 융려(隆麗)와 운총(雲聰)이 건너왔다. 609년에는 백제에서 스님인 도근(道劤)과
혜미(惠彌), 다음 해에는 고구려에서 담징이 건너왔다. 관륵은 역법(曆法)과 천문지리에도 밝고
담징은 제지 기술과 그림 물감의 제조 기술을 전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井上光貞은 「그들의 활약이란 명치시대에 구미에서 건너온 외국인 교사들이 서양문명을 일본에 이식해서
근대화를 위해 한 역할과 비슷하다」라고까지 평가한다.
사실 624년에는 절이 46군데가 되었다.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부재를 짜고 단청으로 장식하고
기와로 지붕을 잇고 용마루 끝에 장식물을 붙인 호화롭고 화려한 건축물이엇다. 그것은 절 건설에
따른 설계자, 화가, 돌과 나무와 기와 등에 관한 기술자, 주조 기술자들에 의한 새로운 기술의
보급을 의미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대부분의 절들이 도래인들이 살던 지역에 있었다는 점이다.
3. 수, 당제국의 침략과 신라의 삼국통일
7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하는 시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지방을
지배하려고 싸우던 6세기 초에, 신라는 가야지방으로 진출을 도모하는 동시에 505년에는 동해안을
북상하고 강원도 삼척군 일대를 점령했다. 512년에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고 550년에는
한강하류지역으로 진출했다. 554년 7월에 狗川(충북 옥천)에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성왕을 죽였다.
다음 해인 555년에 신라 진흥왕은 서울 북한산을 순행했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532년에
금관가야를 잡고 562년에는 대가야를 잡았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정복전쟁을
전개하고 7세기에 들어 중국 수제국이 관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581년에 성립된 수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 양제는 612년에 고구려 공격을 명령했다. 200만 대군이 요하를 건너가고
4월에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했지만 2개월 넘어도 잡지 못하고 주력부대는 계속 남하해 갔다. 평양에
가는 길에는 이러한 산성이 많이 있고 산성마다 포위하는 부대를 남겨놓아서 압록강을 건너간 군대는
30만 5천명이었다. 고구려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 군대의 병참선이 평양 가까이까지 길어져 피폐하게
하는 작전을 짰다. 그랬다가 청천강에서 반격을 가하였고(살수대첩) 압록강을 건너 귀환한 수의
군대는 불과 2700명이었다고 한다. 격노한 양제가 다음 해에도 대군을 투입하고 요동성을 공격할
때 수나라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나라의 군대는 퇴각했다. 네번째 공격을 계획하던 617년에
중국에서 전국적인 농민폭동이 일어나고 수왕조가 무너졌다. 다음에 성립한 왕조가 당왕조이다. 한반도에서는
강대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신라를 공격하고 642년 7월에 백제가 신라 서쪽의
40여성을 점령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김춘추(무열왕)가 고구려에 가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연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과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동맹하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억류해 버렸다.
사태를 알게 된 신라에서 김유신이 군대 만명을 거느리고 북상해서 고구려는 김춘추를 석방했다는
기술이 『삼국사기』에 있다.
일본열도에서는 7세기에 들어 蘇我일족의 권세가 강화되었다. 628년에 推古천황이 죽어 蘇我馬子의
아들이며 대신인 蘇我蝦夷는 馬子의 딸과 결혼한 田村황자(舒明천황)를 즉위시켰다. 641년에 舒明이
죽자 蝦夷는 황태자인 中大兄황자(天智천황)가 어리기 때문에 古人大兄황자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聖德太子의 아들인 山背大兄황자가 중망을 얻고 있기 때문에 蝦夷는 편법으로 황후(皇極천황)를 즉위시켰다.
병든 蝦夷는 대신 자리를 아들인 蘇我入鹿에게 주었는데 『日本書紀』에 의하면 入鹿은 정치의 실권을
쥐고 권세는 아버지인 蝦夷 시대보다 늘었다고 한다. 그러한 蘇我씨를 타도할 쿠데타를 中大兄황자와
中臣鎌足이 계획하고 645년 6월에 『三韓』사절 환영행사 때 入鹿을 飛鳥 板蓋宮에서 죽였다.
급보를 들은 아버지인 蝦夷는 자결했다. 쿠데타 직후 皇極천황이 은퇴한 다음에 황태자인 古人大兄황태자는
즉위하지 않고 輕황자(孝德천황)가 즉위했다. 한편 蘇我씨 타도의 중신인물인 中大兄황자가 황대자로서
실권을 쥐고 연호를 제정해서 「大化」로 했다. 다음 해부터 여러 제도개혁을 단행했다고 『日本書紀』에
나온다. 새로운 정권에서 국박사(國博士)가 된 高向玄理가 646년 9월에 신라를 방문한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덧붙이면 高向玄理도 도래인계 씨족 출신이다.
다음에 중국을 보자. 수왕조 뒤에 당왕조가 나타났지만 고종은 국내가 안정되도록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627년에 즉위한 태종은 고구려 정복의 꿈을 버리지 않고 645년에
대군을 거느려 요하를 건너가고 요동성을 공격했다. 요동성, 백암성(燕州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공격하다가 겨울이 가까워지고 식량이 떨어져 9월에 퇴각을 명령했다. 그 안시성 싸움이 동아시아를
격동하는 시대에 끌어낼 계기가 된다고는 태종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647년까지에 3번이나
원정했지만 모두 실패해서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궁지에 빠진 태종 앞에 신라의 김춘추가
나타난 것이었다. 648년 일이었다.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말해보겠다. 그가 고구려에서의 억류생활에서 귀환한지 얼마 되지 않은
646년에 일본에서 高向玄理가 신라에 건너갔다. 그 다음 해에 김춘추는 귀국하는 高向玄理와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말하며 일본이 친백제정책을 버리고 신라와 손을
잡는 정책을 선택할 것을 설득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蘇我씨 이래 계속되어 있던 친백제정책을
바꾸지 못하고 다음 해 648년에는 셋째 아들인 文王을 데리고 당 태종 쪽으로 갔다. 김춘추는
아들을 인질로 하는 동시에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당에 복속을 다짐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당과 신라가 공동으로 공격하는 것을 건의했다. 태종이
죽은 다음에 그의 의사를 고종이 이어받았다. 660년 7월에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 13만명과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이 부여 사비성을 공동으로 공격하고 백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소국이었던
신라가 격동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김춘추가 강구한 방책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왕조가
멸망한지 석 달만에 산성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복신이 일본에 대해 구원군을 요청해왔다. 요청에
응한 齊明천왕은 곧 九州에 떠나고 황태자인 中大兄황자(天智천황)와 中臣鎌足도 따라갔다. 실로
빠른 대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해인 661년 7월에 齊明이 급사하자 中大兄은 상복을 입고
즉위도 하지 않은 채 구원군 파견을 지휘했지만 663년 8월에 백강(白江)에서 패하고 말았다.
왜 齊明이 구원군 파견을 결정하고 中大兄이 강행했는가. 그 해석이 여러가지 있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아스카 히노쿠마(檜隅) 땅은 5세기 이래 백제계 도래인들의 근거지이고 6세기에는 백제에서
숱한 학자, 승려, 기술자들이 파견되었다. 그 결과 아스카(飛鳥)문화의 꽃이 피었다. 그러한
백제왕조가 위기에 빠져 구원을 요청해온 것이라 그 어려운 처지를 못 본 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齊明은 대의를 중요시하고 감히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섰던 것이 아닐까
일본이 투입한 군대는 2만 8천명이었다고 하지만 백강싸움에서 패전한 이후에 궁지에 몰렸다. 당과
신라 연합군이 공격해 올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664년에는 쓰시마(對馬), 이키(壹岐),
지쿠시(筑紫<==九州북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음해에는 다자이후(太宰府<==福岡근교)에
大野성과 基肄성을 건설하고 백제에서 망명해 온 관리들 400여명의 거주지를 오우미(近江<==京都근처)에
옮겼다. 2년 후인 667년에는 대마도에 金田성을, 사느키(讚岐<==四國북부)에 屋島성을,
나라(奈良)에 高安성을 건설했다. 또 수도를 近江에 옮기고 백제 관리들 700여명을 수도 근교에
정주하게 했다. 이것들만을 보아도 中大兄의 낭패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68년에 中大兄이
즉위해서 天智천황이 되었다. 고구려왕조를 타도한 신라는 668년 9월에 金東嚴을 일본으로 파견하고
그 1년 후에도 사절을 일본에 파견했다. 신라는 671년 8월에 백제 땅을 점령하고 있던 당
군대를 구축하자 10월에 김만물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일본에 알리고 백강싸움
이후의 양국간의 긴장을 푸는 일이 신라의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평화공세」는 계속되고
672년 6월에 대규모 반란인 壬辰亂으로 天武천황이 즉위하자 11월에 金押實을 파견했다. 그
이후 거의 해마다 사절을 파견해왔다. 그 결과 675년 6월에 大伴連國麻呂를 대사로 한 사절단이
신라에 건너가 양국간에 평화관계가 수립되고 808년까지 130년간에 신라는 40여번 사절을 파견하고
일본이 파견한 遣新羅使는 30여번에 이르렀다. 한편 일본이 당으로 파견한 遣唐使는 10번이고
당이 일본으로 파견한 공식적인 사절은 불과 2번이었다. 국명을 「倭」에서부터 「日本」으로 바꿀
때는 7세기 후반이고 『삼국사기』에 문무왕 10년(670)에 倭는 나라 이름을 日本으로 바꿨다는
글이 나온다.
출전 ▷ 이 진희교수님 강연록【한국과 일본의 교류 역사 - 고대, 중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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