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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통신사의 파견 요청이 있은 지 약 6개월 후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삼사(三使)는 궁중(宮中)으로 들어가 국왕에게 출발 인사를 드린 다음 즉시 장안을 떠난다. 남대문을 지나면 영의정이 주최하는 송별연이 열리는데, 여기에는 삼정승(三政丞)을 비롯하여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참판(參判) 등 정부 고관들이 참석한다. 통신사의 파견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국가적 대사이기 때문이다.

상상관(上上官)등삼선도(等三船圖)

부산포에 도착한 일행은 일본으로부터 마중 오는 통신사호행차왜(通信使護行差倭--일본측은 迎聘參判使라고 부름)의 도착을 기다려 부산진의 영가대(永嘉臺)에서 영신제(龍神祭)를 지내 항해의 무사를 빈다. 그리고 바람과 조류를 고려하여 이른 아침에 출범하게 되는데 기선(騎船)의 제 1선에는 정사(正使)가 국서(國書)를 모시고 타며, 제 2선에 부사(副使), 제 3선에는 종사관(從事官)이 탔으며, 이들 기선(騎船)에는 예물과 식량을 실은 종선(從船)이 한 척씩 따른다.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 신유한(申維翰)은 출범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가 뜨자 비로소 닻줄을 풀고 고적(鼓笛)을 울리면서 출항했다. 삼사신(三使臣)은 각각 다른 배에 탔는데, 배는 용양전함(龍 戰艦)과 같다.……삼승선(三乘船)에는 각각 종선(從船)이 딸려 있어 양곡과 예물을 실었는데, 배의 구조는 삼승선(三乘船)과 같되 규모가 작을 뿐이다. 6척이 동시에 출범했다. 도왜선(導倭船--물길 안내선)을 보면 3척에는 봉행(奉行)?재판(裁判)?도선주(都船主)가 탔고, 모두 붉은 난간에 검은 장막을 둘러쳐 매우 정묘하게 되어 있다. 이에도 각각 종선(從船)이 따른다. 또 별도로 2척의 소선(小船)이 각각 4~5명의 왜인(倭人)을 태우고 사선(使船)의 좌우에 날개처럼 수행하는데 그 속도가 한 자도 어긋나지 않을 정도이다 (해유록(海游錄)).

통신사 일행은 해질 무렵 쓰시마(對馬) 북단의 사스나(佐須奈)항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행의 선단이 쓰시마(對馬)로 접근하는 모습과 무사히 입항했다는 소식은 봉화로 중계되어 이즈하라(嚴原)의 쓰시마 번주(藩主)에게 통보된다. 여기서 번주(藩主)는 곧 비각선(飛脚船--속력이 빠른 통보용 배)을 내어 일행의 쓰시마(對馬) 도착을 각지 번주(藩主)와 막부(幕府)에 보고하며, 그 후의 일행의 동정에 대해서도 수시로 배를 내어 통보한다. 각 번(藩)이 일행을 영접하는 데 일정 기타에 착오가 생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즈하라(嚴原)에서 쓰시마 번(對馬藩)의 영접 행사가 끝나면 번주(藩主)가 탄 배의 선도로 이키(壹岐)섬을 향해 떠나게 되는데 쓰시마 번사(藩士) 800여명이 수행한다. 정사선(正使船)에는 푸른 바탕에 붉은색으로 「正」자를 염색한 깃발을 달고 부사선(副使船)에는 노란 바탕에 「副」자를 붉은색으로 염색한 깃발, 종사관선(從事官船)에는 붉은색으로 「從」자를 염색한 깃발을 달았다. 삼사선(三使船)에 따르는 종선(從船)에도 각각 정해진 빛깔의 기를 달았는데, 이것은 일본측 영호선(迎護船), 예인선(曳引船)들이 각기 담당한 배를 멀리서도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키(壹岐)의 가쓰모토(勝本)항에 도착한 일행은 히젱(肥前) 마쓰우라 번(松浦藩)의 접대를 받은 다음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아이노시마(相島)로 향한다.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1719년 통신사의 영접 기록인 『朝鮮人來聘記』 및 『朝鮮人歸國記』에 따르면 가로오(家老--藩의 최고직)인 구로다(黑田)가 영접 책임자로 되어 사관(使館)의 신축(24채), 부두의 수축, 봉화대(小呂島?姬島?玄海島?志賀島?能古島?荒戶島?地島)의 정비를 지휘했는데 완성까지 6개월이 소요됐다.
6월 20일에 통신사 일행의 쓰시마(對馬) 도착이 통보되자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접대역은 28일에 전원 아이노시마(相島)로 건너가서 대기하였다. 7월 19일 일행이 이즈하라(嚴原)를 출발했다는 것과 다음 날 무사히 가쓰모토(勝本)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8월 1일 오후, 일행의 선단이 이키(壹岐)를 떠났다는 것을 알리는 봉화가 오르자 통신사 선단의 예인선(曳引船) 144척, 쓰시마 번(對馬藩) 선단을 예인(曳引)하는 배 243척이 이키(壹岐)섬 앞바다까지 나가 아이노시마(相島)까지 예인(曳引)하였다. 이외 17개소의 여울에는 표식선(標識船)이 서 있었고 연안에는 수십척의 경비선이 배치되었으며 동원된 수부(水夫)는 3600명에 달했다. 신유한(申維翰)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이노시마(相島)에서 왜인(倭人)의 영호선(迎護船)이 당도했다. 관인(官人) 이 탄 대선(大船)이 밧줄로 우리 배와 연결하고 그 앞에 군왜(群倭)의 작은 배들을 고기꿰미 같이 연결시켜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었는데 그 길이가 각각 수십 길이었다….
밤이 되자 각 배에 등불 4~5개씩 켜자 그 수는 천만 점(點). 등불이 대해(大海) 가운데 총총 줄 지어 원근(遠近)의 운하(雲霞)에 찬란히 비치었다. … 삼경(三更)에 아이노시마(相島)에 도착했다 『해유록(海游錄)』.

통신사 일행은 다음으로 아카마가세키(赤關--오늘의 下關) 및 가미노세키(上關)에 상륙하여 모오리 번(毛利藩)의 접대를 받고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항행, 가마가리(蒲刈), 도모노우라(靭浦), 우시마도(牛窓)에 기항한다. 기항지의 각 번(藩)은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경우와 같이 예인선(曳引船)과 경비선을 준비해야 하는데 우시마도(牛窓)의 오카야마 번(岡山藩)은 1719년도에 516척의 배를 배치하고(그 외에 예비선 102척), 수부(水夫) 3707명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통신사 일행의 숙소에 비치된 접대 요원이 264명, 쓰시마 번(對馬藩) 일행의 숙소에 146명, 화재에 대비하여 소방수 92명을 배치하였다.『亨保四己亥歲朝鮮人來朝記』.

9월 1일 저녁 때, 천여 척의 선단이 오카야마 번(岡山藩)의 안내선을 선두로 우시마도(牛窓)에 입항했다. 부두에 내린 일행은 오카야마 번(岡山藩) 접대인의 선두로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에 이어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 상상관(上上官--3명)의 순서로 가마를 타고 사관(使館)으로 들어갔다. 정사관(正使館)의 정문에 들어서면 오카야마 번(岡山藩)의 가로오(家老)가 정중히 맞이하여 사관(使館) 안으로 안내한다. 신유한(申維翰)은 자기가 묵은 숙소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관(使館)의 공장(供帳)은 도모노우라(靭浦)와 같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곁에 탑 1기가 있고 위에는 구리 기둥을 세워 공중에 높이 솟아 있다. 절 이름은 혼렌지(本蓮寺)라 한다. 서쪽으로 항구를 만들어 집 한 채가 있는데 경치가 절경이다. 이름은 학사관(學士館). 좌우에 욕실, 화장실이 있는데 다같이 정묘하다. 뜰에는 소철(蘇鐵)과 종려(棕櫚), 그밖에 화초가 색다른 향기를 풍기어 소수담결(疎秀淡潔)의 느낌이 있다 『해유록(海游錄)』.

우시마도(牛窓)를 떠난 일행은 무로쓰(室津), 효고(兵庫--오늘의 神戶)에 기항한 다음에 오사카(大阪)의 요도가와(淀川) 하구로 들어간다. 긴 항해의 종점이다. 통신사 일행은 요도가와(淀川) 하구에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준비한 하천(河川)용 누선(樓船)으로 바꿔타고 요도가와(淀川)를 따라 올라 오사카(大阪) 나니와바시(難波橋) 부근에 상륙하여 사관(使館)이 있는 니시홍간지(西本願寺)로 들어간다. 그런데 요도가와(淀川)로 가는 것도 대단한 행사의 하나였다. 선두에 쓰시마 번주(對馬藩主)가 탄 선단이 가고 다음에 국서(國書)를 실은 나니와마루(浪速丸--號), 정사(正使)가 탄 기이쿠니마루(紀伊國丸), 부사(副使)의 도사마루(土佐丸), 종사관(從事官)의 마카토사마루(中土佐丸)의 각 선단으로 이어지고 그 뒤를 서일본의 번주(藩主)들이 준비한 배들이 따랐다. 여기서 정사(正使)가 탄 기이쿠니마루(紀伊國丸)와 예인선(曳引船), 수행선들을 보면 일부가 2층으로 되어 있는 누선(樓船)에는 正자 깃발이 달려 있고 고물에는 다쿠가와가(德川家)의 문장기(紋章旗)와 유소(流蘇)가 나부끼고 있다. 도록에서 보듯이 화려한 누선(樓船)이다. 중앙의 선실에는 정사(正使)가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고, 서기가 정사(正使)쪽을 향해 붓을 손에 들고 있다. 뱃전에는 긴장한 모습의 일본 무사들과 우리측 수행원 22~23명이 있고 이물에서 상앗대를 놀리는 일본인이 14명, 고물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 16명이다(같은 인원의 교체 요원이 있음). 그리고 밧줄로 연결된 예인선(曳引船) 20척이 2열 종대로 되어 정사선(正使船)을 앞에서 끈다. 정사선(正使船) 뒤에는 일본인들이 탄 대소(大小)의 수행선들이 따르는데, 정사선단(正使船團)은 28척으로 구성되었고 인원은 166명이었다. 요도가와(淀川)의 양쪽 언덕에는 구경하러 밀려든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신유한(申維翰)은 이렇게 묘사하고 았다.

구경 나온 남녀들이 양쪽에 담처럼 섰는데……가까운 자는 먼저 강 좌우에 정박해있는 배를 차지하여 자리를 연달아 폈기 때문에 옷깃이 서로 붙어 있다. 배에서 밀려나온 자는 언덕에 미쳤고, 언덕에서 밀려나온 자는 인가의 담과 다리의 난간에 미쳤는데, 화려한 자리, 비단 장막을 깔고 앉기도 하고 술?차?밥?음료수 등 여러 가지 음식물을 준비하고 있다 『해유록(海游錄)』.

통신사의 일정이 알려지면 오사카(大阪)와 그 인근 주민들은 요도가와(淀川) 연안과 나니와바시(難波橋)로부터 니시홍간지(西本願寺) 사이의 연도에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광경은 육로에서도 재현되었다. 오사카(大阪)의 사관(使館)에서 해상의 오랜 여행의 피로를 푼 일행은 다시 호화롭게 장식한 「누선(樓船)」을 타고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 교토(京都) 남쪽의 요도(淀)에서 상륙하는데, 그 다음은 에도(江戶)까지 약 2주일간의 육로 여행이었다. 일행은 교토(京都)에서 1박한 다음 오쓰(大津)를 거처 야스(野洲)부터는 비와코(琵琶湖) 동안(東岸)의 길을 북상하여 히코네(彦根)로 나간다. 하마 가이도(濱街道)라고도 불리는 이 길이 바로 유명한 「조오센징 가이도(朝鮮人街道, 약 30km)」이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 길을 따라 교토로 올라간 후 일본의 실권자로 되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德川家)는 이를 「길도(吉道)」라 하여 역대 장군의 상락(上洛--上京)시는 이 길을 지나기로 했었다. 그래서, 서일본 번주(藩主)들에게도 이 길을 사용시키지 않았지만 통신사만은 지나게 하여 어느 사이에 「조오센징 가이도(朝鮮人街道)」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오센징 가이도(朝鮮人街道)는 우호친선의 「길도(吉道)」였던 것이다. 히코네(彦根)에서 일박한 일행은 오가키(大垣), 나고야(名古屋)에서 각각 일박하고 도오카이도(東海道)로 접어들어 에도(江戶)로 향한다. 도중에 있는 이비(揖斐), 나가라(長良), 기소(木曾), 덴류(天龍), 후지(富士), 사카와(酒勾), 바뉴(馬入), 등의 강에는 주교(舟橋)를 특설하였다. 배를 연결하여 그 위에 판자를 깐 것으로 기소가와(木曾川)의 경우, 275척의 배를 5.4m 간격으로 띄워 그 위에 3036장의 판자를 깔았다. 그리하여, 길이 855m, 폭 2.7m의 주교(舟橋)가 출현한 셈인데 일행이 귀국하면 곧 철거한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에도(江戶) 방위를 위해 이 강들에 다리를 놓는 것을 금지했으나 도쿠가와 장군(德川將軍)과 조선통신사의 통과시에는 주교(舟橋)를 건설하였다. 조오센징 가이도(朝鮮人街道)며 주교(舟橋) 가설을 보아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통신사를 마중하는 데 얼마나 정중했던가를 알 수 있다.
나고야(名古屋)를 지나 오카자키(岡崎)에 가면 도쿠가와 장군(德川將軍)의 사자가 마중나오며(우리측은 이를 「中路問安」이라 함) 도중의 사관(使館)과 휴식소는 신축, 또는 깨끗이 수리되었고 길은 정비하여 모래를 깔았다. 시든 가로수는 바꾸어 심고 눈에 보기 흉한 곳은 발이나 이엉으로 가리게 하였다. 시즈오까켕(靜岡縣)의 삿타(薩 )고개는 통신사를 위해 새로 닦은 고갯길이다. 우리 일행 중 수부(水夫) 등 100명은 오사카(大阪)에 남기고 에도(江戶)로 가는 370 내지 400명, 일행은 선도(先導)?호위하는 쓰시마 번사(對馬藩士)가 800명, 그리고 연도의 각 번(藩)에서 동원된 가마의 교군과 인부(人夫) 2600명, 말 800여 마리의 대 행렬이다. 연도에는 구경꾼 정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려 있었다.

1. 사절이 통과할 때는 귀천을 막론하고 길 양쪽에 정지시키되, 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 이유가 분명한 자에 한해 행렬의 틈을 타서 건너가게 할 것.
2. 구경하는 사람은 큰 소리를 내거나 크게 웃거나 손가락질을 하지 말아야 하며, 남녀가 서로 섞여 있지 않도록 할 것.

도오카이도(東海道)의 마지막 숙소는 시나가와(品川)의 도오카이지(東海寺)에 있었다. 1719년의 통신사 일행은 9월 26일 오후 마지막 강인 다마가와(玉川)를 건넜는데, 신유한(申維翰)은 「채선(彩船) 4척이 정박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 척은 국서(國書)를 받들었고, 세 척은 사신이 나누어 탈 배였는데 그리 크지는 아니하나 그 채색과 칠 빛이 찬란하였다. 다시 모든 배가 구름처럼 모여서 사람?말?행장을 건넸다」고 적고 있다. 도오카이지(東海寺)로 들어간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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