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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조선통신사라는 말이 주는 의미로 인해 통신사는 조선 때에만 존재하였던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통신사절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정기적이지는 않지만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무로마치시대(1336~1573년)에는 일본 사절이 3회가 기록되어 있다. 그 처음은 고려때의 일이다. 무로마치막부에는 아시카가씨가 장군으로 있었는데 비단 장군뿐 아니라 서일본의 제후와도 친밀한 교류를 하였다.
고려 우왕원년인 1375년 나홍유를 정사로 삼아 왜구의 금지를 요청하러 아시카가를 방문하였다(고려사 절요 권지30). 당시 포은 정몽주선생이 얼마간 억류된 사건도 있었다. 고려에서도 역시 아시카가정권의 취약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교류가 많지 않던 서일본과도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취했다.
조선의 건국 이후인 15세기 초에는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가 명나라로부터 일본왕으로 책봉되게 된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은 공히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관계를 명과 취하게 된다. 명과의 관계뿐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책봉국이라는 명분론과 함께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조선통신사로 기록되는 1607년의 회답겸 쇄환사가 있기까지 조선전기의 사절은 7회에 걸쳐 이어졌다. 물론 이 사절은 조선만이 보낸 것이 아니라 상호 사절단이 왕래한 것이다. 세종때에는 일본측 사신들이 아시카가막부뿐 아니라 일본의 각 제후로부터 온 자가 1300여명에 이르러 과다한 접대비로 인해 사신의 제한을 요구하는 서계를 보내기도 하였다.
1) 제 1회 조선의 사절
제 1회 통신사는 태종13년 1413년에 박분을 정사로 한 일행이 출발하였으나 발병으로 인해 사행이 중단된바 있다. 이때 조선정부에는 이미 일본의 사신이 있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고, 조정 신하들이 일본에 대한 불신, 아시카가 정권의 취약성 등을 이유로 반대를 해 결국 조선의 사절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2) 제 2회 조선의 사절
세종 11년 박서생을 정사로 하여 아시카가 요시노리장군의 취임을 축하하고 전임 요시모치장군의 문상을 위해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또한 서일본 제후들에 대한 예물과 서한등을 보냈다.
세종때의 국력이 당시 대마를 정벌할 정도로 강성하였는데 이들 일본 제후들에 예물을 보낸 이유는 대판까지는 뱃길이 멀고 험해 해적들에게 표적이 되므로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가 첫째 이유고 그 다음으로는 왜구의 금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박서생이 정사로 간 2회 통신사는 아시카가 막부의 취약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경제, 문화의 일면을 관찰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왜구의 관할을 알아내는 데에도 성공을 하였다.
3) 제 3회 조선의 사절
1439년 세종 21년 부사 고득종이 그해 12월에 에도에 들어갔다. 일본과의 교린을 거듭 확인하고 왜구침입의 금지를 요청하는 동시에 서일본지역의 과대한 사신의 파견을 줄이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에는 일본의 정정이 불안할 때였으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가도록 세종은 사절단에 명한다. 바로 조선통신사의 각오가 이들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결국 이 사절단은 요시노리에게 예물과 그 서계를 받아 환국하는데 성공했다. 세종은 이들 사행을 치하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고 이들에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4) 제 4회 조선의 사절
이 역시 요시가쓰 장군의 취임축하와 요시노리에 대한 조문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사절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많았다. 장군 요시노리가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그 암살에 대한 정보는 대마도의 종정성을 통해서였는데 세종은 실리 외교를 펼쳐 사절단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세종 22년 1441년 12월 정사에 변효문 서장관에 신숙주가 임명되기에 이르른다. 사신은 다음해 2월에 출발을 하여 대마도에서 소우씨와 교빙을 하고 오우치의 보호를 받으며 에도로 향했다. 그러나 입경이 거부되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번복되어 입경하기에 이른다. 일본에 계속 머무르다가 6월에 비로소 요시가쓰에게 서계와 예물을 전달한다. 회답서와 예물을 받아 귀로에서 습격을 받았지만 예물과 회답서만은 지켰다.
시모노세키를 지나 7월21일 귀환길에서 취임을 한지 불과 얼마 안된 요시가쓰장군의 암살 소식을 듣게 된다. 일본 정정의 불안이 극에 달하고 권력 암투가 노출된 것이다. 이때 서장관으로 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적어 그 후의 조선통신사의 사행에 교과서적인 서적을 집필하게 된다.
5) 제 5회 조선의 사절
세조 6년 1460년 요시카쓰가 암살된 후 장군에 취임한 義政의 회답과 장정의 증정을 겸해 파견이 되었다. 그러나 해상 사고로 인해 이 사행은 중단이 되었다.
6) 제 6회 조선의 사절
성종 10년 1479년 4월에 정사 이형원등이 임명이 되어 파견되었으나 대마도의 소우씨가 서일본 제후들의 전투로 인해 일본 정정이 불안하다는 권고를 한 데다가 정사 이형원이 병사를 하게 되어 이 사행 역시 중단하게 된다.
7) 제 7회 조선의 사절
일본에서 풍신수길이 1585년 관백으로 취임한 후, 일본의 전국을 거의 통일하였다. 1586년 대마도주 소오요시토시(宗義智)가 일본의 새로운 정권 수립을 알리며 통신사 요청을 하였다. 풍신수길은 조선정복의 야욕을 품고 조선에 무례한 서계를 보낸다. 조선국왕의 일본 방문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대로 전달된 것은 아니었고 대마도주 소오씨를 거치면서 통신사의 파견으로 변경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몇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왜구의 우두머리를 모두 잡아 조선으로 보낼 것
둘째, 왜구와 협력하여 조선 침입을 유도하는 반민을 송환해 줄 것.
을 요청하여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을 임명하여 사행원이 편성되었다. 앞서 말한 조건의 일부가 이루어져 왜구의 우두머리와 조선의 반민 그리고 피로인등을 보내왔다.
선조 23년 1590년 3월 소우씨등과 함께 교토에 입경한다.
귀로에 회답서에 "일본은 조선이 명의 침공에 앞장서달라"라는 지시가 된 것을 알고 이의 변경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부사 김성일이 분개하였다고 한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의 됨됨이를 무시하여 침략은 없을 것이라 하여 결국에 부사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하여 조선은 화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김성일이 히데요시가 보낸 회답서의 내용에 분개하였다면 당연히 황윤길과 같은 보고를 하였을 터인데 왜 그가 거짓 보고를 하였을까. 당쟁의 결과였을수도 있을 것이다. 설마라는 안이한 생각이 우리 문화의 100년 후퇴인 임진왜란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김성일은 후회하여 나중 의병을 모집하는데 앞장을 서고 진주성싸움에서 병사를 하게 된다.
8) 제 8회 조선의 사절
7회 통신사가 있은 후, 2년만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1592)이후 불과 2개월만에 평양까지 공략을 당하게 되는데, 명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이 정전상태에 이른다. 명에서 책봉사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다. 1495년 정사 황신을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지만, 명의 사신과는 달리 오사카로 가지 못하게 된다.
명사신 심유경은 조선의 사신에게 위험하니 곧 바로 조선으로 가라는 연락을 한다. 그러나 당시 잡혀온 피로인들은 화평이 성사되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배 근처에서 떠나지 않아 일행은 하루 더 출발을 연기하게 된다. 8회의 조선사절은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인해 조선사신 모두 처형이 될거라는 극한 소문에도 화평을 이루려는 인내심으로 이를 극복한다. 또한 배에 매달리며 울며 애원하는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없어 하루 더 출발을 연기하는 애민정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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