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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1719년의 일행은 9월 27일,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의당을 갖춘 다음 행렬을 정비하여 출발하였다. 막부(幕府)의 기마(騎馬) 20기(騎)의 선도로 사관(使館)을 떠나 청도기수(淸道旗手)를 선두로 군관(軍官), 악대(樂隊), 그리고 국서(國書)를 모신 삼사(三使)의 가마가 따르고, 그 뒤에 제술관(製述官), 양의(良醫), 화원(畵員), 서기(書記) 등이 간다. 마지막은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의 일행으로 사관(使館)인 아사쿠사(淺草)의 히가시홍간지(東本願寺)로 가는 연도의 집들은 대문을 열어 단자(緞子)?자견(紫絹)의 장막을 치고, 길가에는 홍등을 내걸었다. 일행은 구경나온 인파 속을 지나 저녁 무렵 사관(使館)에 도착, 사관(使館)에는 접대역인 마키노(牧野忠辰)와 나카가와(中川久忠), 대학두(大學頭)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 등이 일행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도착 다음 날인 28일, 장군 요시무네(吉宗)의 사자(「上使」라 함)로 로오주(老中)인 이노우에(井上正岑)와 미즈노(水野忠之)가 예방하였다. 상사(上使) 일행은 우리측 악대(樂隊)의 취주(吹奏)를 받으며 사관(使館)으로 들어와, 장군 요시무네(吉宗)의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를 쓰시마 번주(對馬藩主)가 받아 되풀이하면 통역관이 번역하여 상상관(上上官)에 전하고, 상상관(上上官)은 그를 삼사(三使)에 전한다. 그러면, 삼사(三使)는 상사(上使)에 대해 목례(目禮)한 다음 인사말을 통역관, 쓰시마 번주(對馬藩主)를 경유하여 상사(上使)에 전한다. 번잡한 것 같이 보이지만 정중하게 진행되는 것이 외교상의 예의(禮儀)인 것이다. 상사(上使) 일행은 소통(小童)이 가지고 나온 인삼탕(人蔘湯)을 마신 다음 자리를 뜨는데 삼사(三使)는 아래층까지 내려가 전송한다. 통신사가 에도(江戶)에 머무르는 동안 막부(幕府)에서 가장 신경을 쓴 곳은 화재예방문제였다. 전 해에도 큰 불이 나서 사관(使館)이 탔으며 일행이 에도(江戶)에 도착한 날 밤에도 작은 불이 났기 때문이다. 막부(幕府)는 여러 차례 불조심의 포고문을 내며 나졸들을 순찰시켜 샅샅이 살피었다.
통신사를 대접하는 요리도 호화로워서 삼사(三使)와 상상관(上上官)의 아침 저녁상은 「7?5?3」, 점심상은 「5?5?3」이었고, 그 외에 3탕(湯)과 15채(菜)가 준비되었다. 「5?5?3」이란 본상과 곁상에 5종, 셋째상에 3종의 요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상관(上官), 중관(中官), 하관(下官)의 상에 각각 차등이 지어져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행이 385명이었던 1655년의 예를 보면, 하루의 재료가 쌀 19석(石) 4두(斗) 4승(升)과 간장과 식초 각 1석(石) 5두(斗), 된장 5석(石), 소금 3석(石), 술 8석(石), 기름 7두(斗)였다. 이밖에 닭과 비둘기 각 100마리, 계란 400개, 어린 농어 499마리, 도미 20마리, 정어리 50마리, 농어 20마리, 연어 10마리, 말린 가다랭이 1000마리, 전복 200개, 동과(冬瓜) 100개, 파 100다발, 배추 150포기, 무우 2000개, 토란 5두(斗), 송이버섯 100개, 두부 200모, 겨자 1두(斗), 포도 300송이, 후추 5근(斤), 백설탕 5근(斤) 등이었다. 재료는 계절에 따라 달랐던 모양인데 1719년에는 마늘, 미나리, 가지, 다시마 등이 보인다.
통신사가 에도(江戶)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장군습직(將軍襲職)을 축하하는 조선국왕의 서한〔國書〕을 전하는 것이다. 10월 1일 삼사(三使)는 금관, 옥패와 조복으로 정장(正裝)하고 상상관(上上官)과 제술관(製述官)은 흑단령에 사모, 군관(軍官)은 우립(羽笠) 금포(錦袍)에 칼을 찼다. 일행은 막부(幕府) 기마대의 선도로 청도기(淸道旗)를 앞세워 사관(使館)으로부터 에도 성(江戶))으로 향했는데 연도(沿道)는 구경나온 사람으로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신유한(申維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제1의 성문에 들어가니 구경하는 남녀가 누에 머리처럼 빽빽히 들어섰는데 모두 비단 옷을 입고 있었고 제2의 성문에 들어가니, 호화로운 깃발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둘러진 벽에는 흰 회가 칠해져 있었다. ……흰 벽과 층층의 난간에는 붉은색의 유소(流蘇)가 나부끼고 발과 비단 장막 사이로 화려한 옷차림으로 구경하는 사람은 천림(千林)에 핀 꽃과 같았다. 이것은 모두 막부(幕府)의 고관(高官), 번주(藩主), 귀족(貴族)들의 집이다. 제3의 성문에 이르자 이것이 궁성(宮城--江戶城)이다.『海游錄』

행렬은 계속되어 제7의 성문 앞에서 상상관(上上官) 이하는 가마와 말에서 내려 도보로 나아갔다. 제7의 성문에 이르자 막부(幕府) 고관(高官)과 쓰시마 번주(對馬藩主)가 마중나와 있었다. 여기서 삼사(三使)는 가마에서 내려 자리를 깐 길을 따라 정전(正殿) 현관으로 들어갔다.
정전(正殿) 대청(大廳)에는 막부(幕府) 고관(高官)들과 지방 번주(藩主)들이 정장(正裝)으로 삼사(三使)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선두는 국서(國書)를 받는 수석 통역관이고 삼사(三使)와 상상관(上上官)이 뒤를 따랐다. 의식(儀式)의 절차에 따라 수석 통역관이 국서(國書)를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에 넘기자, 그는 이를 막부(幕府)의 로오주(老中)를 통해 장군의 옆 단 위에 놓았다. 그리고 로오주(老中)와 쓰시마 번주(對馬藩主)가 국서(國書)를 향해 절을 하였다. 다음으로 막부(幕府) 고관(高官) 두 명이 삼사(三使)를 장군 앞으로 인도, 삼사(三使)가 장군에게 사배(四拜)하자 장군이 그들을 위로하는 말이 있는 다음 주배(酒盃)가 하사(下賜)된다. 이어 삼사(三使)로부터 장군과 막부(幕府) 중신(重臣)에게 보내는 선물 전달이 끝나면 연회(宴會)로 들어간다. 이로써, 조선국왕과 도쿠가와 장군(德川將軍)과의 신뢰 관계를 재확인하는 의식(儀式)은 무사히 끝난 셈이다. 외교에 있어서는 격식(格式)이 엄격한 법이지만 국서(國書)를 전달하는 의식(儀式)뿐만 아니라 예물 전달에 있어서도 격식(格式)이 엄격했다. 예컨대 통신사가 지참한 도쿠가와 장군(德川將軍)과 도쿠가와 가(德川家)의 3대가문(三大家門)인 고상케(御三家--水戶?尾張?紀主)에 보내는 것은 조서국왕의 명의였으나, 조선조의 정승에 해당하는 막부(幕府)의 로오주(老中)에게 보내는 것은 예조참판(禮曹參判--次官級)의 명의였다. 그 밑의 부교(奉行)에게는 예조참의(禮曹參議--局長級)의 명의로 보냈고, 일행이 숙박하는 지방의 번주(藩主)에게는 좌랑(佐郞--課長級)의 명의로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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