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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來府使)와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와 육로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2. 국교의 회복
1600년 9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조선과의 화평교섭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쓰시마(對馬)의 소오 요시도시(宗義智)에게 명령하자, 그는 전쟁 때 납치해 간 사람들을 송환함과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을 사죄하는 사절을 보내왔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불신감이 뿌리 깊은 우리측은 처음에는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납치되었던 강항(姜沆)이며 강사준(姜士俊), 김광(金光) 등이 잇따라 귀국하여 변화된 일본 정세를 상세히 보고했고, 소오(宗)씨는 계속 사절을 보내 국정을 보고하는 한편 화평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우리측은 일본의 실정을 살피는 탐적사(探賊使)를 파견하기로 하여 1604년 8월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松雲大師)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행이 교토(京都)에 도착하자 이에야스(家康)는 멀리 교토(京都)까지 나와 후시미(伏見)성에서 아들 히데타다(秀忠)와 함께 일행과 만난다. 그리고 접대역인 혼다 마시노부(本多正信), 승 쇼오타이(承兌)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유정 일행에게 전했다.

나는『임진』때 간토(關東)에 있어서 병사(兵事)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과 나 사이에는 수원(讐怨)은 있을 수 없다. 화(和)를 통할 것을 청한다. (朝鮮通交大紀)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반대하였던 이에야스(家康)가 전후 처리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로서, 우리 나라와의 국교 회복은 신생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정치적 안정(安定)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는 화평 교섭의 계기를 얻어낸 소오 요시도시(宗義智)의 수고를 칭하여 쌀 2천8백석을 가봉(加俸)하였다.
한편 탐적사(探賊使) 일행은 호감을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측의 적극적인 자세에 대해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화평하느냐의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2개 조건을 일본측이 수락한다면 화평해도 좋다는 쪽으로 낙착된다. 그리하여 1606년 7월 예조참의(禮曹參議) 성이문(成以文)의 명의로 소오 요시도시(宗義智)에게 서한을 보내어, 두 번 다시 침략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國書)를 먼저 보내 올 것, 임진왜란 때 왕릉(中宗의 靖陵과 成宗 貞顯王妃의 宣陵)을 파헤친「犯陵之賊」(범릉지적)을 인도할 것 등의 2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4개월 뒤인 1607년 11월, 다치바나 도시마사(橘智正)를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이 부산포(釜山浦)에 들어와 이에야스(家康)의 국서(國書)를 제출함과 동시에「犯陵之賊」2명(사실은 쓰시마의 죄인)을 인도하였다. 그런데,「이에야스(家康)의 국서」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그는 이미 1604년 4월에「세이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직을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에 제출된 국서에는 日本國王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국서의 진위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2개 조건을 받아들인 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결론을 보게 되어, 1607년 1월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하는「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일행(副使?慶暹, 從事官?丁好寬) 467명이 부산포를 떠났다. 명칭을 통신사라 하지 않고「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보낸「국서(國書)」에 답한다는 의미와 납치되어 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쇄환(刷還)의 성격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도 전후 처리에 대한 우리측의 강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에도(江戶--오늘의 東京)로 간 일행은 5월 6일,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를 만나 조선국왕의 서한〔國書〕을 전달했다. 이어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히데타다(秀忠)의 국서가 통신사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그 속에서「권세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信義)에 바탕을 둔 국교를 맺고 싶다」고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국교가 회복되어 260여년간 선린관계가 유지된다. 한편 이에야스(家康)는 명나라와의 국교 회복을 열망하여, 우리 나라의 알선을 요청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우길(呂祐吉)이 휴대한 조선국왕의 국서는 일행이 모르는 사이에 쓰시마(對馬)에서 개작되어 있었다. 즉,「조선국왕이연봉복일본국왕전하(朝鮮國王李연奉復日本國王殿下)」로 시작되는 문장의 첫머리를「조선국왕이연봉서(朝鮮國王李연奉書……)」로 고치고, 그밖에도 일부를 삭제, 또는 가필하였다. 이에야스(家康)가 보낸 국서에 회답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조선국왕이 스스로 보내는 내용으로 개작한 것은「이에야스(家康)의 국서」라 하여 조선왕조에 제출한 것이 사실은 쓰시마(對馬)에서 위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측이 제시한 화평의 첫 조건은 히데요시(秀吉)의 침략을 사죄하는 이에야스(家康)의 국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측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내용의 국서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오요시토시(宗義智)는 중신(重臣)인 야나가와(柳川調信)와 외교승(外交僧) 겐소(玄蘇) 등과 짜고 이에야스(家康)의 국서를 날조하여 보냈던 것인데, 「회답」형식의 조선국의 국서를 그대로 히데타다(秀忠)에게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국서의 위조?개작과 같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소오(宗)씨에게는 국교 회복이 절실한 문제였다. 1634년 쓰시마번(對馬藩)의 내분을 계기로 국서 위조 사실이 탄로났으나, 야나가와(柳川)와 겐포(玄方--玄蘇의 제자)의 유형(流刑)으로 낙착된다. 소오(宗)씨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관대한 조치로 된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와의 국교 회복이 절실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오(宗)씨를 처벌하게 되면 조선조와의 외교 실무에 큰 지장이 생긴다고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측이 판단했던 것이다. 한편 이를 계기로 교토오산(京都五山--天龍寺?相國寺?建仁寺?東福寺?萬壽寺)의 승려를 쓰시마(對馬)로 파견하여 외교 문서를 교대로 관장케 함으로써(以酊庵輪番制) 외교상의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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