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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來府使)와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와 육로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의 이웃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때로는 전쟁과 같은 불행한 사건도 일어났었다. 13세기 몽고의 일본 침략과 16세기 말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국 침략, 그리고 금세기 35년간의 식민지 지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선린우호 관계를 맺은 시기가 훨씬 길었다.
7세기 후반, 백제 왕조 멸망을 계기로 건너간 백재관인들은 기시쓰 슈우시(鬼室集斯), 사타쿠 조오묘(沙宅紹)와 같이 국가 권력의 중추에서 활약하였다. 8세기에는 화엄종을 비롯한 통일신라의 선진 문화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중세 이후의 양국 관계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고 적고,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의 한일관계를 본다면 그 전반기인 15, 16세기는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에 해당되며 160여년간 가까운 이웃으로 선린관계가 유지되었다.
일본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와 국교가 성립된 것은 1404년으로, 아시카가(足利)장군은 160여년간에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60여회 보내왔으며, 우리측은 「회례사(回禮使)」, 또는「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양국간의 국교는 왜구(倭寇--해적) 진압을 위한 외교 사절의 왕래가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국왕과 아시카가(足利)장군은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한편, 서일본 지방의 호족들은 오우치(大內)씨며「구주탐제(九州探題)」, 쓰시마(對馬)의 소오(宗)씨, 그리고 군소 호족들의 사절이 삼포(三浦--釜山浦?薺浦?鹽浦)에 들어왔는데, 그 수는 연간 5천명을 넘었다. 조선조는 그들의 접대를 위해 많은 경비를 들여 그 대표를 한양까지 상경시켜 우리 나라 고관은 물론, 대표적인 학자?문인들과 만나게 하였다. 그들에게는 선진 문화를 배우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편, 그들이 구청(求請)하는 대장경(大藏經)이며 불화(佛畵)?불상?종(鐘) 등을 넘겨주고「진상(進上)」품의 가치를 상회하는 물품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삼포(三浦)에 들어오면 출항하여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의 식량 등을 우리측이 부담했었다. 그들에게 후위후사(厚慰厚賜)한 것은「외이기미책(外夷羈미策)」이 조선조의 대일 외교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15, 16세기의 160여년간 지속된 선린관계를 짓밟은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저지른 임진왜란이었다. 7년에 걸친 일본의 침략은 말할 수 없는 참화를 가져왔다. 인명의 피해가 막심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학자와 기술자, 농민들이 납치되고, 국토는 황폐되어 이를 회복시키는 데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무모한 침략전쟁은 일본의 농촌을 황폐케 하였고, 장병들의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백년 이상 경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도요토미(豊臣)정권은 정예 부대의 태반을 잃었으며, 무장(武將)들이 패전의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항쟁으로 발전하여 패퇴한 지 2년이 못되는 1600년 9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쟁에서 도쿠가와(德川)측에 패배하게 된다. 무모한 침략전쟁은 도요토미(豊臣)일족의 멸망을 초래했다.
일본과 다시 국교가 회복된 것은 160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을 깊이 반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전후 처리에 성의를 보인 것이 계기였다. 조선시대의 후반기, 즉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의 260여년간 조선조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사이에는 선린관계가 유지되었으며, 그를 상징하는 것이 통신사의 일본 왕래였다. 그런데 메이지(明治)정부에 의해 선린 관계는 짓밟히고, 그 후 우리 민족은 35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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