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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고대 한반도 등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이주와 활동은 4단계로 나누어진다.

①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
② 4세기 말기~5세기 초기
③ 5세기 후반~6세기
④ 7세기 후반

①은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 서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알려진 것처럼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의 문화가 파급된 처음 단계이다. ②는 일본(倭)정권 성장에 따른 대외활동에 호응된 도래인의 시기이다. ③은 백제, 가야 등에서 각종 기술자 집단이 많이 진출한 시기이다. ④는 660~663년 백제 멸망으로 백제의 왕족, 귀족, 관리 이하 많은 사람이 대거 건너온 시기이다. 그 시기에는 고구려에서도 건너온 왕족 등도 있었다.


1. 5C 한반도와 일본의 정세
우리는 수없이 많은 우리 선인들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들은 도래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처음에는 일인학자들에 의해 귀화인이라 불리우기도 하였지만 현재에는 도래인이라고 한다. 도래인이란 일본에 건너가 백제인, 혹은 가야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인데 주로 백제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아스카지방의 문화를 일으키고 문화적으로는 백제의 영향을 받으며 다수의 백제인이 활동을 하지만 백제의 패망으로 세대가 지남에 따라 귀화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도래인들은 본국의 정신으로 신대륙에 문화를 이식하듯이 사명감을 가졌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아래 글들은 여러 논문에서 발췌를 한 것으로 왜와 백제의 관계를 대략적으로 살펴 본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간 역사를 살펴보고 그 활동상을 상기해 보기로 하자.
5세기 후반의 일본에서는 아직 통일된 강력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못한 시기 였다. 일본에서 5세기 후반의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중기 고분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 유물들을 볼 때 3,4세기의 전기 고분문화와 판이하게 다른 중기 고분문화는 한반도의 남부지방의 문화가 일본열도에 흘러 들어가 정착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는 단순한 문화의 교류나 기술전파의 차원을 넘어 주민의 대거 이주를 동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의 왜는 백제와의 관계에서는 교류를 통해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인 침략이기는 하지만 변화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일본 왕가의 내부에는 피비린내 나는 갈등이 있었다. 왕위계승을 위해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다. 웅락천황이 葛城씨를 타도하고 대왕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기저에는 예상외의 저항을 받고 있어 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한반도로의 세력진출을 꾀하게 되었다. 왜왕 무는 중국에의 遣使朝貢의 上表文에서 “고구려의 無道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를 병합하려 하며 그 때문에 왜국의 조공에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부형의 뜻을 따라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공언한다. 실제로 47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는 공주로 천도를 하게 된다. 백제는 왜의 침략구실의 의도를 알고 490,495년에는 남제에 왜세력의 배격을 요구한바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 따라 5세기 후반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금래의 才技”라고 불리는 기술자 집단이 도래한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의 고분문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고 있다.5세기 후반에는 大和政權이 철소재를 소유하여 철제농구와 선진기술에 의해 농업생산을 확대하고 생산력발전의 주도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의 생산시설 진보와 문서, 기록의 제작에 의한 통치기술의 진보를 지탱케 해준 것은 한반도에서 왜로 건너간 다수의 渡來人들이었다.

2. 百濟의 정세
백제는 高句麗와의 완충역할을 하던 대방과 낙랑이 멸망된 뒤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와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이 공방전의 시작은 백제의 근초고왕인데 왕 26년(371)의 싸움에서 백제군이 평양지방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무렵 백제가 왜와의 관계를 강화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7년 근초고왕때 가야의 일국인 탁순국의 안내로 처음 일본에 사신을 보낸바 있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연대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삼국사기의 왜관계 최초의 기사는 阿莘王 6년(397) 王與倭國結好 以太子?支爲質이다.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연패를 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태자 ?支는 난국타개를 위한 방책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질이란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행으로 볼수는 없다. 군사적 결혼에는 이보다 확실한 방책은 없기 때문이다,.403년에 “왜국에서 사신이 오니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후하였다”한 우리측 자료에 의하여 왜와 백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역사서에 의하면 단 한차례도 침공이나 토벌과 같은 적대관계의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백제의 개로왕은 461년에 王弟를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것 역시 군사적인 협력을 위해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파동은 왜로의 집단적 망명과 이주를 야기시켰다. 격동의 세기라 할 수 있는 5세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父子 2대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대한 파괴적인 활동을 감행하여 한반도 전체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5세기 후반의 백제계 도래인들이 왜에 대량으로 이주한 것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3. 5세기 후반의 백제계 도래인의 역할
백제와 왜의 관계에 있어 분명한 것은 백제는 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우수한 문화를 소유하였고 그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백제와 왜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도래인의 역할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용어 사용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서기는 來歸,歸化,化來,投化라는 한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스스로 와서 따르다”로 정의하고 있었던 듯하다. 고사기에는 參渡來(받들어 건너오다)라는 문자를 사용한다. 귀화란 군주의 교화로 외부사람이 귀의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귀화란 왕화에 귀부한다는 고대적인 역사개념으로서 일본 우월주의에 의해 표현한 것으로 도래인들의 차별과 편견에서 발생한 개념이라 볼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당시 건너간 사람들은 문화전달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관리나 사람들이므로 귀화란 말은 온당치 않다. 그리하여 전후 일인 학자들도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渡來人”이라 통칭해 부른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渡日人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본 서기의 응신기에는 “제 1차 도래인”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그 이후 응략기의 이주민을 “제2차 今來의 도래인”이라 부른다. 815년에 편찬된 “新撰姓氏錄에는 편찬당시 왕족의 1/3 이상이 귀화인의 후손이라 한다. 최근 일본의 인류학자인 埴原和郞씨는 일본에서의 이주민 수에 대한 과거 여러 인류학자나 사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고대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150여만명의 도래인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일본서기의 다음에 편찬된 ‘속일본기‘는 백제인 阿知使主가 거느린 17현님이 대화왜의 정치 중심지인 大和國 高時郡(今來郡)에 가득히 거주하여 백제인이 아닌 사람은 10명중에 한두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고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건너온 과정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첫째 야요이(彌生)시대 전기
둘째 5세기 전후(4세기후반 ,5세기 전반)
셋째 5세기 후반에서 6세초
넷째 7세기 중반

위의 구분에서 보듯이 야마토(彌生)시대에 시작된 벼농사의 전래가 일본문화의 기층을 형성하였다면 고분시대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계속하여 밀려들었던 기술자 집단을 중심으로 한 도래의 물결은 일본 국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5세기후반은 한반도에서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되고 일본에서는 야마토국가의 성립기로서 적극적인 자세로 한반도 문화를 갈구했던 시기였다. 특히 백제에서는 남진해오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왜와의 교섭을 취했고 5세기 후반경에는 웅진천도후 수많은 백제인이 일본(왜)으로 건너갔다. 이 시기 일본 열도의 도래인이라면 가야계 백제인도 포함한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응신기에는 진씨의 조상인 弓月이라는 족장이 120현민을 이끌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이야기 ,倭漢直의 조상이라고 하는 阿知使主가 17현민의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등 수많은 도래 설화가 나온다. 먼저 일본서기에 의하면 응신15년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두필을 보내어 왜왕은 아직기로 하여금 말의 사육을 맡게 하며 능히 경전을 해독하므로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왕인의 학문이 우수한 것을 알고 왕인을 초빙하였다. 따라서 왕인의 학문으로 인해 왕인은 文人直의 이 해에 시조가 되었다 한다. 이 해에 백제의 아신왕이 승하하고 질자로 갔던 전지가 귀국을 하게 된다. 5세기 이래 도래인파가 한층 많아진 것은 5세기후반의 웅략천황시대였다.

※ 秦씨족과 漢씨족
도래인 중 제일 대표적이고 오래된 씨족이 하타(秦)씨족과 아야(漢)씨족이다.
秦씨는 경남 울진(于珍)지방에서 집단으로 건너온 이주민이다. 교토(京都)지방을 근거지로 정권 내에서 관리로 일했다. 한편 신라계 도래인들을 거느리고 생산물을 정권에 납입함으로 정권 재정의 일부를 맡을 정도인 지위까지 높아지고 개발에도 참여했다. 漢씨는 경남 함안지방인 安羅(安邪)에서 집단으로 건너온 이주민이다. 후에 아스카(飛鳥)에 인접한 高市군 檜前을 근거지로 했는데 8세기 후반에 高市군 인구의 80~90%가 漢씨였다고 한다. 漢씨는, ③번 시기에 백제 등에서 새로 건너온 才伎라는 도래인 집단을 거느리고 정권 내에서 관리로서의 지위를 굳혔다.秦씨과 漢족은 ②번 시기에 먼저 건너온 집단을 핵심으로 하고 주로 ③번 시기에 한반도 각지에서 건너온 사람 등을 결합해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비혈연적인 집단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다.②와 ③번 과정에서 잇따라 건너온 집단이 가져온 무기나 농구 등 철기 주조기술과 공급, 새로운 토기 제조기술과 직조기술의 전파, 전답에 대한 농업기술과 잡곡 재배 등 많은 선진 문화는 일본열도 선주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정권에 의한 정치의 조직화 과정에 규제되는 형태로, 그 후 일본의 정치, 사회, 군사, 생산력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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