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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답사의 의의
- 답사 그림 및 여정도
답사일정표
조선통신사 여정
이즈하라 시내지도(대마도)
- 답사지 소개

- 문화개관
■조선통신사 이전의 통신사
1. 고려때의 통신사와 조선전기의 통신사절

2. 조선전기의 사절과 조선통신사와의 차이점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백제와 일본의 문화개관
■渡來人을 찾아서
이주와 활동의 4단계

■다시 쓰는 일본 고대사
■조선통신사 연표


사전답사기
교통비 내역
조선통신사 문화개관
■조선왕조 후반기의 통신사 - 李進熙
1.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
2. 국교의 회복
3.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쓰시마번주(對馬藩主)의 역할
4. 통신사 파견의 절차
5.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6. 엄숙한 국서(國書) 전달 의식
7. 활발한 학술/문화 교류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8. 선린(善隣) 관계의 파탄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재정 궁핍 때문에 1811년의 통신사는 쓰시마(對馬)에서 접대하게 된다. 그러나, 막부(幕府)는 9만량(萬兩)을 지출하여 사관(使館)의 신축과 사스나(佐須奈), 와니우라(鰐浦)항의 개수, 이즈하라(嚴原)의 시가지 정비 등을 지시하고 에도(江戶)로부터 제1급의 학자를 보내 활발한 교류를 갖도록 한다. 이와 같이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자세는 확고했으며 조선왕조의 대일외교도 변함 없었다. 이어 1837년 제12대 장군에 이에요시(家慶)가 취임하자 막부(幕府)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조선조도 승인했지만 양국의 재정 문제로 연기하다 결국 실현되지 않는다. 다음 장군인 이에사다(家定)가 습직(襲職)한 것은 1853년 11월, 그러나 그 헤 3월에는 에도(江戶)에 큰 지진과 화재가 있었고, 6월에는 미국 페리 함대의 내항(來港), 9월에는 러시아 함대의 나가사키(長崎) 내항(來港) 등 일본의 내외 정세가 매우 소란해졌다. 막부(幕府)는 1856년에 가서 10년 후인 1866년에 통신사 빙례(聘禮)를 쓰시마(對馬)에서 하기로 결정했으나, 다시 10년 연기(1876년)를 요청해 왔고 우리측도 그것을 승인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도쿠가와 장군(德川將軍)의 습직(襲職)시에는 반드시 통신사의 초빙이 거론되지만 실현을 보지 못했다. 양국의 재정 악화와 정정(政情) 불안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초량왜관(草梁倭館)에는 쓰시마 번(對馬藩)의 관리가 상주하여 상호 긴밀한 연락이 취해졌고, 부산과 이즈하라(嚴原) 사이는 양국의 사절이 자주 왕래하였다. 예컨대,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우리측은 즉각 그 사실을 통보하고 구미 열강의 침입에 대비토록 일깨워 주었다. 1866년으로 말하면 메이지 이싱(明治維新)의 불과 2년 전이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1863년 대원군의 집정이 성립하자 쇄국 정책이 강화되었는데, 새로 수립된 메이지(明治)정부(1868년)는 260여년간의 선린 관계를 짓밟고 무력으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사이에 있어 260여년간이나 선린 관계가 유지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린 관계의 유지는 무역을 왕성케 함으로써 두 나라의 사회,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컨대, 무역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616~1617년에 호박, 고추와 함께 담배 씨와 재배법이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어 얼마 후에는 청국(淸國)에 대량 수출하여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일간의 새 시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지난 날의 선린 우호의 관계사는 물론, 오늘의 일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강화도 조약을 맺기까지 우리에게는 일본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적절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출전 ▷ 朝鮮時代通信使, 이진희, 국립중앙박물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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