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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해설

地圖類說 (그림1:지도표 및 지도류설참조)

“지도류설”을 통하여 김정호의 여지학에 대한 소신을 살필 수 있다. 지도류설의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1) 地誌와 지도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자료임을 강조하였다. 민정을 살피고 호구나 전시를 밝히는 것이 지지라면 지형이나 도로, 강, 행정경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지도가 꼭 필요하며 지도는 左圖, 地志는 右書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2) 모든 문헌적 고증을 중국에서 찾았다. 지지나 지도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서 찾았다. 김정

 

호가 실학자안 최한기와 친교가 두터웠고 “지구전후도” “五洲圖”를 자신이 직접 版刻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지도에 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는 晋의 지도학자인 裴秀에 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곳 김정호가 중국의 지도적 정통을 중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특이한 것은 청나라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 점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3) 지도의 활용면에서 군사적인 用途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설명했다. 이는 그의 後援者가 軍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서 실학자들이 我邦疆域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김정호도 국가존속을 위한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절심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저서인 대동지지 군현조의 典故항목에 과거 외국의 침략을 빠짐없이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4) 地志나 지도편찬에서 정확한 자료의 고증과 객관적 기술을 강조하였다. 그는 청구도에서 우리나라의 疆域변천도를 통일신라 이전의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자료가 미비할 뿐 아니라, 중국의 사서들의 자료도 각기 달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정호는 地圖類說뿐만 아니라 동여도에도 지도여백에 많은 문장을 실었다. 그는 국가발전의 기틀로서 국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좌도로써의 지도와 우서로서의 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東輿圖志., 輿圖備志를 통하여 완벽한 지지로서의 대동지지를 저술하였고 청구도. 동여도를 제작한 후 손색없는 지도로서의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여지학자로서 풍부한 학문적 지식을 통해 모든 사람이 쉽게 활용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동여지도를 판각한 후 인쇄본으로 발간한 것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일개 개인이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위대한 작품인 것이다.

靑邱圖 凡例
1)정조 때 모든 州郡에 명하여 그 지방을 그리어 올리게 하니 經緯線表가 있어 혹은 팔도로 분폭하고 주현으로 분표하여 임의로 만들게 하였는데 대개 종이에 한도가 있어 도본의 전폭 안에는 방, 면과 분계선을 모두 넣기 어려우므로 그 세세함을 다할 수 없다. 대폭의 전도를 가지고 層版으로 국정하여 고기비늘처럼 줄지어 잇달아 책을 만들었으니 거의 두 가지 결점이 없게 되어 지지에 실린 바와 옛 사람들의 만든 도본도 또한 이것을 가지고 상고할 수 있다.
2) 지도의 지명은 일일이 다 실을 수 없고 지형도 자세히 그려 넣을 수 없다. 이 지도를 가지고 산수의 형세와 도읍의 방위, 거리를 살피는 것이 지도 그리는 도리에 맞다.
3) 지지마다 里數(都邑 .山名 사이)가 서로 틀리므로 옛 도면의 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4) 읍을 중심으로 역, 원과 같은 지명의 방위는 다소 틀릴 수가 있다. 다만 전체 지명간의 방위가 틀리지 않게 하였다.
5) 坊面의 칭호가 社, 坊, 面 등으로 되어 있는 것을 면으로 통일하였다.
6)산등성이와 산기슭을 모두 연결하면 복잡하므로 이름난 산만을 표시하였다.
7) 지명을 옮겨 쓸 때 가로 쓰기를 원칙으로 했으나 형편에 따라 세로쓰기도 했다.
8) 책 끝에는 신라의 구주도, 고려의 오도양계와 본조의 성경도를 넣고 그 이전의 것은 고증이 어려워 삭제해 버렸다.
9) 지도를 만든 후에 주군에 송포하여 사실의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지도를 모사할 때는 동심법에 의해 거리와 방위가 틀리지 않게 해야 한다. 각 읍이 지지를 만들 때는 다음의 항목에 의거하여 작성하여 이를 어기지 말고 지도와 함께 기재해야 한다.
10)지도 그리는 방법의 기하학적 방법의 설명
11)통계수치는 100단위로 끊어서 기록했다.
12)里數는 서울을 기점으로 했다.
13)서울을 특별히 오부전도로 책머리에 붙였다.

 

大東輿地圖의 特性

형 태
대동여지도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대동여지도의 한국전체 형태가 오늘날의 지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수있다. 두 개의 지도를 비교하여 그 정밀성을 알아보는 작업은 이찬?와 박관섭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대동여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같은 크기로 축소하여 이를 중첩시키어 두 개의 지도가 갖는 차이점을 검토했다.

1) 산간지역
2) 인구분포가 희박한 지역
3) 조선시대부터 개척한 지역
4)잘못된 경위도의 측정

좌표와 방위
대동여지도가 제작되기 전에 우리나라의 각 도읍의 경험도 좌표에 의한 위치가 확립되어 있었다. 숙종 때 중국인 하국주 일행이 한성부에서 경위도를 여지도에 의해서 量定 하였으니 김정호가 저술한 대동지지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정조 신해년에 諸臣에게 명하여 의상을 밝혀 線表를 따라 지역을 분별하니 牧?府 112, 군현 222로 山水의 둘린 것을 분계하였다.」

「 정조 15년에 각 관찰사에 명하여 한양 분국고에 준하여 팔도관찰사영의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輿圖備志 상에 수록되어 있는 각 도편에 제시한 각 군현의 북극고도나 거경직선 방위 등의 수치는 정조년대에 각 관찰사영에서 측정한 것을 이용했다.
이를 볼 때 김정호는 그의 지도에 정조 15년에 측정한 전국의 자료를 사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여도비지에는 334개 군현에 대한 북극고도 편경도 방위각 거경직선 등을 나타냈다.

縮尺

대동여지도의 대한 축척은 일반적으로 1:160,000 - 162,000으로 알려졌다. 이는 대동여지에 제시한 반각표의 10리를 4km로 계산하여 산출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조사로는 10리를 5.5km로 보는 주장과 대동여지도를 현재 지도로 補正하여 축척을 산출하는 등 다양한 방법에 의해 대동여지도 축척에 대한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記號 -범례 (地圖表)

대동여지도는 현대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地圖表를 싣고 있는데 14개항목 22종이 된다.이는 동여도에 실린 지도표에 비해 12항목 21종 보다 많다. 그러나 항목과 종류에서 다소의 가감이 있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의 把
守 가 빠진 대신 동여도에 없는 古山城이 있다.
대동여지도의 지도표의 14항목을 분석하면 읍치, 역참,, 牧所, 능침, 도로, 방리의 6개 항목을 제외하고 모두 군사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군사적인것과 관련있는 항목은 有城과 無城 , 구읍지 유성과 같이 각 항목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체계있게 다루었다.

대동여지도의 기호가 당시에 출간된 다른 지도들에 비해 우수한 것은 도로상에 십리의 거리를 나타내는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러한 방점은 지지를 통해 지도를 읽는 사람에게 매우 편리하다. 가령 대동지지에 기재된 모든 군현이나 방리에는 방위나 거리가 나타나 있어 대동여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경기도 광주에서 충청도 음성을 간다고 할 때 이천, 陰竹 또는 여주 등지의 2개 도로의 里數를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지도표에는 표시하지 않았어도 전국의 군현 경계를 표시한 것은 대동여지도의 독특한 특색이다. 대동여지도의 행정경계는 ?경지까지 정확히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동여지도의 산술표현 기법은 45도의 각도로 위에서 산지를 평면에 투영한 일종의 산악투영법을 썼으며 하천도 단선과 쌍선을 써서 가항지역을 구분하였다.
實際로 남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에 있는 수타사 부근에서 하천의 쌍선이 단선으로 바뀐다. 현장조사에서 이곳의 古老들은 이곳에 수타사를 창건할 때 강 위에 작은 댐을 만들어 큰 목재를 실은 배들이 接岸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표현하는 기호를 체계있게 조직하였으며 기호를 판각하기 좋은 것으로 골랐을 뿐만 아니라 지도의 전체 균형에 맞도록 선정하여 조선시대에 발간된 모든 지도중 가장 우수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의 내용 분석

대동여지도에는 河系綱이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하나의 하천은 쌍선과 단선과 나타냈는데 이우형의 견해는 이것이 당시의 수상 교통로로서 可航地點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최완기의 조선시대 수로망도에서도 이를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홍천에 있는 수타사를 조사하여 확인한 결과 하계강에서의 쌍선으로 그려진 하천이 당시에 수상 교통로로 이용되었음을 나타낸다. 흔히 한강의 가항종점으로 북한강의 춘천, 남한강의 청주로 알려졌다. 그러나 춘천의 照陽倉이나 충주의 가흥창은 물산의 집산지이므로 가항지역은 상류 지방으로 훨씬 확대된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북한강은 금강산 부근의 회양까지 하천이 쌍선으로 그려져 있어 이곳까지 배가 다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하계망은 당시의 물류수송의 주된 역할을 맡았던 수운의 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의 12대천은 용흥강을 제외하고 한강, 예성강, 大津강, 금강, 사호강, 섬강, 낙동강, 영산강, 두만강, 대동강, 압록강 등이 모두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흐른다.

지명의 분석

대동여지도에는 모두 11,580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산지에 해당되는 지명 중 山 (3,017)의 명칭이 가장 많고 峯 (139), 岩 (130), 谷 (80), 溪 (49), 岳 (44)의 순으로 되어 있다. 산에 대한 표현 중에서 산, 봉, 악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지도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봉과 악이 암산이나 뾰족한 봉우리를 가진 유형의 산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산은 하나의 독립된 형태를 가진 것으로 산의 높이는 큰 관계가 없다. 봉이나 악은 삼도봉, 도봉, 답인악 에서와 같이 봉이 악보다 험한 지형으로 보인다.
암의 경우 觀音岩, 爐口岩과 같이 무인도나 산정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을 칭하는 경우가 많다.
고개에 해당되는 지명으로는 峴(500), 嶺(508), 峙(315), 古介(3) 등이 있다. 령의 경우는 대관령, 한계령 등 옛 관방이 있는 곳은 모두 령이 된다. 조령, 추풍령 등 교통 상 중요한 목을 하던 곳은 령의 명칭이 붙어 있다. 현과 치의 경우는 구분이 모호한 편이다.
일반적인 관습상의 고개는 현으로 많이 쓰였고 치나 령은 높고 험한 곳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 谷은 고을이란 의미와 상통하고 溪는 무릉계와 같이 rhfWKrl 자체를 뜻한다.
히천의 지명은 강(109), 천(818),수(24),탄(77)이 있다. 강은 천에 비해 긴 하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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