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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해설

동국(대)지도

조선후기의 지도 제작기술은 상당히 발전했는데 이 발전된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도가 정상기의 동국대지도이다. 이 지도가 세상에 알려 주게 된 것은 영조 33년(1757)에 홍양한 에 의해서다. 그는 정항령 家에 정밀한 동국대지도가 있었는데 이 지도는 산천도로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이는 百里尺을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의 착오도 없다고 보고 했다. 이 보고를 들은 영조는 승지를 시켜 지도를 가져오도록 했다,
영조는 지도를 보고, 「내 칠십 평생에 백리척 지도는 처음 본다」고 했다.

정상기가 지도를 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지금껏 세상에 행하여 오는 우리나라 지도는 부지기수나 그것을 보면 사본, 인본을 막론하고 모두 지면의 광협과 모양에 따라 제작된 까닭에 산천도리가 모두 맞지 않아 10여리 되는 근거리가 수백 리의 원거리 밖에 놓여 있는가 하면, 수백리의 원거리에 있는 것이 10여리의 근거리에 위치하면서 동서남북에 뻗쳐 있는데 , 혹은 그 위치를 바꿔놓기도 했으니 만일 이러한 지도에 의해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면 하나도 맞는 것이 없어 마치 어둠 속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를 매우 유감스럽게 여겨 이 지도를 만들었다.」

백리척은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평지는 100리를 1척으로 하고 도로 굴곡이 심한 산간지역은 120~130리를 1척으로 계산하여 차등을 두는 도법이기 때문에 사실에 가까운 직선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다. 이처럼 정상기, 정항령,정원림은 삼대에 걸쳐 지도제작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동국지도


정상기의 지도에는 축적자를 실었다. 100척은 9.5㎝의 길이를 나타냈으므로 지도의 축척은 약 42만분의 1이며 전도의 크기는 길이가 2.51m, 폭이 1.40m이고 분첩도는 길이가 1.02 m폭이 0.61m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도에 백리척과 같이 축척의 개념을 도입하여 지도를 제작한 것은 동국지도가 최초이다.
이 지도의 가치는 먼저 道別圖로서 이만한 크기의 지도가 나온 것으로는 최초라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정확한 축척을 사용하여 분도를 그리었고 이것을 다시 합치면 완벽한 全圖가 될 수 있게 한점은 동람식 지도가 도별지도를 합치었을 때 이것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지도 제작상의 큰 진전으로 보여진다.
정상기는 평생동안 지도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3대를 이어 지도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영조가 동국지도를 보고 감탄해 이 지도를 모사하여 비변사에 비치시키었다, 신경준도 그가 제작한 동국여지도 발문에서 정상기의 지도를 보고 그것을 약간 손질해 그렸다고 한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서 10리 方眼의 축척개념을 도입한 것은 정상기의 100리 척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대동여지도의 한반도 윤곽을 비교해 보면 김정호가 정상기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와 동국지도를 비교했을 때 북부지방의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치한다. 대동여지도가 발간되기 전 축척이 가장 컸던 동국지도를 여러 가지로 참조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동국지도와 가은 형태의 분첩지도긴 하지만 동국지도와 같이 도별로 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국을 22단으로 나눠 정확히 맞도록 한 것은 동국지도에 비해 기술적으로 進一步 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연구에서 )

정상기

본관 하동(河東). 자 여일(汝逸). 호 농포자(農圃子). 이익(李瀷)의 문인.
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여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여 역대 국경(國境) 변천의 역사·지리학적 검토를 기도하였고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궁실(宮實) 등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기술하였다.
특히 산천의 기사(記事)는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 안목을 보여주었으며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兵事)·산업·재정·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면에서 연구하였다. 실학파 가운데 이익을 종조(宗祖)로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만년에 아들 항령(恒齡)이 왕을 배종한 공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인자비감(人子備鑑)》 《농포문답(農圃問答)》 《심의설(深衣說)》 《도령편(韜鈴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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