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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지도의 마무리 - 대동여지도
- 다시 보는 김정호

<대동여지도>가 잘 알려진 데 비해 제작자 김정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나마 전해 오는 일화로 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세 차례나 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등정했으며, <대동여지도>가 완성된 후에는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에게 탄압을 받아 옥사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마저도 대부분이 허구이거나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김정호를 아는 이들이 기록한 내용에 의하면,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좋은 점만을 취해서 집대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비록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다 하더라도 김정호는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신분이 별로 좋지 못했던(김정호는 양반이 아니었다) 그가 국토에 애착을 갖고 평생을 바쳐 국토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지도 제작자가 아니라 국토를 연구한 지리학자였다. 그는 <대동여지도> 이외에 <청구도>, <동여도>,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 등을 제작, 편찬하였으며,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기존 지도의 장점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했으며, 처음으로 범례를 사용하여 새로운 차원의 지도를 선보였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밑거름은?

작은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는 답사를 하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 쉽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전국을 나타내는 지도는 답사만으로는 그릴 수 없다. 즉, 전국 지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먼저 국토 경계의 확정과 국토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국토 경계가 확정된 고려 말∼조선 초는 전국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시기로, 실제로 조선 초에 팔도지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 시대 내내 크고 정확한 지도는 아닐지라도 전국 지도가 국가 혹은 민간인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이는 김정호가 <청구도>나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다른 사람의 지도를 참고 했다고 기술한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지도는 그림과 다르기 때문에 국토의 윤곽을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려면 그에 따른 정교한 제작 기술이 있어야 한다. 즉,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실적인 지도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지도 제작 기술이 차례로 도입되었다. 17세기에는 방안 지도가 그려졌고, 18세기에는 백리척의 사용으로 지도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전래의 지도 제작 기술은 <대동여지도>에 그대로 이용되었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기존 지도들의 성과와 제작 기술을 집대성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김정호 개인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전국을 답사한 것은 아니지만 김정호는 지속적으로 지도에 관심을

 

갖고, 보다 나은 지도를 제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대동여지도> 이외에 <청구도>, 수선전도 등의 지도와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와 같은 지지를 저술하였다.

특히 <청구도>는 애용의 정확성이나 지도로서의 구비점 면에서는 <대동여지도>보다 못하지만 지도의 크기와 내용 면에서는 <대동여지도>에 뒤지지 않는다. 한편 <대동여지도>의 출현은 출신 성분이 그리 좋지 못했던 그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 준 많은 사람들(최한기, 신헌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구성되었나?

(사진/ 지도 앞의 사람과 비교해보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출전: 한국고지도 발달사)

<대동여지도>는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하여 22단으로 나누고, 각 단은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로 하였다. 즉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로 만들어 휴대와 열람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1절의 크기는 약 가로 20㎝, 세로 30㎝ 정도이며, 모든 단을 연결하면 가로 약 3.3m, 세로 약 6.7m의 대형 지도가 된다. 축척은 대략 1:216,000 정도이다.

제1단에는 지도유설, 팔도에 대한 통계표, 수도 한양의 지도인 경조오부(京兆五部)가 그려져 있으며, 1단 좌측면에는 지도표(地圖標)가 있어 14개 항목, 22종의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유설에는 지도 제작의 목적이 나와 있는데, 여기서 김정호는 국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국가 발전의 기틀이므로 좌도(左圖)로서의 지도와 우서(右書)로서의 지지가 꼭 필요하며, 특기 국방상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대동여지도>의 뛰어난 점은?

어떤 기호가 사용되었나?

 

<대동여지도>의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되는 지도표를 사용했다는 데 있다. 14개 항목의 22개나 되는 범례를 이용하므로써 좁은 지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14개 항목 중 읍치(邑治), 역참(驛站), 목소(牧所), 능침(陵寢), 도로(道路), 방리(坊里)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군사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이는 지도유설에도 기술되었듯이, 지도가 전시에 군사 작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의견을 실제로 지도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도표에는 없지만 군현 경계를 점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행정 조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산지와 하천 역시 <대동여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지도표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아마도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너무나 상식적인 기호였기 때문일 것이다.

산지와 하천은 어떻게 표현하였나?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굵고 검은 선으로 표시된 산줄기이다. 즉, 산을 개별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모든 산을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산지의 크기는 선의 굵기를 이용하여 나타냈는데, 낮은 산지는 가늘게, 높은 산지는 산형을 중복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태백산과 지리산 같이 산세가 험한 산은 산정을 특별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풍수 지리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산들이 줄지어 선 모습을 통해 기의 흐름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하천과 산맥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의 원칙을 지켜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현대의 산맥 인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천은 쌍선과 단선으로 표현하였는데 항해가 가능한 하천은 쌍선으로, 불가능한 하천은 단선으로 나타내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수운 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로와 행정 경계, 섬은 어떻게 표현하였나?

 

조선 시대의 도로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대로(大路)와 대로에서 갈라진 간로(間路)로 구분되었으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같은 굵기의 선으로 표시하였다. 조선 시대는 대략 30리마다 역참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의 도로에는 수많은 역참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도로에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어떤 구간이라도 거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점 간의 거리가 지도상에서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평가 지역에서는 대략 2.5㎝ 정도이나, 산악 지역의 도로나 꾸불꾸불한 도로에서는 이보다 짧게 나타난다. 이는 길의 가파름과 굽이진 정도를 평면인 지도상에 나타냈기 때문이다. 한편 지도를 흑백으로 목판 인쇄하였을 때 생길 수 있는 하천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도로는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대동여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된 조선 시대의 군현 경계는 오늘날의 행정 경계와 달랐다. 강이 경계가 될 때 오늘날에는 강의 가운데를 행정 경계로 삼지만, 조선 시대에는 강을 토막 내어 각 부분을 이웃 군현끼리 나누어 가졌다. 산 줄기도 마찬가지여서, 오늘날에는 산의 능선이 행정 경계선이 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각 산의 소속이 분명했다. 이것은 지도 제작의 한계가 아니라 그 당시의 행정 제도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조선 시대의 행정 경계는 오늘날과 같이 인위적으로 나눈 경계가 아니라 자연 환경에 따른 생활 권역으로 구분되었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오류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곳은 도서 지방이다. <대동여지도>에는 1,105개나 되는 섬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 섬은 방향과 거리가 정확하지 않으며, 지형도 실제 모습보다는 그림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이는 목판 인쇄라는 한계와 자료의 미비 때문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지금도 유용할까?

어떻게 <대동여지도>를 이용하여 지역을 분석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여주(驪州)ㆍ이천(利川)을 중심으로 한 경기 동남부 지역을 사례로 살펴보자.

이천의 위치

조선 시대의 이천은 서쪽으로는 양지현(陽智縣), 죽산(竹山)도호부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음죽현(陰竹縣)과 닿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여주목(驪州牧), 북쪽으로는 광주목(廣州牧)과 이웃해 있다. 보통 행정 구역의 경계는 산줄기나 하천과 같은 자연 경계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천의 경우도 북쪽과 서쪽은 산줄기에 의해, 남쪽과 동쪽은 하천에 의해 이웃 군현과 구분되고 있다. 이웃 군현과의 거리는 도로 위의 방점을 보고 알 수 있는데 양지와는 30리, 음죽과는 50리 떨어져 있다. 조선 시대의 이천은 현재의 이천보다 면적이 작은데, 이는 조선 시대의 음죽과 이천이 통합되어 오늘날의 이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지와 하천

이 일대의 서편에는 산줄기가 연속되어 있고, 동편에는 남한강이 흐른다. 따라서 대다수의 하천이 동쪽으로 흐름을 알 수 있다. 이천과 음죽은 배후에 산이 있고 전면에는 하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 읍치이다.

인문 현상

지도표에 있는 기호를 이용하여 경기 동남부 지역의 인문 현상을 분석해 보자, 먼저 이천에서 동남쪽으로 30리, 여주에서 서북쪽으로 10리 되는 지점에 산으로 둘러싸인 英 기호가 있다 英 은 ○+英으로, ○는 왕릉을 나타내는 기호이고, 英(영)은 왕릉의 명칭이다. 따라서 英 은 영릉, 즉 세종 대왕릉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일대에는 군사 시설로 이천과 음죽의 배후 산지에 고산성이 있고, 이천과 죽산 경계의 건지산(巾之山)에 봉수대가 있다. 교통과 관련된 시설로는 주요 도로변에 있는 아천역(阿川驛:○)과 같은 역참과 남한강 가의 이천창(利川倉:■) 등이 있다. 이 밖에 신라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신륵사(神勒寺)와 마암(馬岩)이 있는데, 이 마암은 여주 옆에 있는 바위로 검은 용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의의

<대동여지도>의 의의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제작된 지도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점이다. 즉, <대동여지도>는 지도 윤곽 및 지도 내용의 정확성, 산지와 하천의 표현 방법, 방점으로 도로상의 거리 표시, 군현 경계 표시, 기호 사용 등 이전 지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된 지도이다. 이렇게 앞서 제작된 지도의 발달 성과를 종합하여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정밀한 지도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변화에 부응한 점은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국토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우리가 조그만 토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기술과 생활상을 추론하듯이, <대동여지도>를 통해서 그 당시의 국토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대동여지도>는 기록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국토 모습을 보여 주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1861년부터 네덜란드의 기술을 빌려 1/50,000 지형도를 완성한 1963년까지 100여 년 간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 100년 간의 암흑기를 일본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럽지 않은가?

지리교사 모임 '지평', 『지리로 보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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