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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앞에는 지난 번 카이로에 갈때 비행기좌석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이 사진은 지난 TEAM때 어느 여승무원이 나 모르게 찍은 것이다. 내 아내는 비교적 사진 빨이 좋다고 책장위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 걸어둔다.간혹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집트 갔다온 기억을 하며 이집트의 신비감에 사로 잡히곤 했다.뭘 보았을까. 그저 만년 아니 이 만년의 역사를 가진 이집트라고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곳을 지배해온 파라오 뿐 아니라 이곳의 진정한 역사의 주체인 생활인의 모습을 느껴야 한다.


이제 조그만 경험이지만 이집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된다면 우리 것의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이집트 탐험을 하고자 한다.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우리는 문명화된 이집트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지금은 사막에서 폐허가 된 고대의 이집트 문명을 방문하는 것이다.참다운 용기와 끈기없이는 돌더미와 먼지 그리고 곳곳의 폐허만을 볼 것이다.그러나 뜨거운 열정과 동경은 여러분을 사막에서 초인을 만나게 해 주리라 확신한다.


나는 일천구백 구십사년 시월에 세계4대 문명중 最古라는 이집트를 방문 했다.이집트하면 피라밋이 떠오른다. 스핑크스가 떠오른다....
제다를 출발하여 잠시후 시나이 반도 상공을 비행한다.소위 십계라는 영화의 시내산이 있는 곳이다.이 곳은 모세가 사십년간 유대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던 중 하나님의 시험을 당해 40년간을 하늘에서 주는 만나와 꿀을 먹고 헤매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내던 곳이다.
여러분 상상이 가는 지 모르겠다.진정한 경험은 상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이 곳을 지날때 왠지 모르게 신비로움이 계곡과 들판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영의 힘이 계곡을 휘감고 있었으며 들판에 운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모세의 외침이 떠올랐고 그 백성의 행렬이 보이는 듯 했다.


이제 카이로에 도착하여 가는 데 역시 만년의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었다.호텔은 나일 힐튼인데 쾌 유명한 호텔이다.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살인사건이 촬영됏던 곳이라나.호텔에 들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TOUR CONDUCTOR인 아메드와 우리의 일정을 협의 하는 일이다.우리는 룩소르를 가기위해 시내 본사에서 발권부터 했었다. 원래 160$인데 CREW DISCOUNT 하여 80&로 낙찰을 봤었다. 승무원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80$이나 아끼다니. 이후 잠시 쉬었지만 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이집트는 나를 오래 자게 만들 지는 않았다. 사실 벽에 박는 드릴 소리에 잠을 깻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계시로 들렸다. 어서 일어나 박물관으로 가거라 하여 나는 천년의 잠을 갠 미-라의 모습으로 박물관으로 향했다.(머리카락이 다 일어난 채로)


먼저 박물관에 들어가니 그 규모에 놀랐다.약 100,000점이 진열 되어 있었다.우리 중앙국립박물관은 약70,000점 정도인데 6,000점 정도가 진열되어 있고 나머지는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아뭏던 상당한 크기인데 게시판을 보니 그 역사의 게보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데 대충의 그리고 이해를 돕게 쉽게 설명해본다.

이집트는 BC5000년 경부터 그 문화가 전해진다.우리는 이를 신석기 시대라 부르는데 소위 돌을 갈아쓰는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시기이다.이때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는 벽화나 기타 다른 기록에 의 해 이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우리는 이를 선왕조라 부른다.

앞은 특정왕조를 알 수없었기에 先왕조라 불렀지만 이제 부터는 초기왕조라 불러보자.이는 1~2왕조이다(BC3000-2705)이의 유적지는 카이로 근처에 있는 샤카라와 아비도스에있다.(참고로 이들 도시와 神들은 부록 참고요망)
대표적 무덤은 샤카라에 있는 제 1왕조 4번째왕인 메네스의 묘다.두번째 주목해야 할곳이 멤피스로 수도를 옮긴 제세르의 묘이다.이 묘제가 스텝 피라밋의 시초이며 , 이 곳에는 신비로운 글짜들이 새겨져 있으며 많은 고고학자의 연구가 진행되는 곳이다.이 시기는 나중에 유행하는 palette가 많이 발굴된다.

사실 초기 왕조 시대는 일반인의 발길을 그다지 사로 잡지 못한다.왜냐하면 우리는 다음시대인 고왕국시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벌써 눈치챘겠지만 이 시기에 와서 많은 ,거대한 피라밋을 건설했기에 피라밋시대라 불리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쿠푸,카프리,멘카우리의 기자에 있는 피라밋이다.이 셋이 이집트에서 가장큰 피라밋이다.그러나 간과해서는 않 될것이 선대왕인 됴셔왕의 피라밋인데 이는 샤카라에 있는 STEP식 피라밋이다.
이 같은 돌무지 무덤은 우리나라에도 산재해 있다.특히 장수왕의 무덤이라 일컬어 지는 장군총은거의 됴셔왕의 무덤과 흡사하다.동양의 유일한 피라밋이라 불리운다.(BC2705-2155)(3~6왕조)

앞 선 고왕국시대의 말기에는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어 혼란의 시기가 온다.많은 지방의 관리들이 경제적,정치적으로 독립하려한다.이것이 제1혼란기이다.(BC2155-2134)이 짭은 시기에 여러언어의 묘사나 그림이 정형화 되었다.

다음은 중왕국 시대인데 (bc2134-1781)(11~12왕조) 이 시기에 통일이 되어 소위 룩소르라 불리우는 THEBE 지역이 종교의 메카가 된다.
12왕조때는 수도가 북쪽의 엘리쉬트로 바뀐다.이때는 많은 파라오의 무덤이 진흙벽돌로 바끠는데 우리식으로 하면 전축분이 생긴다. 내 생각에 의하면 무덤의 방식 소위 묘제는 재료뿐 아니라 무덤 내부도 쉽게 바뀔 수 는 없는데 아마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산재한 진흙 무덤에 의한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즉 남쪽 소말리아 등의 무역뿐 아니라 북쪽의 메소포타미와의 무역이 성해 지는 것이다.
피라밋에 새기는 글이 이 시기에 와서는 관에 새겨지며 관에 장식이 유행한다

약 350년간의 태평성대 뒤를 이어 어린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힉소스라는 북방철기문화를 가진 유목민의 침략을 당하게 된다.이 들은 말을 부릴 줄 알았으며 마차를 사용했다.그리고 철로 된 칼을 사용했다.
여러분은 철칼의 위력을 상상할 수있늗가. 청동이나 돌로 땅을 일구다가 호미나 낫을 이용한다면 이는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일일 것이다.
농업의 생산력이 증대하며 가진 자의 부가 축적될 것이다.아뭏던 힉소스의 말발굽 아래 1세기 이상 유린 당했으며 결국 테베의 왕족들은 결속하여 힉소스를 멀리 그들의 나라로 쫓아 내었다.

드디어 우리가 기대하는 룩소르의 신왕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간단히 신왕국시대를 소개하면 이 시기는 18~20왕조에 속하는데 (BC 1550-1070) 이집트 문명의 황금기라 부를 수 있다.특히 하트쉡수트와 그의 庶子인 투트메스 3세를 주목해야 한다.투트메스 3세는 이집트의 영토를 가장 넓혔으며 조공과 전리품으로 엄청난 국가의 부를 가져왔다.당시 수도 근처의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그 다음 다음의 계승자인 아멘호테프4세는 소위 아마르나 예술이라는 문화적 가치를 확립한 사람이었다.그는 신전의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 지므로 수도를 엘 아마르나로 옮기게 했으며 그 이전의 정형화한 왕의 모습을 사실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나중에 박물관에서 자세히 볼수 있겠지만 그 의 모습은 다소 과장되며 그 이전의 파라오와는 다소 틀린 모습을 하고 있다.서양식의 인상주의적 기법이 스며 들어가있다.우리나라로 보면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인 윤두서선생의 자화상은 사실성이 넘치며 세밀도에 있어 피카소의 자화상에 못지않는다고 한다.그러면 피카소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나?그것은 피카소는 예술의 영역에 있어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다.역시 겸재 정선이나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을 생각나게 한다.그들의 그림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면면히 계승된다.서양의 그림은 보는 그림이지만 우리네 그림은 읽는 그림이다.그것을 讀話法이라한다.


여기서 잠시 쉬어 나의 여행을 계속하도록 하자.그 다음 날 나는 꿈에 그리던 룩소르를 향하게 되었다. 새벽 5시에 눈이 뜨졌다.그 전날의 피로로 또한 피곤해 잠에 떨어 졌을 때에도 룩소르의 왕자를 꿈꾸었기 때문일까 .
억지로 지친 몸에 토스트를 꾸겨 넣고 로비로 내려왔다. 기억해야할 것은 작은 택시나 접보 택시나 동일한 가격이라는 말을 호텔 직원에게서 듣고 물론 점보를 타고 카이로 국내선을 향했다.
일본인은 어디를 가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상당수의 외국인이 줄을 서고 있었다.시간이 되어 비행기는 이륙했고 안개가 낀 날씨로 turburence가 심해 서비스를 중단하게 했었다.안타깝게도 나는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나일강을 따라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 760km정도이고 비행기로는 600km가 넘는다고 들었다.생각같아선 배로 여행하고 싶지만 이만 한 것도 사실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도착 할 즈음 강력한 태양이 떠오르면서 룩소르의 비옥한 농토가 눈앞에 펼쳐졌다.공항을 나오면서 화장실을 들렸는데 꼬마들이 따라 들어와 화장지를 주고 갖은 애교를 다 떨었다.그렇지만 흔쾌히 이들에게 tipping를 주었다.이들 또한 영광된 고대 이집트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공항을 나서니 아멕스 직원이 KOREAN AIR CREW냐고 물었다.그는 깔끔하면서 상냥했고 친절이 오랬동안 몸에 배인듯 했다.아마 대한항공 여승무원의 미모를 고려한 듯 했으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룩소르의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시내에는 마차가 다니고 있었고 아마 일 이백년은 과거로 돌아 온 느낌이었다.시내 곳곳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모스크에서는 아침기도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연기는 파리를 쫒기위해 피우는 것 이라한다.
아멕스 사무실에 도착하니 떡대가 좋은 아저씨가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란다.참고로 말하면 이집트인은 대부분이 자기가 고고학자라 한다.아뭏던 그는 무뚝뚝 했고,느렸으며 거만해 보였다.
차가 나일강가에 도착했다.카이로에서는 나일이 멀게 느껴 졌으며 가까이 하게는 먼 당신으로 생각 했는데 여기에는 무척 가깝게 느껴졌고 친근 하게 생각 되었다.배에서는 조랑말을 타기에 적합한 노인이 항해 선장이었으며 얼굴은 담배에 쩔여 있었다.그는 핸들을 승객에게 맡겼으며 무척 장난끼가 있었다.

이제 배가 나일강의 서안에 도착했다.그동쪽은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 가기 적합한 곳이었으며 , 이 곳 서안은 죽은 자 들만이 묻혀 천년의 영화를 누리는 곳이다.태양이 아침에 동쪽사막의 지표에 떠올라 창공의 강을 지나 저녁때는 서쪽사막에 진다.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을 이기고자 오시리스 가 되고자 했다.이제 죽은 자의 도시를 방문한다.
처음에 도착한 곳이 메논 거상이다.자 이제 우리는 고정관념을 버리자.언제 어느때 누가 얼마 만큼의 인력을 들여 만들었는 지 등 이러한 것은 책을 보면 나온다.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볼때 접합부분의 예술성 기단부의 견고성 당시 사람의 생각,종교와 예술의 관계 그리고 시대성을 엿볼 수있는 건물의 재질 형태에 대해 생각하며 그 건축에 참여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자.
차는 계속해서 사막의 한중앙으로 들어 왔다.차 주위로 구멍이 사막에 나와 있었다.역시 무덤이었으며 지금은 많은 도굴로 껍데기만 남았다.나중에 그곳에 토기 굽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을 다시 들리게 된다.쿠르나마을이라 들었다(?)

이제 KING'S VALLEY 소위 왕가의 계곡 이라 불리우는 곳에 이르는데 단순히 큰 돌산을 깍아 놓은 듯 했다.이 골짜기에는 62기의 크고 작은 왕묘가 있다고 하는 데 내 눈에는 불과 5,6기 밖에 보이지 않았다.아마 처음에는 람세스 6세의묘에 들어 갔다. 백미터나 걸었을까.통로라고 하기에는 격이 맞지않아 통랑이라 부르자.통랑을 거치면서 구석구석 함정을 파두었다.마치 그곳에 묘의 전실이 있는겄 처럼 가장하여 도굴꾼을 유인해 영원한 죽음에 빠뜨리는 것이다.그곳 천정에는 <낮의 서>라는 벽화가 있다.길게 늘어진 신은 누트라는 태양 아톤의 어머니 이다.(도록 참고 바란다)

그옆의 묘는 그 유명한 황금 마스크의 주인공 투탕카멘의 무덤이다.이집트의 묘는 왕이 재위한 순간부터 그 왕이 죽을때까지 만들기때문에 불과 통랑의 길이가 이 삼십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왜냐하면 투탕카멘은 18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이다.그러면 왜 이조그만 묘가 유명한것인가? 카이로 박물관의 상당한 보물을 차지할 만큼의 엄청난 부장품이 왜 이 묘에서 발굴되었나?
나는 오랫동안 이 의문에 빠져있었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투탕카멘은 이큰아톤(아멘호테프 4세)의 계승자다.이큰아톤이 예술을 위해 노력할 때 많은 외세의 침략에 부딪혀 투트메스가 가져온 영광을 잃어 결국에는 실각 되었다.아마 이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는 어린 나이지만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운 것은 벽화나 파피루스의 그림에서 엿 볼 수있다.
그의 죽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다.그의 아내 안케센아멘과의 사랑을 죽음의 세트 신이 시샘을 하였는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택했는 지 는 알 길이 없다.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슬프게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미-라 목근방에는 이름모를 꽃이 있었다 한다.
물론 이꽃을 놓은 사람은 그의 부인이다. 14살쯤 되었을까? 이 어린 소녀는 비록 왕비지만 지아비를 잃은 심정은 장돌뱅이의 아내와 무엇이 달랐을까?
카터 박사가 이꽂을 발견 후 사진기자가 이꽃을 손대자 3500년간 간직해온 안케센아멘의 사랑은 사라졌다.투탕카멘이여 그 정도면 만족할 만 하지않은 가? 라고 나 혼자서 시불댔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투탕카멘은 1930년대에 도굴이 전혀 되지않은 채 카터박사에 의해 발견이 되었다.우연한기회에 발견된것이다 . 아니 오히려 발견되지 않기위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의 무덤은 도굴을 피해 사막에 혹은 피라밋에 입구를 찾을 수 없도록 장치해 두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무녕왕릉을 얘기코자 한다.공주 송산리고분군에 있는 무녕왕릉도 1971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 되었다.우리나라 고고학계의 대부이신 故김원룡박사계서 직접 발굴을 하셨는데 정부의 지나친 간섭으로 제대로 규명도 못한 채 공개가 되어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김박사계서도 살아 생전 간섭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다.
이 둘의 묘는 비슷한 점이 발견되는데 둘다 완전한 부장품이 보존 되었고 ,무녕왕의 왕관과 황금마스크의 대비, 3000여점의 출토유물이 나온 반면 투탕카멘은 만 점이 넘었다.백제의 수많은 왕묘도 나당 연합군에 패한 뒤 엄청나게 도굴에 시달렸다. 망한 왕조의 당연한 귀결일까.얼마 전 세계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향로가 발견되었다.우물 속에 빠뜨려진 것이 1400년이 지난 오늘날 발굴된 것이다.귀한 것이기에 어느 시녀가 쫒아오는 병사를 피하여 몸을 던진 것은 아닐까?
무녕왕릉은 당시 중국남조에서 유행하던 전축분을 사용하여 무덤안에 설치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했으며 새로운 공법의 사용이었다.그렇게 크지는 않으며 입구에는 연도가 있었으며 관이 놓인 현실이 있다.
도서남북에는 불을 켤 수 있도록 등감을 설치했다.작년에 갔을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오랜만에 찿아오는 손님이어 무녕왕이 흘리는 눈물일까? 관 옆에는 지석이 있었다.이것은 살아 있을 때는 왕이었지만 죽는 뒤에는 지신에게 땅을 사겠다는 내용이다.그리고 그옆에는 동전 한꾸러미가 놓여있다.참으로 한국인다운 소박한 생각이다.바깓에 나오니 비는 그치고 자욱한 안개가 끼어 仙景을 느끼게 했다.


투탕카멘의 묘를 빠져 나와 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삶,죽음,현실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 곳에서 룩소르신전으로 향했다. 이 곳은 고왕국에서 신왕국까지의 건물을 증축한 곳이다.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그러나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큰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아니니까.원래 사람도 큰 놈이 싱거운 법이다.
이 곳 입구에는 오벨리스크가 두 개 서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밖에 없다.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당시 터키의 칼리프가 프랑스의 시게와 이 오벨리스크와 맞 바꾸었다는 것이다.세월은 흘러 그 시계는 고장이나고 오벨리스크는 여전히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며 콩코드광장에 이집트산 프랑스국적으로 귀화한 채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그옆의 카르낙신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스핑크스가 제각기의 모습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부서진 폐허로 석양이 지고 있다.사제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건물 저쪽에는 지성소라 일반인은 범접을 하지 못한다.사제들의 은밀한 입문의식이 있었으리라.때로는 죽음도

이러한 영광과 기술의 축적이 신왕국이 끝나고 말기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의 알렉산더의 침략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로마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집트의 문명도 변화의 시기를 거치고 그리스의 파르테논 크레타문명,로마의 프로 로메인의 개선문등도 카르낙의 벽돌에 기초했다.


서쪽 죽음의 땅에 땅거미가 진다.조용히 눈을 감아본다.이제 룩소르의 태양은 그들 만의 것이 아니다.내 마음 속의 <라:태양신 아톤,호루스>인 것이다.이집트의 서쪽 저편은 ATLANTIC OCEAN이라 한다.고대의 이집트인도 어느날 갑자기 멸망한 아틀란타 제국을 동경 했을 것이다.그 들도 제국에서 탈출한 사람은 아닐까. 아틀란타 그 곳은 고대 이집트인이 돌아가야 할 피안의 세계인 것이다.마치 제주인의 가슴에 이어도가 있는 것처럼.

이제 스스로 여러분이 느껴야 할때다 .
이 작은 글이 조그만 동심원처럼 그리움의 파문이 일길바란다.이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우리 것을 소중히 지킬때가 아닌가.재주없는 글로 우리 것과 이집트를 비교도 해봤다.
며칠전 경마장과 고속전철이 설치된다는데 뜻있는 교수들이 반대했다.상당한 저항을 받았다.룩소르에 경마장과 고속전철이 생긴다면 어떤가.이집트인의 지혜는 만년을 감동시키고 우리는 천년을 지키지도 못한채 끝끝내 이어도로만 경주를 기억하지는 않을지. 룩소르의 거리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나고 저녁 예배의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1995.03.26
이집트를 다시 방문하기 전 날 부천 복사골에서
차문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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