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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長 용소골 옛길 현지답사
 
機長 용소골 옛길 현지답사 1.현지답사일 : 2004년 4월 9일 ~10일 2.현지답사자: 기장 향토사학자 공태도 선생, 기장군청 문화관광과 관계자(이상 용소골 답사)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고문 이창렬, 차문성 (이상 용소골 및 철마면 송정리~ 용당리 답사) 3.답사내용 1) 기장읍의 용소골 기장읍 용소골 초입 기장의 서문 방향에 있는 용소골은 현재는 주공아파트 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기장과 양산, 동래를 연결하고 북쪽으로는 소위 울산-경주-안동과 연결되는 영남좌로로서 한양과 연결되는 기장과 양산, 동래를 연결하는 幹線道路였다. 산록을 올라가다 보면 얼마가지 않아 저수지를 만나는데 그 옛길의 일부는 저수지로 인해 끊어져 있다. 자가용 한대가 겨우 올라갈 만한 저수지를 돌아 올라가면 돌들이 불거져 있는 언덕길이 시작되는데 조성한 시기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길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흔적을 볼 수 있다. 안내석 우측에 평지가 있는데 과거 주막이 있던 자리였다고 하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주막은 조선 고종때 우역제도가 폐지된 (1885) 이후 자연스럽게 驛館이 사라지자 그 역할이 주막으로 민간에 대체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 길을 가다 이내 왼편에 용소골 위에서 흐르는 물이 고이는 龍沼를 만난다. 용소에는 기장 현감들의 이름이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데 주로 19세기 후반에 부임한 현감들의 이름이다. 기장의 향토사학자 공태도 선생께 확인해 보니 저수지 공사 때 이 같은 암면이 다수 파손되었다 하니 그 以前 시기의 현감들의 이름도 있었을 걸로 짐작된다.. 용소 바위면 아래에는 바위를 받치는 축대를 쌓아 두었는데 막돌 허튼층 쌓기로 암석에 새긴 비석의 좌대로 사용하고 있음이 돋보인다. 기장의 龍沼는 영남대로의 관문인 문경새재길의 용추와 비교해 볼 때 못의 규모는 작으나 岩面에 새겨진 觀察使 이름 대신 현감이름이 새겨지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 주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장소로 교통로에 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이 있다. 용소를 올라서면 人馬에 닳아서 반질반질한 바위를 올라가는데 바위면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암석을 얕게 판 흔적이 보인다. 오가는 백성들은 상관이 없겠지만 관리들이 가마를 타고 용소골을 오르내릴 때는 사인교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갔기 때문에 바위면에 인공적으로 얕은 새김질을 하였다. 소위 영남대로의 황산도로 알려져 있는 ( 밀양에서 물금방향) 황산 棧道는 상당부분 물에 잠겼지만 그 길의 일부에는 이같이 바위면에 새김질을 한 부분이 있으므로 인공적인 棧道의 略化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져 있지만 저수지 아래에 내려가는 바위 길에도 이 같은 형태의 새김질이 더 있을 것으로 본다.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여근석이 있는데 여근석의 아래에도 돌을 2단으로 받쳐 놓아 감실의 형태를 만든 것을 보면 돌을 던지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근석 아래의 구멍에 돌을 던져 지나가던 사람들의 生男과 무탈을 기원하는 전설은 교통로에 면해 있는 옛길에서 흔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여근석 아래에는 잔돌이 수북하다. 여근석에서 얼마를 더가면 밭이 나오는데 마을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곳에는 유달리 돌들이 많다고 한다. 산성이 가까운 곳에 있지 않는 것을 보면 길을 조성하기 위한 踏道도 생각된다. 차에 올라 기장신역(신명역) 을 찾기 위해 안평으로 갔지만 신작로에 밀린 옛길의 흔적은 기장의 용소골 만을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아월역은 현의 북쪽 48리에 있고 신명역은 성의 서쪽으로 1리에 있다”하므로 기장읍성의 서쪽인 지금의 주공아파트와 저수지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따라서 기장신역이라 불리는 신명역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고 본다. 기장신역(신명역)은 기장-용소골-칼치재-아월역-송정리 종주시 다시한번 검토하기로 마음먹고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로 향했다. 2)기장 철마면 送亭里 기장의 옛길을 연결해주는 역은 기장 철마면의 아월역 과 기장읍의 기장신역(신명역)이다. 기장의 서문을 나서 기장신역과 용소골을 지나 칼치재 아월역으로 연결되고 양산이나 동래에서는 기장의 초입 철마면의 아월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기장으로 향한다. 이 길은 앞서 말한 용소골 옛길에서 칼치재를 넘어 철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림 아월역 추정지 현지답사를 통해 이 길은 현재 대우정밀 공장으로 인해 길이 끊겨 있다. 10만분의 1 지도에는 길이 끊겨 있지만 부산광역시 전도에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송정리 마을 주민에 의하면 이 길은 달구지 하나는 올라 갈 수 있는 중로에 해당한다고 한다. 용소골 ~ 아월역에 이르는 길은 오가는 관원을 위해 이용되어 지다가 점차 통행이 많아지자 서민들이 많이 이용하면서 확장되어 졌을 것이다. 기장의 해산물과 내륙의 곡류, 육류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고 이로인해 자연히 場이 발달하게 되어 지금도 송정리에는 5일장이 남아 있다. 더욱이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는 조선시대의 사신이나 중앙관료들이 남으로 이동시 이용되는 영남좌로 (안동- 경주 -울산- 양산-동래)의 옛길과는 만나는 교차점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渡日시 양산 방향(영남중로)에서 오는 부사와 안동-울산에서 내려오는 정사가 만나는 지점은 지금의 노포동인 소산역을 지나 기찰입구인 십휴정(관문 앞 오리에 있는 관원을 위한 정자 소위 오리정이라 함)이란 정자에서 이다. 이곳에서 사신들은 흑단령을 갈아입고 악대를 앞세워 사신의 위엄을 갖추고 동래성에 입성을 한다. 일행은 송정1리의 이장댁을 찾아 ‘맥’이라는 村誌를 구하고 마을의 유래를 들었지만 이곳에 있던 阿月驛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장댁에서 불과 10m 거리에 있는 송정천의 길 건너편에 큰 느티나무 몇그루가 보였다, 관아터는 지금도 군.면소재지로 이용되는 곳이 많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역관은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마을사람들이 과거 계급제 사회에서 내키지 않는 역마을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1885년 갑신정변 이후 우역제의 폐지로 역관은 주인없는 장소가 되어 버려 기억에서 조차 잊혀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驛館을 찾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는데 첫째는 넓은 대지와 잘 다듬어진 기단과 거북머리등의 초석(熟石)이고 다음으로는 나무다. 특히 관아에서 사용한 느티나무등이 중요하다. 흔히 정자가 있는 곳은 물과 버드나무가 있는 이치와 같다. 그리고 우물과 비석등도 중요한 포인트다. 이곳이 옛 아월역터가 아닌지 마을 古老에게 여쭤보아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새 길이 나면 자연히 옛길은 잊어버리기 마련일 것이다. 送亭川 주변에 있을 법한 버드나무는 없지만 수령 300~500년이 된 5그루의 느티나무(팽나무)는 과거 공공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몇 개의 기단석이 주변에 있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일제 때는 주재소로 이용이 되었다지만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다. 수원 화성의 관사가 일제 때 경찰서나 군, 면소재지로 이용된 것을 반추해 볼 때 우역제도의 폐지로 사용용도가 없는 이곳이 주재소로 이용되었다는 말은 단초가 된다. 조선통신사나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가 동래와 부산진에 올 때는 동래부의 속현이나 독현인 경우에도 연회에 사용하는 특산물과 선물을 차비해 마중을 나온다. 이런 때 기장의 현감이나 하급관리들이 들리는 곳도 자연히 아월역 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역은 30리마다 역원이 있지만 산길인 경우 일정하지는 않다. 오히려 여행자가 해가 떠서 지는 시점이 역원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을 것이다. 30여리를 걸어 평지에 이르러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달이 뜬다”는 의미의 아월역 에서 하루의 피곤을 푸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送亭이란 의미도 “떠나 보내는 정자”라는 의미에서 아월역과 함께 송정리에 존재했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역과 정자가 같은 자리에 조성되었다고는 보지는 않는다. 이는 수원의 영화정이 수원의 초입인 지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영화역과는 일정 거리가 있었다. 기장의 고적을 노래한 車城歌의 하서면에는 “반월성 도라든니 新月이 그 안닌가. 두전의 사닌 곡률 부명이 종종하다. 임곡사양 저문 길의 立石에 말을 매고 우리 벗님 보내는데 그 안니 送亭子가 임기촌에 꽃푸였고 백운산에 달떠온다. 선여사 깊은 골의 고적을 찾아드니 은은한 석경소리 망일암이 분명하다.”라는 글에서 新月은 아월을 의미하고 송정자는 이별의 惜情을 나누는 장소로 불려온 것으로도 생각된다. 아무튼 이곳 송정리 일대는 아월역(송정천 변의 느티나무 주변의 공지로 추정)과 함께 오랫동안 역참마을로서 혹은 영남좌로와의 교차점으로서 옛길로 이용되어 온 가치있는 장소인 것만은 사실이다. 3)철마면을 나와 영남대로의 마지막 숙소 용당驛을 향하다. 그림 傳 선여사부도 숙종 37년 통신사 부사 임수간(1711)의 동사일기와 영조 39년의 통신사 정사 조엄(1763) 의 해사일기를 보면 通信사행단이 머문 곳 마지막 숙소는 용당촌(역)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용당은 송정리를 나와 舊 도로에서 계속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구도로를 따라 가다보니 立石이란 마을 표식이 나온다. 입석이란 선돌을 말함이다.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거석 문화이다. 마을을 돌다 村老와 함께 선돌로 향했다. 촌로께서 말씀하시는 선돌은 전형적인 청동기 시대의 형태로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약간의 파손을 입었지만 마을 어른의 애착은 상당하다. 한참동안 마을의 내력을 듣고 임기리 로 향하다 우연히 길가 쓰레기와 함께 방치된 浮屠를 만났다. 높이 1m정도의 이 부도는 조선중기의 형태로 보인다. 아래 부도의 종을 받치는 하박석에는 복련의 연꽃이 조식되어 있고 鐘形 부도의 상단부는 연봉이 새겨져 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선돌 설명을 해주던 촌로께서 말씀하신 선여사에서 가져왔다 한다.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조경장식을 위해 가져가다 다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얼마 전 누군가가 굴려서 가져가다 들켰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앞쪽이 좀 긁혀 있다. 임기리를 향하다 옛길이 막힌다. 7번 국도를 타고 올라 월평을 지나 웅상을 지나니 용당마을이 들어온다. 그림 용당마을 대나무밭 용당마을에는 마을 초입의 은행나무 외에는 그 옛날의 통신사행단이 머문 흔적은 찾을 길 없다. 그냥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그러나 임수간이 지은 동사일기에 그 단초가 있다. “아침에 울산을 떠나 진남루에 올랐다. 저녁에는 용당역 촌사에서 잤는데 관사가 자못 정결하고 처마에 둘린 竹林이 매우 무성하여 상쾌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림 용당마을 은행나무 다른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대나무가 이곳에는 유달리 많았다. 그야말로 마을이 죽림에 둘러져 있다. 마을 뒤편에는 임기-울산간 도로를 내는데 노송 한그루가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이것 역시 그 옛날 옛길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많은 죽림이 베어졌지만 아직도 적잖이 이곳 용당리에는 남아 있다. 이곳에서 확인한 것은 바로 용당역도 작은 내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송정천가에 있는 느티나무 지역이 아월역이란 추정을 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4.종합의견 기장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 바다를 면해 해상교통이 어느 곳 보다 발달해 있고 내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교통로도 발달해 있다. 오늘날 물산의 이동이 확대되고 빈번해짐으로 옛길은 廢道되고 유실된 지금 기장의 용소골은 내륙과 연결해주는 기장의 幹線道路로서 역사상 그 가치가 있다. 관원과 상인들의 이동과 이로인한 물산의 이동이 쉼 없이 이루어져 길목에는 기장신역과 철마면의 아월역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기장 신명역은 읍치 서쪽 1리에 있다했으므로 지금은 주공아파트와 저수지로 인해 매몰되어 있다 본다) 이러한 용소골 옛길의 일부는 저수지로 인해 끊겨져 있지만 저수지 상부에서 신작로(14번 국도)에 이르는 길이 옛길로서 보존 되어져 있다. 관원들이 오가는 교통로에 면해 있는 냇가에 龍沼가 있고 그곳에 刻字된 현감들의 이름과 여근암의 전설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이 용소에서 오르는 바위 면에 인공적으로 새김을 한 것은 사인교를 타고 가는 가마의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소위 棧道라는 형태가 암벽에 면해 구멍을 뚫거나 바위를 깍아 길을 낸 것을 일컫지만 황산잔도에는 일부 초기 형태의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빨래판같이 생긴 새김이 있다. 이런 면에서 바위면에 새긴 새김질도 잔도의 기본형태로 볼 수 있겠다. 저수지에 잠긴 가파른 옛길에도 이러한 것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오간 흔적으로 지금도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르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다. 용소 우측에 주막이 있었다 하나 이는 우역제가 폐지된 이후 민간에 의해 운영되어 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주막대신 정자의 건립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 기장읍 용소골에서 7번 국도에 이르는 길인 송정리에서 아월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은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팽나무와 하천이 흐르는 이곳은 칼치재를 넘어 지금의 대우정밀을 통과해 양산, 동래에 이르는 길이고 場市를 위해 상인들이 이동한 옛길로 분명한 흔적인 것이다. 이후 여관이 많이 생겼다는 마을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곳을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花木 ,정자 등으로 정비하되 가능한 원형을 보존하고 살리는 데 역점이 되었으면 하며 칼치재를 넘어 송정리와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기장신역(신명역)의 위치비정도 아울러 제안한다. 한가지 추가한다면 입석마을에서 임기로 가는 길에 선여사 鐘刑 부도가 쓰레기 더미와 함께 방치된 것에 대한 보전이 필요하다. 종형부도의 조식으로 보아 문화적 가치가 있으며 비지정문화재로 안내판의 설치와 함께 아월역-선돌-부도-선여사로 이어지는 종합적인 안내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초는 길이다. 고분군이나 읍성, 산성, 왜성, 봉수대 모두 길과 연결된다, 옛길은 잃어버린 생활사를 찾아주는 missing link이므로 옛길 복원에 관심을 가지는 기장군에 다시금 감사한다. *글: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실장 차문성 *사진: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고문 이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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