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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일기
 
 
 
 

대마도 일기
대마도!
가깝고도 먼길을 오랫동안 잊어왔었다.
후쿠오카에서 30분 부산에서는 20분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우리는 아득한 역사의 뒤안길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되새겨 보면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름인가.
얼마나 조선인의 마음을 쓰리게 한 존재인가.
어디 조선의 해안가에서 망부석의 전설이 없는 곳이 있는가.
젊은 부부의 생이별은 개인적인 것으로 치더라도 임진란에 70,000여 명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가고 귀무덤이라 불리는 耳塚을 만든 것은 당시 조선정부가 "천년지간의 원수로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잊을 수 없다."고 한 사실에서 그 분노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대마도는 임진란의 와중에 풍신수길의 편에서 침략전쟁에 앞장서기도 한 과오를 저질렀다. 임진란이 끝난 후 대마도는 조선정부가 선린우호의 길을 터줄 수 있는 조선통신사를 꾸준히 요청하였다. 임진란 후 대마도의 살 길은 바로 조선과 에도정부의 선린우호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통신사는 그 대마도의 배신에 신뢰감을 심어주었고 절망에서 선린우호의 길을 만들어 두 나라의 백년대계를 세운 감동적인 일이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찍 서둘러 아침 첫 비행기(7시 55분 출발)로 대마도로 향했다. 조선실록에 '대마는 척박한 땅으로 자립을 할 수 없는 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비행기에서 본 대마는 그 표현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 산으로 중첩되어 한 톨의 쌀도 생산되기 힘든 땅으로 보였다.
1719년 숙종 45년에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동행한 신유한 공은 "대마도는 별명을 芳津이라 하고 좁고 길어서 동서가 300리 정도 되고 남북은 그 3분의 1이다."라고 한 바대로 길면서도 모자를 쓴 것처럼 산으로 덮여 있었고 섬의 외곽은 절벽으로 깎여져 있어 천연의 요새를 방불케 하였다.
제법 지대가 높은 활주로에 착륙하여 공항을 나서니 한국말로 된 안내판도 보여 우리의 여느 시골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버스는 산을 깎아 신작로를 낸 도로를 따라 좁은 길을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비좁은 길을 헤쳐나간다. 이윽고 37분 후에 이즈하라 시내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방문객들의 발길이 뜸한 한적한 시골동네의 모습이었다. 바닷가의 부산한 움직임을 기대한 우리에게는 오히려 낯 선 느낌이 들었다.
먼저 대마관광협회에 들러 안내지도를 받은 후, 자료관에 들렸다.
대마자료관의 입구에는 큰 문이 있는데, 고려문이라 이름이 되어 있지만 ‘가라몬’이란 히라카나가 붙어 있었다. 고려를 ‘고마’나 ‘고라이’라 적지 않고 ‘가라’라는 가야의 이름을 사용한다. 얼마 전 대마의 구석구석에 가야의 옛 지명이 남아 있다는 부산대 교수의 연구논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자료관 좌측에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고 조선어학습지, 아메노모리호슈의 초상화, 도자기, 통일신라시대 불상 등이 여럿 진열되어 있었다. 또한 통신사가 대마번주에게 증정한 기증품이 진열이 되어 있었다. 우측에 있는 진열관은 대마도의 자연 및 풍습등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마당에는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그 연륜에 걸맞듯이 이끼 낀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대마의 관광에 있어 조선통신사의 유적이 아직도 그들에게 생명줄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지나간 역사를 연구하고 보존하면 관광지로, 상품으로서의 부가가치를 높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마번주(일본에서는 藩主로, 조선에서는 島主로 표현)의 城인 금석성을 지나 만송원(반쇼인)에 도달하면 비록 시내에 인접한 절에 있지만 깊은 산속에 들어온 속세를 떠난 선승의 기분에 사로잡힌다. 약 14세기에 만들어진 건축이라는데 일본의 신사건축처럼 입구를 유달리 높게 기둥을 올리는 방법을 한 건물이다. 덕천막부의 위패를 모신 탓인지 채색을 하지 않은 단조로운 건조기법으로 내부장식을 단순화시켜 놓았다. 건물을 빠져 나와 우측으로 돌아가니, 대마번주 소우씨의 부도밭으로 올라가는 길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을 등불의 나라라고 했던가... 수많은 석등이 도열하듯이 긴 행렬로 계단을 따라 소나무숲으로 들어간다. 이곳 반쇼인에 촛불이 켜지고 도열한 석등에 불이 켜진 날이 조선통신사가 오는 날이다.
부도밭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찾은 부도가 19대 번주 소우요시토시와 20대 소우요시나리의 부도였었다. 역시 소우요시토시의 부도는 50센티도 안되는 왜소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후미진 곳에 서 있었다. 반면에 아들인 요시나리의 부도는 난간과 대문도 크고 화려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후손들의 부도 역시 당당한 모습이였었고 에도막부가 끝날 때의 번주조차 요시토시의 무덤만큼 빈약한 모습은 아니었다
조선과 일본이 평화를 지켜 교역을 하고 교린을 할 때에는 대마인 역시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고 전란 속에서는 참혹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임란이 끝난 후, 조선과 평화교섭이 시작했을 때 소우요시토시가 앞장을 섰다. 대마의 사활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임금은 격노한다. 대마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려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대마를 어버이가 자식을 대하듯이 돌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전란 후, 대마는 생계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젊은이는 전란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군수물자로 소우씨의 재산은 탕진해 버린 상태였다. 대마의 살 길은 조선과 통교를 하여 예전처럼 조선이 어버이로서 대마를 돌보기를 원했다. 이러한 사실때문에 요시토시의 무덤은 초라해 관광객들 조차도 사진찍기를 거부한다. 그 초라한 모습때문에.
역사의 진실은 바로 이곳 소우氏의 무덤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일행 셋이 내려가 대마도에 근무하는 자위대 여군 2명이 올라오길래 기념사진 한 장를 부탁하였다.


오늘의 관광객은 우리 일행 세 명 밖에 없었다.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법 큰 교차로가 있는 곳에서 작은 식당을 발견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였다.
아메노모리호오슈의 무덤은 현해탄님의 노련한 솜씨로 武街의 길을 지나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대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길을 올라 꼭대기에 아메노모리호오슈의 가족묘가 있었다. 그의 조선과의 성의를 다한 교린외교 주장은 오래도록 양국의 우호에 표석이 되어왔다. 그의 무덤에는 동전들이 놓여 있었다. 일본동전도, 한국의 동전도 섞여 있었다. 우리만의 표시를 할 수 있는 동전 하나를 깊숙히 묻어 두었다.
이제 통신사 본답사의 숙소로 고려중인 西山寺의 방문이다.
서산사(세이잔지)는 1719년 신유한공이 왔을때 통신사 일행이 머물렀던 곳이며 임진란 이후 에도와 대마도간 연락및 조선과의 외교문서를 담당한 僧 현소의 무덤이 바로 이곳 서산사의 절 뒤편에 놓여져 있다. 유서깊은 곳이기에 본 답사시 단원들의 숙소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0명이 최대 수용인원이라기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두 곳으로 인원을 나누던지 아니면 다른곳으로 숙소를 옮기는 것은 대마 관광협회와 추후 연락을 통해 결정키로 하였다. 조선통신사의 숙소가 얼마나 경치 좋은 곳이었는지 이곳에서 보면 대마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건너편에 있는 修善寺로 향했다.
수선사는 대한제국때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 선생이 순국한 곳이다.
왜적이 주는 쌀 한 톨도 먹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에는 단식으로 죽음을 택한 분이다. 1980년도에 세운 비석이 한켠에 세워져 있다. 비석을 건립한 재단이 눈에 띤다. 日海재단이다.
오후의 긴 햇살이 오랜만에 찾아온 조선인의 머리 위를 달군다.
어깨에 진 짐을 풀고 선착장의 관광상품 가게에 들러 엽서를 샀다.
결혼기념일을 일본에서 지내기에 아내에게 편지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이 언제쯤 끝날지 "미안과 사랑"이라는 말이 교차하였다.
까치동자도 선생님께 보낼 엽서를 샀다. 현해탄님은 여전히 일정문제를 검토하고 계신다. 차 한잔을 마시며 여전히 통신사 때의 모습을 간직한 바다를 보면서 긴 상념에 잠긴다. 바깥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다.

저기 하카다(博多)항이 보인다.
15시 20분쯤 뱃머리에 올랐다.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올라와 뭐라고 말문을 열었다. 까치동자가 귀뜸을 해준다. 그는 형사였다. 외부인들이 와서 아마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마는 일본의 변방으로서 외부인에게는 禁域이었나 보다. 아주 미안한 얼굴을 하며 여권을 요구했다. 잠시 후 현해탄님의 설명으로 통신사의 답사를 위해 온 사실을 알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한다고 한다. 그 청년의 인상이 나쁘지 않아 우리는 쾌히 그와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배는 1000명 가량 탈 수 있는 배였다.
손님은 그곳 주민 몇 명과 자위대원들뿐이었다. 관광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시간 반 정도 흘렀을까. 바깥에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끼섬에 가까워 오니 불빛이 어슴츠레 빛나기 시작했다. 대마도의 근동에 있는 섬이지만 대마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낮은 언덕과 부드러운 해안선이 풍요로워 보였다.
이곳은 신유한 공의 해유록을 보면 대마현이 아니라 후쿠오카현에 속해 있었는데 대마가 10만섬의 현이었던데 반해 50만섬의 규모이니 부유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승객이 배에 탔다.
배가 하카다항에 저녁 8시에 도착하였다. 하카다는 신라의 제상 박다진이 죽음을 맞은 곳이고 아시카가 정권에 사신으로 간 정몽주가 감옥에 갇힌 곳이 있고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왔을 때 하카다(和家多)로 이름을 붙여주어 지금도 그렇게 쓰는 우리와는 무관하지 않는 곳이다.
10시 45분에 오카야마로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탔다. 본답사때 1박을 해야하는 버스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었고 좌석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이어폰, 커피를 비롯한 각종 차, 쥬스, 화장실 등.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 빠짐없이 있었다. 한참 자고 있었더니 커튼이 개인별로 드리워졌다.
일행은 깊은 잠에 빠졌고 차는 빗길에도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리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빗발이 창문을 강타하고 있어 오늘 아침 우시마도행이 쉽지 않을 조짐이 보였다. 현해탄님이 버스기사에게 미리 얘기를 해놓아 버스는 예정보다 10분 일찍 오카야마 텐바야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분 후 우시마도(牛窓)행 버스가 도착하였다. 골목 골목을 돌아 바닷길을 거쳐서 우시마도에 도착하였다.
바다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海游문화관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신유한공의 기행문을 본따서 만든 이름이다. 당시의 문집과 유품, 조선통신사의 사행에 이용된 배모습과 유명한 춤인 가라코(唐子)가 전시되고 있었다.
Touch방식으로 된 우시마도와 조선통신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테이프가 방영된다. 한 여름에는 시원한 해변으로 유명한 우시마도는 여름 한철이 끝나면 다시 조선통신사의 계절로 바뀐다.
뒷편 언덕 위에 혼렌지(本蓮寺)가 보인다. 오카야마번이 통신사들의 접대를 위해 혼렌지에 통신사의 숙소를 정하게 된다. 오래된 고옥과도 같은 혼렌지는 언덕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중문을 들러서니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길게 뻩어있다. 빗방울에 땅바닥은 온통 젖어 있어 본당으로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사전에 연락을 하였기에 주지스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스님께서 그러신다. 소방대장과 유지들이 혼렌지의 소방대책에 관해 의논을 했다고 한다.
잠시후, 스님은 우리들을 방으로 불러 통신사 사행 때 이용된 방들을 보여주며 기증품과 유물을 보여주며 통신사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방으로 들어 오라신다. 사진첩과 명함들을 보여주며 통신사의 일에 열정을 보여준 일을 늘어놓았다. 공로명 장관의 방문과 일본주재 한국대사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시고 간헐적으로 연구되던 조선통신사가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국회연설에 아메노모리 호오슈의 인용으로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연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얘기끝에 노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노대통령의 아메노모리호오슈에 대해서는 놀라운 사건이었다라고 되새기신다.
오랜 기간 조선통신사에 대한 열정을 보이시고 남은 기간을 통신사를 위해 사시겠다는 의지를 가지신 노승께 깊은 경의를 우리는 표했다. 12월에 다시 찾아 뵙겠다는 말씀에 사진첩을 만들어 주실려고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 주기 위해 탑이 있는 곳까지 동행하여 주었다.
1980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혼렌지의 삼층목탑은 17세기말에 건립되었다 한다. 금당과 서원 등도 빗물에 어울려 나그네의 심기를 아쉽게 만든다. 아쉬운 작별을 스님과 하고 혼렌지에서 본답사때 행사를 갖기로 하였다. (스님께서는 아래 해유문화관의 표지판이 遊가 아니라 游인데 틀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고 곧 고칠 예정이라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내에 출판된 많은 책에도 遊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놀 遊가 아니라 헤엄친다는 의미의 游에는 큰 차이가 있다)
12시 50분에 오카야마를 거쳐 후쿠야마로 길을 재촉했다. 오카야마번의 화려한 성들이 눈앞을 지나가고 개울가에 철새들이 노니는 모습들을 관망하면서 후쿠야마 역에 도착하였다. 후쿠야마 역 앞에는 후쿠야마번의 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면 고성과 어울리는 현대식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후쿠야마 현립 박물관, 3개의 전시실을 들어가기 전 박물관에 짐을 보관실에 맡기고 입실을 했다. 전시품은 많지 않았지만 일본의 고대사와 생활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평면적 전시를 지양하고 계단식 전시와 아래쪽에는 관련 설명을 도해한 현대식 전시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후쿠야마의 전통가옥을 전시한 전시실에서 가옥에 붙어 있는 잠자리, 거미 등도 실제와는 구분이 안될 정도를 정교하게 만든 그들의 노력에 경탄을 하게 되었다.

日東第一形勝
아침에 서둘러 행장을 차리고 길을 나섰다. 도모노우라.. 1711년 종사관 이방언이 日東第一形勝이라는 일대 찬사를 보낸 곳이다. 우리 일행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기에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우시마도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세도나이카이’라는 일본 최대의 해상국립공원이므로 그 형상은 자못 아름다웠다.
우시마도를 비롯한 도모노우라는 당시 해상교류의 꽃이었다.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일본이 해외와 교류를 하고 문물을 받아 들이던 곳이었다. 지금은 과거처럼 분주한 항구는 아니지만 한적한 어촌마을의 모습을 가진 그러한 곳이다.
바닷가에 등대가 하나있다. 에도시대의 등대라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 역시 이 등대 사이로 배를 정박했을 것이다. 배에서 내리는 계단 역시 당시 것이라 하니 편의를 위한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일본 사회의 경제적 단면을 보게 한다. 후쿠젠지(福禪寺)로 올라가 사진을 찍은 후 벨을 누른다.
한 노승이 나와 아침 첫 방문객인 우리를 반긴다. 실내에서 유물을 구경하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스님은 문을 열어준다.
오래된 이 문들은 우리처럼 미닫이가 아니라 주로 여닫이로 된 창문이었다. 유물은 대부분 편액으로 만들어져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서각으로 된 글자를 보게 되었다.
對潮樓. . .
이 편액은 1748년 통신사의 정사 홍계희의 아들인 홍경해가 이곳의 경치에 감탄하여 쓴 글 이다. 이들은 에도로 향하는 길에 후쿠젠지에 들어가려 했으나, 숙소를 아미타사로 정하는 바람에 할수없이 이곳의 경치를 보지 못하고 에도로 갔으나 귀국길에는 반드시 후쿠젠지로 숙소를 옮기도록 확답을 받아 귀국길에 후쿠젠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과연 이들은 1711년 종사관 이방언이 읊은 일동제일형승의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많은 시와 산문을 후쿠젠지에 남기게 된다.
스님께서 열어준 창문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 . . (까치동자의 감탄사)
과연 日東第一의 形勝임에 틀림이 없다.
아래쪽의 건물들은 모두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양쪽은 확 트인 바닷가. . .
섬들을 오가는 배들은 당시 조선통신사들이 탔던 배를 모방해 만든 배들이고 건너편에는 삼층목조탑으로 보이는 에도시대의 탑들이 있고 섬들은 점점이 펼쳐져 있다.
우리들은 넋을 잃고 한참동안을 바닷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삼층목탑이 있는 섬에서 태양은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파도는 가을바람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잡초는 우거지고.. (쿄토)
도모노우라에서 후쿠야마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고 후쿠야마에서 쿄토까지는 신칸센으로 이동을 한다. 일본에는 도시락이 발달되어 있어 차내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다.
쿄토역에 내리니 화려한 궁성이 있을 것같은 상상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린다.
교토는 경주와는 달리 현대식 건물이 형성되어 있고 대형 쇼핑몰도 많은 곳이다. 일전에 고속전철 이사장이 말한 대로 ‘교토에 신칸센이 들어가는 데 우리라고 경주에 고속전철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법이 있는가’ 라고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가 있는데 참으로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교토에서 받은 첫인상은 교토와 경주는 비교의 대상이 안된다는 것이다. 헤이안시대에 이곳 교토로 수도를 옮겨와서 본격적으로는 10세기 이후에 문화의 꽃이 피고 가마쿠라시대에는 무사계급으로 인해 정치의 중심이 옮겨지지만 상공업의 중심으로는 여전히 교토가 중심세력으로 남아 있게 된다. 교토는 도시의 양쪽에 있는 산을 중심으로 절들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현해탄님이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고대 역사와 문화가 매장되어 있은 경주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나증에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경주와 일본의 고대도시의 비교는 크기에 있어 차이가 나지만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와 비교가 가능하다. 아스카 지역에 신칸센이 관통을 한다면 일본에서는 아마 문화전쟁이라도 날 터인데 우리네 고속철도 이사장은 멋모르고 잘난체 하는 꼴이다.
아무튼 교토의 첫인상은 상공업 도시라는 인상이 짙었다. 쿄토에서는 우리들은 시간을 많이 지체할 수 없다. 조선통신사의 일정이 내일 伏見桃山 城에서 끝나게 되고 오늘은 일본의 현실을 알리는 대표적 문화유산을 나타내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일단은 교토의 대명사이자 일본의 대표적 문화재가 있는 廣隆寺(고류지)로 향했다. 교토역에서 광륭사까지는 40분이 소요된다. 가는 길에 숱한 절들이 여기저기에서 제 모습을 각각으로 뽐내고 있다. 이 많은 절에서 한곳을 고른다면. 바로 그 일을 사전답사단에서 해야 한다.
광륭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곳이 문화를 지극히 보존하자는 主義가 팽배해 있어 혹시 미륵반가사유상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일본은 역시 나무의 나라이다. 큰 목재를 가지고 실험주의적인 정신으로 높이 건물을 쌓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나라의 동대사의 대불전은 충격적인 목조건물이지만. 여러개의 불전을 지나 성덕태자의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나라시대의 12신장상이 눈에 뜨인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주로 사천왕으로 표현되지만 이 나라시대의 천왕상은 주로 12신장으로 표현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미산에 있는 33천의 사천왕을 포함한 12신장을 말함이다. 혹은 8부신중을 합한 수가 아닐까. 7세기 중반 신라의 양지는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을 만든바 있는데 그 사천왕상의 모습중 일부가 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양지의 작품이 당시의 조류인 사실주의적인 조각기법을 이용한 바 있지만 이곳 12신장상을 비롯한 모든 불상들이 사실주의적인 모습을 띠고 있어 우리나라의 불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익살스런 모습의 인간미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불상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일본의 나라시대상은 치외법권을 가진 무서운 신당상과 엄숙한 불상으로 표현된다. 물론 우리나라에 잔존한 불상이나 천왕상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불상의 전체적인 특성이 사실주의라는 양식을 따른것은 사실인 것 같다. 수미단으로 3단 올린 臺위에 눈에 익은 불상이 한 구 있다.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 뜬듯 감은듯한 눈매의 심오함과 반듯한 콧등. .손가락의 맵시. 볼륨있는 얼굴과 전체적 균형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숭고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단순히 우리의 국보78호와 83호를 닮은 우리의 불상이 일본에 간 것이라는 개념을 깨뜨린 적막한 순간을 만들었다. 머리의 삼산관은 단조롭게 이마에서 돌려져 있지만 국보 78호는 목에 심엽형의 목걸이가 있고 83호는 원형의 이단 목걸이가 있는 반면 이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은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고 있다. 표면에 얇은 금색의 빛깔이 보이지만 은은한 불빛의 효과로 더욱 노란 빛깔을 더한다. 숭고한 인간미의 완성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대좌 위에 내려진 옷주름은 너무 자연스러워 신비로움을 불러 일으킨다. 볼륨있는 볼은 불안의 미소를 깊이 있게 만들었다. 반가사유상의 완성이다.
문화적 충격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 광륭사를 창건한 사람이 신라계라고 하니 신라의 조불공을 데려와 불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나무의 재료 또한 일본에는 없는 적송이므로 신라인의 손길이 미쳤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을 창안하게한 모티브의 제공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願力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버려지고 황폐한 곳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보존하는 보존의 미학을 깨닫는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지나 서둘러 淸水寺(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청수사는 꽤 큰 절이다. 올라가는 길옆에는 많은 미술관과 전통공예품을 전시하고 기요미즈에서 양산되는 유명한 기요미즈찻잔을 파는 가게가 나열되어 있다. 어디를 가나 몇백년쯤 되는 삼층목탑이나 5층목탑은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중국을 전탑의 나라라고 하면 일본은 목탑의 나라,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과연 일본에는 어디를 가나 목탑이 없는 곳이 없다. 크고도 많은 불전을 지나 이 절의 핵심인 기요미즈 신사 건물로 들어섰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버팀목을 엮는 가구법으로 가파른 곳에 높이 수십미터의 절을 세운 공법은 과히 놀랄만하였다. 이곳의 신사 역시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이라고 현해탄님께서 말씀을 해주신다. 신사는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신이 될수 있다는 일본의 신앙관은 절과 생활이 습합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일본인은 태어나서는 신사에서 결혼은 교회에서 죽음은 절에서 맞는다는 현해탄님의 계속된 설명은(확실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신앙관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인 것 같다.
신사 아래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물을 마시면서 뭔가를 기원하는 의식인데 젊은 데이트족들이 앞을 다퉈 물을 마시고 있다. 우리 일행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갔다.
근데 이 물터가 국보라는데. .마치 불국사의 기단부위에 설치된 水構와 흡사한 장치에 물이 3개의 수구에서 나와 머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물을 담아 먹는 컵에 긴 손잡이가 달려있는데,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므로 자외선으로 오염을 방지하는 장치를 컵 보관대에 설치를 한 것이다.
잠시후 일본 전통 甘酒인 아마자케를 마시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 식혜와 비슷했지만 썩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날이 어둑어둑 해져 종종걸음으로 耳塚으로 향했다. 말이 이총이지 실제는 鼻塚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전쟁의 공훈을 주기 위해 귀와 코를 잘라 오는 풍습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잔인한 행동은 천년이라는 세월도 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유없는 전쟁에서 죄없는 목숨을 5만이나 앗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전리품으로 그들의 귀와 코를 베어 간 것은 시공을 초월한 죄악이다. 오늘에야 이곳에 온것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이총의 중앙부에는 높은 부도가 있었고 앞에는 안내판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 "공훈을 하기 위해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이곳에 묻어 두었다. 조선인의 완강한 저항에 밀리어 패퇴하여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때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라고 안내판에 씌어있다. 이총의 바로 옆에 조선침략의 원흉인 풍신수길을 모신 신사와 원찰이 있다. 수미터 높이에 이르는 화강석으로 돌담을 쌓고 입구에는 화려한 장식과 높은 신사의 문을 설치한 풍신수길을 모신 신사가 존재한다. 한곳에는 위로를 한다고 해놓고 한쪽에는 침략의 원흉을 모신 신사를 만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착잡한 기분으로 어두워진 밤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渡來人을 찾아서 (나라, 아스카 지역)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본다.
오늘은 2회 조선통신사(회답겸 쇄환사)가 에도까지 가지 않고 이곳 교토 伏見城에서 (1617) 도쿠가와 히데타다 장군과 회담을 한 장소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형식상으로 제 2대 조선통신사의 마지막 여정을 복견성에서 마무리하기로 한 것이다. 복견성은 임진란이 끝난후 사명대사가 探敵使로 이곳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복견성은 풍신수길이 1594년에 축조를 하였지만 화재로 인해 전소되어 화단 자리에 지금의 伏見桃山(후시미 모모야마)城을 복원하였다 한다.
아침의 시원한 바람으로 얼굴을 씻으며 2회 조선통신사의 마지막 여정인 복견도산성을 보기위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젖무덤처럼 나지막히 누워있는 경주의 능에 비해 마치 자그마한 무인도를 연상케하는 천황능을 여러개 지나 언덕위로 한참을 올라가니 성의 상층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단한 규모를 가진 성이었다. 탐욕과 권력욕으로 찌든 풍신수길의 성을 복원한 것이며,사명대사와 덕천가강과의 일대 회담이 일어난 곳이며, 평화와 우호의 상징 조선통신사가 장군에게 국서를 전달한 그곳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에도(도쿄)까지 답사를 연장하는 것이 조선통신사의 일반적인 여정이기는 하나 시간의 제약상 제 2회 통신사의 여정을 기착지로 삼고 다음의 여정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관해 맥을 짚어 보는 것이 답사의 목적이다. 조선통신사가 에도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국서를 전달한 예는 2번 있었다. 바로 2회 통신사가 그러했고 1811년 12회 통신사때 대마도에서 禮를 행한 경우도 있다(易地聘禮). 양국의 재정이 궁핍해졌고 세계의 열강들이 아시아를 넘보는 상황이었고 양국과의 교린보다 더욱 치중해야 할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60년뒤 에도의 막부는 무너지고 천황제의 시작이 되어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제 2회 조선통신사의 이름이 회답겸 쇄환사인 만큼 임진란때 잡혀간 조선인의 쇄환에 있었기에 이들은 곧바로 부산으로 향하지 않고 아이노시마와 히젠등지를 2개월간 돌아 321명의 조선인을 찾아 고국으로 데려 왔다. 임진란이 끝난지가 20년 가까이 되어 이미 혼인들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어 송환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힘든 여정이었다.
각 번에서는 조선인을 송환하려 하지 않고 조선인내에서도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한다. 당시의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보면 한명이라도 더 찾아내 조선으로 환국케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마저 보이는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에 가면 모두가 노비로 전락하게 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60여명이 도망가는 소동도 벌이게 된다. 당시 통신사들에게는 참으로 암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제나라의 백성을 적국에 뺐기는 심정이야 오죽 했을까.
1624년에 일본에 간 3회 통신사는 100여명의 조선인만을 송환했다 한다. 이 이후에는 쇄환의 이름이 없어지고 통신사로서의 교린이 본격적으로 강조되게 되었다.
높은 성의 모습이 아주 현란한 색들로 치장이 잘되어 있다.
이제는 조선통신사의 예 모습은 찾을 길 없는 넓다란 주차장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해탄님께서 담배 한대를 피울 동안 차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도래인을 찾아서"라는 제목하에 한일고대사 부분을 답사하기로 한다. 나라로 가는 도로에 진입해 한참을 가다보면 상당한 규모의 고분을 보게 된다. 교토와 나라, 아스카에는 길가에 많은 천황릉을 보게 되지만 그 규모에 놀라게된다. 또한 고분은 모두 천황릉이라 일컬어지는데 고분의 이름이 존재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즉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가 신빙성에 있어서는 희박하다고 하는데. 경주에 155개의 고분이 있지만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하나도 없다. 물론 능의 주인공을 짐작하는 곳은 여럿이 있지만 일본의 능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라로 가는 도중 현해탄님께서 멋진 고분을 하나 소개해 주겠다기에 두말 않고 따라 나섰다. 우와나베고분이다. 전후의 길이가 255m 나 된다. 전방후원분으로 해자가 있는데 그 물길이 사람의 키를 넘는다. 마치 호수에 떠있는 섬같다고나 할까. 천황의 고분이 후대 천황의 전제정권의 확립 이후 고분을 증개축한 것인지, 처음부터 이렇게 거대하게 만든 것인지 의문이 간다. 경주에서 제일 큰 고분이 황남대총인데 길이가 80m정도인데 비해 250m라면 대충 크기의 짐작이 갈 것이다. 아니 고분이 아니라 작은 산처럼 보인다. 일본 고대사의 의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이윽고 나라의 동대사에 도착했다. 멀리서 경복궁의 근정전쯤이나 큼직한 사찰이 보인다. 동대사의 대불전이다. 입구에 들어가니 온통 사슴들이다. 일본 사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공원화 되어있다는 것인데, 이곳 동대사는 사슴공원으로 유명하다. 사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대불전을 제외하고는 동대사는 사슴들 차지였다.
鹿野院을 만들기 위함일까.
동대사의 대불전은 동서 57m,남북 50m,높이 50M인 세계 最高의 목조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겨우 1단의 공포만을 보아왔지만 이 대불전의 공포는 4단의 규모이며 6출목이나 된다. 목재의 견고성으로 인해 세월의 무게를 지금도 거뜬히 지고 있는데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는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실험주의적 정신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실험주의적 작품이 몽땅 전란으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 임진란 이후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는데 사찰의 복원은 요원한 것이었을까. 분명 고려때의 사찰은 견고함뿐 아니라 작품성도 뛰어났다는 것은 현존하는 몇 안되는 고려시대 사찰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불과 고려의 건물이 5동밖에 없지만 고려시대의 건물은 조선의 건물보다는 확실히 격조가 높았다. 조선의 건물은 정자문화와 향교, 관청등의 용도이므로 고려의 절대왕권이 비호하는 사찰의 문화와는 자못 쓰임새가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건물에 있어 실험주의적 정신이란 서양의 건축에 있어 고딕건축처럼 기능주의적인 산물로서 필연적으로 공간의 확보 ,건물의 높이를 올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집적된 지식을 확립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황룡사 9층목탑과 미륵사지는 필요에 의한 욕구의 발현이며 실험주의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의 계승뿐 아니라 발전이 문화의 융숭함을 가져온다는 것은 불교문화의 東漸을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이제 대불을 살펴보자.
동대사는 화엄경의 본산으로 일컬어진다. 따라서 이 대불도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데 수인은 흔히 알고 있는 지권인과는 다른 양식이다. 대불의 연판조차도 몇미터에 이를 만큼 거대한데 그곳에는 신라 화엄경변상도를 보듯이 여래의 삼천세계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게가 2백50톤 높이가 16m,얼굴이 4m,눈이 1m 귀가 2m60 엄지가 1m60. 실로 엄청난 力事였고 이 대불을 안치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대불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전문가들의 대불의 조불법을 살펴보면, 흙과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굵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대체적인 형체를 만들고 다듬어 원형을 만든뒤 전체를 8단으로 나누어 아래로부터 외형을 만들어 갔다. 1단이 완성되면 2단을 하고 .8단까지 이루어 나갔다. 동체를 만든후 머리와 팔은 별도로 주조해서 접속했다.
여러번 대불전이 불에 타는 운명을 겪었지만 대불만은 전체를 녹이지 못하였다. 머리와 신체의 일부는 복원된 것이지만 대체의 형태만은 8c중엽의 것이다.
신라에서 석굴암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일본에서는 백제계의 후손이 화엄의 장엄한 세계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한 일일까. 한 곳에서는 흰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인공석굴에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검은 철조비로자나를 만들어 불교의 우주관을 불상에 새긴 것은 한민족과 일본인의 가치관의 차이일까.. 단순한 재료의 특성에 불과한 일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불전을 떠나 삼월당 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건물의 좌측편은 천평시대(710~790)에 이뤄진 것이고 우측은 겸창시대(1185~1336)에 건립되어 이어놓은 것이다. 서로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졌지만 확실히 시대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공포의 방법이나 기둥부재의 구성등에 차이가 있다. 우진각과 팔작을 결합한듯한 건물로서 우리네 사랑채의 모습을 띠고 있다.
나오는 길에 정창원을 들렀으나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휴관이어서 정창원식으로 유사한 건물을 삼월당 옆에 건립하여 그것을 보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기둥이 높은 주초처럼 세워져 있는 그 위에 마루가 깔려 있다. 이는 정창원이 동대사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므로 습기를 방지하고 화재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함일 것이다. 현재 정창원은 궁내청의 관할로 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동대사의 보물창고로서의 역할을 담당 했던 것같다.
나오는 길에 여전히 사슴들은 인사를 한다.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던져줬다. 눈썰미 좋은 까치는 사슴의 영역을 벌써 파악하였다. 정말 사슴들은 자기의 영역을 넘어 먹이를 갈취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신기롭게 보인다.
이제 차는 일본문화의 탄생지 아스카로 달린다. 교토와 나라는 주위가 산으로 덮여 있다. 그 산의 낮은 부분을 넘고 골을 따라 가면 아스카가 나온다. 첫눈에 본 아스카는 경주와 닮아 일본에 온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다.
40분정도후 아스카 자료관을 볼 수 있었다. 본답사 계획에 들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아뿔사 12월25일부터 1월3일까지 휴관이라 마침 이번에는 자료관개조로 인해 임시 휴관이라니. 본답사의 계획을 송두리째 수정을 해야 한다.
자료관을 볼 수 없다면 비조사나 아스카의 역사에 대한 조망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어 대체 답사지를 선정해야 한다. 그만한 곳이 있을까.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그 기간에 휴관이다. 다카마스 고분관마저 휴관일 것이다.
일단 다카마스고분으로 향했다.
다카마스 고분으로 진입하는 곳은 아담하고도 고풍스런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다카마스 고분 앞에 있는 고분 모형관에 먼저 들어가 그곳의 사신도를 보고 고구려계 고분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뿐 아니라 고구려의 사신총에 있는 月像과 日像의 그림 역시도 고구려의 유형과 흡사하였다. 잘 진열되어 있는 유물뿐 아니라 석관의 형태 또한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고분은 일차적으로 도굴을 당한 흔적이 있다. 한쪽 벽이 부러진 것이다. 그러나 고분의 벽화는 현란한 색채를 지닌채 살아있었다.
이 다카마스(古松塚)고분은 1972년 남북한 학자들과 일본의 학회에서 합동조사가 있었던 곳이다. 다카마스 고분에는 고구려 벽화와 유사한 채색벽화가 여럿 발견되었다. 김원룡박사의 수기에 의하면 당시 한국의 학자들은 7세기말 8세기초의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구려계라고 주장을 했고 북한의 학자들은 6~7세기경 고구려인이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을 했으며 일본에서는 唐계라고 일부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다. 아무튼 발견 당시부터 의견 분분한 이곳에 들어서면 고분에서 발견한 모든 유물및 古憤史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도해를 선보이고 있다.
서벽에 있는 여자상은 특히나 유명한데 2명의 여인이 부채를 들고 있고 4여인이 한 곳에 있으면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5채색을 입혀 다양한 옷의 색깔을 내고 있고 과대 역시 다른 색으로 되어 있어 피장자는 상당한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들의 치마는 빨간색과 청색 노란색으로 마치 월남치마같은 느낌을 준다. 옷에 있어서는 고구려 계통과는 확실히 다르다.
고구려여인들의 옷의 특징은 소위 땡땡이 무늬를 즐겨 입는데 있다. 아마 옷은 지역적 특성과 재료의 특성이 있으므로 고구려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답사때 방문이 불가능해 사진촬영을 고분관에 요청했다.
잠시후 관장이 나와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더니 한참동안 사진불가에 대해 설명을 했다. 조선일보에서도 촬영을 위해 6개월 전에 정식으로 요청했다고 하니 우리도 그러한 절차를 밟으라고 한다. 고분 모형관인데도 지나친 보호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절차를 중히 여기는 일본사람들의 사고에 오히려 동조감이 들기도 하였다.
고분모형관을 나와 뒤편에 있는 고분을 찾아갔다.
그리 높지 않은 봉토이므로 발굴 당시 채색벽화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경주의 천마총에서 예상치 못한 금관이 발견된 경우와 비슷하다. .외형상 다른 특징보다는 2중으로 습기제거와 고분을 보호하기 위한 첨단시설을 갖춘 것이 눈에 뛴다. 그 위대한 무령왕릉이 빗물에 새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고송총은 첨단시설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비조사로 향했다. 비조사의 진입로는 좁았다.
비조사에는 비조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비조대불이 있었고 뒤편에는 비조사에서 발굴된 와당들이 일부 전시되고 있다. 주로 와당은 비조시대와 그 다음 시기인 백봉시대의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비조시대의 것은 8엽문이며 끝이 반전된 백제의 와당과 닮았고 백봉시대의 것은 신라시대의 특징인 간판이 2중으로 도드라져 있다.
지금은 옛모습이 전혀 없어 발굴당시의 모습을 상상한 것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유일하게 심초석의 위치만 나무막대기로 표시되고 있다.
592년에 금당과 회랑이 만들어지고 593년에는 탑을 만들기 시작하여 불사리를 이곳 심초석 속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 근처에서 2천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스카자료관을 들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당시 발굴자는 "마치 고분을 발굴하는 것과 같았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비조사는 백제에서 조불공과 조사공 와박사, 노반박사등을 파견하여 백제의 기술로 7년만에 완공한곳이다. 이 비조사 이전에 일본에는 기와지붕이 없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 비조사는 엄청난 역사였을 것이다. 이 비조사를 조영한 당대의 실력자는 백제계인 소아씨가 전권을 잡고 있었다. 백제와 일본의 협력자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石舞臺로 서둘러 올라갔다.
이곳은 소아씨의 실력자 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대한 돌덩이가 하나 있다. 마치 강화 지석묘를 보는 듯하다. 원래는 위에 봉분이 있었다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봉분은 온데간데 없고 아래쪽에 있는 봉분의 호신석만이 옛날의 흔적을 남겨준다.
거대하기는 하지만 구조상으로는 횡혈식 석실분이다.
한쪽은 완전히 막혀 있었고 계단을 따라 다른편으로 들어가게 만든 돌방무덤이다. 백제의 장방형돌로 만든 석실분은 아니지만 자연석의 돌을 이용하여 지붕돌은 두개로 덮어져 있고 벽면을 장식하는 돌 역시 자연석이지만 석관을 봉안하기 위해 칼로 긁은 흔적을 여러군데 남기고 있다. 석실에는 입구에 따른 연도가 있고 안쪽에 주실이 있는 형태다. 입구에서 주실까지는 6~7m는 족히 되는 듯하다. 입구에서 주실까지는 배수로가 놓여져 있고 주실에 들어가 보니 아늑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백제와 고대일본 역사의 의문은 이 아스카 지역 곳곳에 서려 있다. 바로 석무대의 동남방향으로 400m를 가면 都塚古憤이란 곳이 있다. 직경이 30m 한변이 28m인 이곳은 석무대와 비슷한 형태이며 소아씨의 일족으로 알려 지고 있으며 龜巖(거북돌)이라는 돌 역시 무덤의 내부에 있었다 하는데 이 역시도 백제인의 예 이야기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 신비감을 더해준다.
일정상 마지막 귀착지인 판개궁터로 향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컴컴한 가운데 사진의 후랫쉬를 터뜨렸다.
판개궁터는 서기에 의하면 642년에 황극천황의 명에 의해 조영되었다한다. 자연석을 정교하게 포개 편편한 바닥을 만들어 맨발로도 걷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판개궁터에는 여러가지 사건이 발생한곳으로 당시 권력구도가 복잡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제계와 일본 토착의 신세력간의 암투가 있었음은 소아녹자의 암살에서 그 가능성을 말해준다.
판개궁터와 비조사는 지척간이다. 따라서 원찰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을 것이다.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통일한 후 일본에서도 수도를 나라로 옮기게 된다. 당시 아스카의 70%를 차지한 백제계 도일인 역시 신시대의 창조를 위해 나라로 거처를 옮긴다. 비조사도 역사의 전면에서 뒷면으로 사라져 가게 되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비조사에서 민박할 집을 찾았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니 동네 사람이 한명 서성거린다. 바로 예약한 민박집 주인이다. 피곤한 몸을 상쾌한 인사로 맞아준다. 따뜻한 차로 마시면서 메모를 한다. .민박집 앞에는 당시의 역사의 한 단면인 비조천이 소리를 높인다. 아스카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간다.

문화의 寶庫, 법륭사에 가다
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飛鳥의 바람을 맞는다.
비조지역은 행정명으로는 明日香이라고 한다. 근데 난데없는 비조는 무슨말일까. 비조의 일본말인 아스카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 일설에는 安宿이라는 한자어의 발음이 고대 한국의 발음으로 아스카(ASUKA:飛鳥)로 발음되었다 한다.
아스카는 낮은 구릉으로 이뤄져 여타 일본 지역과는 자못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왜 渡來人들은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되었을까. 한반도의 하늘과 땅을 닮은 이곳이 安宿,살기 좋고 편안한 곳이었기에 이 땅을 선택하게 되었을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정쟁이 끊이지 않고 암투가 벌어진 이곳은 한반도의 삼국이 힘을 겨루는 각축장으로 때로는 견제세력으로 성장할수 있었던 것같다.
현해탄님께서 신찬성씨록에는 소아마자의 아들이름이 가라코(韓子)였고 손자의 이름은 高麗(고구려를 말함:고마)였다고 한다. 그럼 당시 일본에 있는 도래인들도 고국을 그리는 ,애타는 심정이 있었단 말인가.
본답사 이전에 우리는 소아씨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아내어야 한다. 백제와 아스카와의 관계를 심도있게 연구해야만 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봄날처럼 따스한 햇살이 비춰진다.
민박집 바로 앞에 있는 야산(아마가지)에 소아마자의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주초도 남지 않은 일개 야산에 불과하다. 세월은 흘러 그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잡목만 무성하게 산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도유라(豊浦)村. 언제부터 이 이름을 이 마을이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풍요로왔던 옛날을 그리며 소중하게 간직해온 이름은 아닐까.
이윽고 한반도의 모습을 지극히 닮은 이곳을 떠난다. 그리움을 묻어두고 떠난다. 차라리 이곳에 아사달의 이름을 남겨두고 떠난다.
법륭사로 가는 길은 일요일이라 한산하다. 어제의 동대사와 비교하면 너무도 조용한 길이다. 잠시 가라코가기라는 죠몽시대의(BC 2C ~ AD 1C)의 건물에 들렀다, 물론 유구를 복원한 것이다. 벽돌에 건물의 그림이 남아있어 보존보다는 복원을 택한 것같다. 일본에는 조그만 마을에도 자료관이 있다. 보존이 관광이나 문화의 수입원이 되기때문이다. 역시 이곳에도 향토자료관이 있다. 이러한 지혜가 개발과 보존이라는 양대 문제에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까.
이윽고 법륭사의 입구에 다다랐다.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이 있는 곳, 일본의 최고의 보물들이 남겨진 곳 한반도로 말하면 삼국시대의 잔영이 살아있는 곳. 바로 그곳이 법륭사이다.
여느곳과 마찬가지로 법륭사 앞에도 안내관이 있다. 法隆寺(호류지)에 들어가기 전에 사전에 알아야 할 지식을 전해주는 곳이다, 일부의 컴에서는 만화로 그 시대의 인물과 연대표를 밝혀주고 있고 법륭사의 공포와 건축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도해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확실한 메모를 준비한 뒤 살아있는 역사, 법륭사로 입장하였다.
비조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중문을 지나면 소위 법륭사식이라는 東塔西殿식의 일탑일금당 양식인 법륭사의 뜰에 들어서게 된다. 방문자의 입장에서 보면 좌측에 5중탑, 우측에 금당이 서있다. 바로 뒤편에는 강당이 위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7세기초에 추고천황조에 성덕태자와 더불어 건립한 이곳은 전소하였다고 전해지나 ,곧 바로 재건하였다 한다. 따라서 아무리 늦어도 서기 700년경에는 만들어 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5중탑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금치 못했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일천삼백년을 견딜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바깥에서는 소위 주심포인지 다포인지를 알수가 없게 되어 있다. 고식의 양식에서 보이는 遮陽間은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지엄한 금당의 모습을 일반인에게 금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부는 어두워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차양칸 역시 중세에 수리 기록이 있으므로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포는 2출목으로 볼 수 있으나 첨자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고구려 무용총에서처럼 내부에 들어간 형태로 力士가 지붕을 받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행공첨자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지붕내에 있는 부재인 하앙을 살미부가 바로 받혀 힘을 분산하는 고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탑과 금당이 동일하게 이루어져 있어 창건시기가 동일함을 말해준다. 우리나라에는 서까래 방향의 출목을 받는 하앙구조는 전북 화암사의 극락전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화암사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원래의 하앙구조가 가지는 기능을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삼국시대에는 하앙구조가 없었단 말인가. 남아 있는 건물은 물론 없다. 그러나 부여에서 발견된 청동제 소탑에 하앙구조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전에 얼아름 서울지역 슬라이드(부여 사전답사) 상연때 여러 얼님들에게 보여준바 있다. 물론 출목등의 구조재는 생략된 것이지만 하앙은 분명한 모습으로 있었다.
법륭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일본의 거의 모든 불사를 백제계 도래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작은 소탑 하나가 잃어버린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땅속에서 살아 남은 것이 10권의 역사책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발하게 되었다.
이 탑과 금당의 상층부 활주에 붙어 있는 섬세한 용무늬를 새긴 조각이 있다. 원래부터 활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활주는 무늬상으로 후대에 교체된 것이 틀림없다. 건물의 바깥에 차양간이 있기에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內陳柱에는 약한 배흘림이 보였다. 차양간의 축부에는 배흘림이 없는 직선재로 처리되어있었고 계단은 4면 모두 있고 기단부는 장대석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금당내에 있는 유물을 살펴보자. 담징이 그렸다는 12면 벽화도 보이고 성덕태자의 등신상, 그리고 비조시대, 백봉, 나라시대의 보물들이 즐비하였다. 담징의 벽화는 불에 탔지만 사진으로 보관을 하고 있었기에 복원이 가능했다고 한다.
미술사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이곳에는 55동의 건축이 시대별로 존재하고 60여점이 국보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조각및 서화등이 500여점이나 존재하여 마치 각 시대를 모아 놓은 노천박물관과도 같았다. 탑과 금당을 지나면 성덕태자가 살았다는 夢殿이 있다. 8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몽전은 팔각원당형으로서 신라말의 부도의 옥개부와 모습이 흡사하다. 기단은 탑, 금당과 마찬가지로 2중기단을 사용하였고 계단이 있는 곳에 문을 내어 4면에 문을 둔 형태이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평이 있다.
다음 건물로 가보니(成靈院) 세상의 모든 보물을 다 모은 듯 진귀한 보물창고가 존재했다. 이 절을 창건했다는 행신의 등신상이 있는가 하면 백만개의 탑을 10개의 절에 분산하여 보관했다는 백만탑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에는 43900여기가 남아 있다한다. 그 속에서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발견된바 있다. 얼마전 신문지상에 백제관음을 프랑스의 루불박물관에 교환전시를 한다는 보도를 보고 혹시나 그 유명한 백제관음을 못보면 어떡하나. .걱정하였으나 관람하는 행운을 잡았다. 일본사람들이 백제는 몰라도 법륭사의 백제관음은 안다고 하는 백제관음.
앙드레말로는 "일본열도가 침몰할 때 단 하나의 보물을 가지고 가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백제관음을 택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퐁피두 대통령은 미로의 비너스와 교환전시를 제시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가진 불상이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인들의 예술적인 감각은 생활화되어 있는듯하다. 모래 속에서 진주를 볼 수 있도록 생활화되어 있는 이들의 예술감각이 오늘날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로 끌어 올린 듯 싶다.
높이 약 2. 80M 인 백제관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커 보였다. 왼팔은 늘어 뜨려 가볍게 엄지와 검지로 정병을 들고 있고 바른팔은 직각으로 세워 손바닥을 펴는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상의는 얇은 우견편단식이며 인도식의 화려한 장신구를 단순한 미로 탈바꿈하였으며 하의는 직선의 주름이 허리에서 내려가다가 x형의 천의가 내려진 아래에서는 동심원으로 바뀌어져 있고 裙衣의 중간부에는 잘 묶여진 매듭으로 x형 천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목에는 심엽형의 목걸이가 투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어깨에 걸쳐진 천의는 자연스럽게 오른팔에 감기어 연꽃 대좌에 올려져 있다. 연꽃대좌에는 비조사의 와당에서 본 연꽃이 동일한 모습으로 복련의 잎을 내려뜨리고 있다.
광배에서는 마치 불타는 느낌을 받았다. 색이 바래졌으나 노란빛과 붉은 빛이 교합하여 화염문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주고 있다. 머리에 얹혀져 있는 보관은 신라의 금관 모양이며 투각의 형태로 양 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인간적인 포즈였다면 다소 자세가 생경한 모습이라는 것이 단점일뿐. 아니 단점이라기보다는 시대가 가져온 필연적인 자세라 할수 있다.
백제의 불상은 660년 당군의 말발굽에 부여가 짓밟힐때 모두 사라졌다. 얼마전 부여에서 발견된 광배 하나는 바로 이 백제관음의 광배를 일부나마 보여주었다.
그 백제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백제관음의 대좌 아래쪽에 있는 연판의 코끝에서 볼수 있었다. 반전된 와당을 줄기찬 백제인의 생명처럼 사용한 열띤 모습을 복련의 끄트머리에 반전된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1300여년전의 백제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흐뭇한 시간이었다. 여러분과 함께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본을 본 것이 아니라 바로 백제의 모습을 보았다. 한 시대의 역사는 사라져도 생활이 된 문화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원음을 듣게 된 것이다.

시간이 멈춰섰네.
세월이 머물렀네.
소리가 사라졌네
그리움이 쏟아졌네,
문화가 일어섰네.
그것이 법륭사라네. . .

법륭사 앞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고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데 주차장 입구의 잔디가 불쑥해서 보니 고분이란다. 고분을 없애면 차 한대를 주차할 공간을 마련하겠지. 우스개 소리를 하며 우리는 20세기 일본의 신문화, 바다 위에 세운 공항인 칸사이로 단숨에 달려갔다.

(함께한 현해탄 미야우치님, 까치 최미숙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아사달 차문성 . . . 1997. 2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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