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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조선일보]한양 중심축! 남대문길 발굴
한양500년 중심축 '남대문길' 도로 발굴
임꺽정 탈출 五間水問 쇠창살도…청계천 兩岸석축 60m '성벽규모'
上流폭 16m 직선화 공사 한눈에…조선 도시계획 인프라 속속 드러나

계천 발굴을 통해 청계천 호안석축(護岸石築·하천 주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과 도로가 발굴되는 등 조선시대 한양의 도심 기반시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1773년 영조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청계천 호안석축의 장대한 실체와, 남대문과 경복궁을 잇던 남대문통(通) 일부 구간, 조선 명종 때 임꺽정이 옥에 갇힌 가족들을 구한 뒤 도성 밖으로 탈출하면서 부쉈다는 동대문 옆 오간수문(五間水門)의 쇠창살이 발굴을 통해 모습을 나타냈다.
청계천 호안은 크고 잘 다듬은 화강암(장대석·長臺石) 등을 쌓아 만들었으며, 동아일보사 앞쪽 청계천 상류의 폭은 하천 남·북편 호안석축의 폭을 기준으로 16m 정도였던 사실도 발굴 결과 밝혀졌다.

이번에 드러난 호안은 지난해 11월 발굴단이 시굴(試掘·정식 발굴 전에 시험적으로 하는 발굴)을 통해 찾았던 호안 두 곳을 확장 발굴한 것이다.

서울시는 4일 “발굴단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이 무교동사거리 주변에서 조선시대에 쌓은 호안 세 곳을 전면 발굴했다”며 “광교 남쪽에서는 조선시대 남대문통 일부 구간을 처음으로 찾았다”고 밝혔다.

  
▲ 청계천 북변 호안석축(사진 왼쪽)의 장대한 모습. 현재 60m 정도가 발굴됐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일제 이후에 콘크리트로 건축한 배수 시설물이다. /전기병기자 gibong@chosun.com  
  


지난해 시굴 당시는 호안의 윗부분 돌만이 부분적으로 드러났으며, 청계천 남쪽 호안은 당시 찾지 못해 영조 때의 청계천 상류 폭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호안 중 청계천 북편 동아일보사 앞쪽의 것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었다. 호안은 다진 땅 위에 다듬은 돌을 배치한 뒤, 그 위로 길이 1m가 넘는 장대석을 2단 높이로 올리고, 다시 다듬은 돌을 올려 쌓은 구조로, 마치 성벽처럼 장대하게 축조했다.

이곳 호안의 전체 길이는 60m 정도이며 직선으로 쌓았다. 구불구불한 자연하천이던 청계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새로 발굴된 청계천 남편 한국전산원 앞쪽 호안은 길이 20m 정도가 남았는데, 60~70㎝ 정도의 다듬은 화강암 등을 사용해 축조했다.

한편 광교 남쪽에서는 조선시대 남대문통을 이루던 옛 도로도 지하 1m 깊이에서 처음으로 발굴됐다. 조선조 500여년에 걸쳐 사용됐을 이 도로는 흙을 단단하게 다져서 건설했다. 도로가에는 30~40㎝의 작은 돌을 길을 따라 배치해 도로의 경계로 삼았다. 도로 바깥으로는 모래를 깔아 배수로 역할을 하도록 했다.

동대문 남쪽에 접해 있었던 것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성벽의 일부이자 청계천의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다리 아래에 다섯 개의 물길(수문·水門)을 낸 오간수문의 쇠창살도 발굴됐다. 쇠창살은 수문을 통해 사람들이 불법 통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문화재위원인 배기동(裵基同) 한양대 박물관장(고고학)은 “이번 발굴은 자연하천이던 청계천을 직선화시킨 과정 등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계획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증거”라며 “청계천 호안석축의 장대함은 조선 후기 영조대의 경제적 부흥을 웅변한다”고 평가했다.

김동현(金東賢) 문화재위원(고건축)은 “한양의 최중심 도로인 남대문통이 발굴된 것도 조선시대 사회생활상을 되돌아보는 데 좋은 자료”라고 평했다. 그는 “경복궁에서 남대문을 잇던 도로 하면 세종로나 태평로 등을 떠올리겠지만, 이는 일제시대 등 후대에 확장된 도로”라며 “조선조에는 광화문~광교~~남대문 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영조는 생활쓰레기 등이 청계천 바닥에 쌓여 홍수 때 범람 등으로 수재(水災)가 계속되자 1760년 대대적인 준설작업을 한 뒤 1773년에 청계천 호안을 쌓았다.

영조는 청계천 준설공사와 사업 동기 등을 자신이 직접 기록한 ‘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濬川銘幷小書)’에서 탕평책과 균역책의 실시, 그리고 청계천 정비를 자신의 3대 치적으로 꼽은 뒤, 탕평책은 실패했지만 청계천 정비는 성공했다고 밝힐 정도로 청계천 공사에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은 1773년 6월 10일, 79세의 노령임에도 영조가 수표교에서 호안쌓기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공사가 끝난 8월 6일에는 왕세손인 정조와 함께 광교로 나가 준공된 석축을 시찰한 뒤 공사를 담당한 군사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수표교 다리 밑에 모인 아이들에게 돈 20관(貫)을 던져 줍도록 하는 등 큰 기쁨을 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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